Felix Mendelssohn (1809 함부르크-1847 라이프찌히)
(정식 이름: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노 주자.
유복하고 교양이 넘치는 유태계의 부르주아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브라함 Abraham은 사려 깊은 은행가로서 그의 아버지 역시 저명한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 Moses M. (현대의 플라톤)이었기 때문에, 저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나는 이제는 저명한 아들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아브라함은 네 아이(파니 Fanny, 펠릭스, 레베카 Rebecca, 파울 Paul)에게 탄생과 함께 루터파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게 하고 일가의 성에 바르톨디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이것은 잘로몬 Salomon 가문 출신의 아내 레아 Lea의 남동생이 소유하고 있던 땅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1813년 베를린으로 이사한 후 아브라함과 레아도 1822년에 개종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평온하고 따뜻한 가정에 더하여 엄격하면서도 조숙한 재능을 개화시키는 데 알맞는 교육을 시켰다.
적절한 교육
예술에의 감수성을 타고난 아브라함도 음악가는 아니었다. 멘델스존 가문의 아이들이 음악가적 자질을 이어받은 것은 오히려 어머니 레아와 그 가계에서였다(레아의 숙모 사라 레비 Sara Levy는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가 총애한 제자였다). 파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펠릭스 때문에 그 존재는 희미해졌지만 얼마간 작곡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레베카는 노래를 불렀으며, 파울은 첼로를 잘 연주했다. 평생 깊은 애정으로 맺어진 파니와 펠릭스에게 있어서 모친은 최초의 선생이었다. 1816년 파니가 11세, 펠릭스가 7세 때 부친을 따라서 파리로 나온 두 사람은 거기에서 베토벤이 좋아한 피아니스트 마리 비고 Marie Bigot의 레슨을 받았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로는 제1선의 전문가에 의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일반 교양(하이제 Heyse)과 그리스어, 음악(헤닝 Henning이 바이올린을, 이어 리츠 Eduard Rietz가 피아노를, L. 베르거가 화성을, 첼터가 작곡을 담당했다), 또 뢰젤 Rosel이 데생을 맡아서 지도했다. 펠릭스는 데생을 잘해, 그 후 여러 여행지에서 그린 재치있는 데생이나 풍경화를 남기고 있다. 1818년 10월 28일 펠릭스 멘델스존은 처음으로 피아노의 공개연주회를 열고, 1819년에는 징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초기의 작품
그것은 1820년에 시작된다. 1821년 베버와의 중요한 만남이 있은 후 첼터를 따라서 바이마르로 간 그는 괴테에게 소개되었다. 이듬해 그는 가족과 스위스를 여행하던 중에 괴테를 다시 찾아갔다. 교향곡, 모테트, 피아노곡, 가곡 등 창작의 속도가 빨라졌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들을 양친의 집에서 열리는 일요 콘서트에서 듣기도 하고 지휘할 수도 있었다.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이 음악회는 내외의 모든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빛나는 작곡활동의 개시
교향곡 제1번으로 알려져 있는 멘델스존의 제13교향곡은 1824년에 작곡된 작품이다. 첼터는 그의 재능이 충분히 숙성되었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위해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사보시켰다. 멘델스존은 슈포어와 이미 명성이 있었던 젊은 피아노 주자 모셸레스를 만나는데, 특히 모셸레스는 가장 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 되어 함께 일하게 되었다. 1825년에 다시 파리에 체류하면서 엄격한 케루비니와의 귀중한 만남의 기회를 가졌고,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괴테를 세 번째 방문했다. 그의 양친이 베를린에 구입한 지 얼마 안 되는 넓은 주택에는 커다란 음악실이 갖추어져 있었다. 1825년 10월 리츠에게 바친 현악8중주곡 E♭장조 op. 20과 함께 멘델스존의 본격적인 창작기가 시작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위한 현란한 음악은 이듬해 여름에 겨우 몇 주간 사이에 만들어졌다(서곡의 초연은 1827. 2. 20 슈테틴). 1826년부터 1828년까지는 대학에 다녔는데, 헤겔이나 리터 C. Ritter 등의 스승 아래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제외한 모든 분야(문학, 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에 뛰어나 있었다. 체조, 승마, 수영을 잘 하는 스포츠맨이었고 댄스를 잘한 그는 근면하고 사교적인, 빛나는 학생생활을 보내고 수많은 사람과 중요한 교우관계를 가졌다(화가 마그누스 E. Magnus, 시인이자 외교관인 클링게만 K. Klingemann, 음악사가 A. B. 마르크스, 가수 데브리앙 E. Devrient 등).
대학을 나온 뒤 그는 음악에 생애를 바칠 것을 아버지로부터 허락받았다. 1829년 3월 11일, 1750년에 바흐의 사후 연주된 일이 없었던 마태 수난곡을 몇 달에 걸친 시연 뒤에 첼터를 포함한 베를린 음악가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상연, 지휘하여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격려와 원조를 받아 교양을 넓히기 위해 3년간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처음에는 1829년 4월 영국의 체류하였는데, 런던에서 연주,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1829년 11월 29일에는 필하모니 협회의 회원으로 뽑혔다. 이어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방문하고, 일시 돌아온 베를린에서는 멘델스존을 위해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음악강좌를 거절하고 마르크스에게 양보했다. 1830년 다시 출발하여 바이마르에서 괴테를 방문(네 번째이자 최후의 방문)한 후 뮌헨, 빈,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베네치아, 볼로냐, 피렌체, 로마(1830. 11. 131. 4. 10), 나폴리, 밀라노, 제네바, 루체른, 인터라켄을 거쳐 1831년 9월 뮌헨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의 회화와 음악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에 조예가 깊어진 그는 자신의 일에도 전력을 쏟아, 베를리오즈를 비롯하여 그가 만난 많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지칠 줄 모르는 창작가라고 말하게 하였다. 1831년 말 파리에 다시 머물면서 쇼팽, 마이어베어, 리스트와 사귀었으나 교향곡 "종교개혁"이 콘서트 협회에 의해 거부되기도 하고 콜레라가 만연하기도 해서 바로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갔다(1832. 4. 23). 그러나 그 체류기간 동안 리츠(1832. 1. 23), 괴테(1832. 3. 22), 첼터(1832.5.15)의 잇따른 죽음의 소식을 받고 깊이 슬퍼했다. 7월에 베를린으로 돌아왔으나 1833년 1월 15일 징 아카데미에서의 첼터의 후계자의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고, 이후 멘델스존은 베를린과는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 1833년 2월부터 3월에 걸쳐서 라이프찌히의 게반트라우스 관현악단과의 행운의 만남이 있은 후 하(下)라인 음악제의 지휘를 맡고, 세 번째의 런던 체재로 교향곡 "이탈리아"를 초연(1833. 5. 13)하였으며, 이어 뒤셀도르프의 음악감독으로서 3년간의 계약을 맺었다(오라토리오 성 파울로는 1836년 5월 22일 뒤셀도르프에서 초연). 그러나 1835년 가을에는 라이프찌히의 게반트라우스의 지휘자가 되어 쇼팽을 맞고, 클라라 비크(슈만의 아내)를 만나 슈만과는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체칠리아 협회의 지휘를 맡게 된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연주회 때 프랑스 위그노 가계의 젊은 세실 장르노 Cecile Jeanrenaud와 알게 되어 1837년 3월 28일에 결혼, 평생 깊이 사랑하면서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1837년 8월의 다섯 번째의 영국 체재 때에는 버밍검에서 성 파울로의 영국 초연을 했다.
활기에 찬 생활, 결실 많은 일거리
작곡활동, 지휘자나 독주자(피아노, 오르간)로서의 연주회 활동, 여행, 회합이나 서신에 의한 사람들과의 교제 등, 이 무렵의 멘델스존의 생활은 활기에 넘쳐 행복한 것이었다. 첫 아들 칼 볼프강 파울 Carl Wolfgang Paul은 1838년 2월 7일에, 마리 Marie는 1839년 10월 2일에 탄생했다. 1840년 9월, 여섯 번째의 영국 체재 후 멘델스존을 베를린에 묶어두고 싶었던 프로이센 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요청에 의하여 주저하면서도 경의를 가지고 1841년 프로이센 왕의 예배당 악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베를린의 음악 총감독이 되었다. 아내를 동반한 일곱 번째의 영국 체재 때에는 빅토리아 여왕을 두 차례에 걸쳐서 알현했다. 1843년 처음으로 라이프찌히에 손수 음악학교를 설립,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거기서 작곡(슈만도)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이후 라이프찌히와 베를린을 자주 왕래했다. 1843년 10월 18일 포츠담에서 한여름밤의 꿈 전곡의 초연 후 1844년에야 겨우 프로이센 왕으로부터 일거리의 경감과 거주의 자유를 인정받아, 1년간의 휴양을 취할 것을 결정한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올린 협주곡 op. 64를 완성했다. 그러나 건강상태가 나빠져 다비드 Ferdinand David(이 곡은 그에게 바쳐졌다)가 연주한 1845년 3월 13일 라이프찌히에서의 초연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라이프찌히에서는 덴마크의 작곡가 닐스 게제가 멘델스존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오르간을 위한 6개의 소나타, 피아노 3중주곡 c단조, 현악5중주곡 B장조, 무언가집 제6권, 1846년에는 오라토리오 엘리아스(초연 1846. 8. 26. 버밍검) 등 많은 곡들이 작곡되었다. 1847년 4월, 영국에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체재에서 엘리아스를 여러 차례 지휘하고, 베토벤의 제4협주곡을 훌륭하게 연주했다(그는 이것은 나의 장기이다 Mon vieux cheval! de bataille라고 프랑스어로 말했다). 런던에서 스웨덴의 젊은 가수 예니 린드의 첫 무대에 입회한 후(그녀와는 1844년에 베를린에서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누나 파니의 돌연한 죽음의 소식을 접한다.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낀 그는 충동적으로 현악4중주곡 f단조 op. 80, 이어 아름다운 밤의 노래 Nachtlied, 새로운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일부를 만들었다. 여행을 하고 데생이나 그림을 그렸으며, 때로는 건반을 접하는 일도 있었으나 건강이 쇠퇴하자 오랫동안 무기력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라이프찌히로 돌아와 1847년 10월 3일 자신의 음악원의 최초의 학생의 한 사람인 16세의 요아힘이 바이올린 협주곡을 멋지게 연주하는 것을 들은 후 그는 1847년 11월 4일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든 점에서 별난 음악가
뛰어난 재능과 놀라운 기억력을 갖추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재기에 차 있던 멘델스존은 폭넓은 교양을 가지고 있었고, 인생을 사랑하며 사람을 매료시키는 동시에 또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특성인 자유분방함을 좋아하는 경향과 부르주아 생활의 규율을 잘 절충시킬 수 있었다. 아내 세실이 1853년 죽기 전에 멘델스존과의 사적 서한을 파기해버렸지만 마그누스, 클링게만, 모셸레스 같은 친구와 교환한 방대한 서신 덕택으로 부르주아 생활의 규율이 멘델스존에게는 조금도 무거운 짐이 되어 있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당시의 베를린의 부패한 음악 분위기를 벗어나고 파리에 실망했다 하더라도, 멘델스존은 도처에서 작곡가, 지휘자 혹은 피아니스트로서 시대의 총아였다. 베토벤이나 특히 바흐, 모짜르트의 연주는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휘대에 올라서면 악단원을 고양시키고 동시대의 작품뿐만 아니라 과거의 잊혀지거나 간과되었던 작품에 눈을 뜨게 했다. 독일이 J. S. 바흐를 재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그 작품을 소생시킨 멘델스존 덕택이었다. 또한 그는 친구들, 그 중에서도 슈만의 새로운 작품 등도 연주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슈만은 멘델스존이 슈베르트의 사후에 실현한 그 제9교향곡의 초연(1839. 3. 22)에 힘이 되기도 했다. 과거에의 애착, 고전주의나 완성된 것에의 기호와 결부되어 새로운 것에 개방적이었던 멘델스존의 정신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시도해 온 그의 음악 속에도 나타나 있다. 20년간의 창작활동 속에서 어느 시기의 작품에서도 천재라는 표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어쩌다 섞여 있는 평범한 작품 때문에 멘델스존은 부당한 평가를 받아 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멘델스존을 2류의 음악가로 간주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의 생활이 언제나 물질적으로 풍요했던 것을 사람들이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집을 프랑스어로 X말 없는 연가집이라고 부름으로써 그의 음악 전체를 유약하다고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한여름밤의 꿈이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교향곡 이탈리아나 스코틀랜드 등 잘 알려진 작품도 그렇지만, 다른 많은 곡도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며 그 몇 가지는 이미 브람스를 연상케 한다. 현악8중주곡 op. 20, 현악4중주곡 op. 12, 13, 40, 80, 현악5중주곡 op. 87,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협주적 변주곡 op. 17 및 20곡 이상의 가곡과 같은 작품이 당연히 청중에게 사랑을 받게 될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다. 멘델스존의 독일적 교양은 이탈리아, 그리고 특히 그의 제2의 조국인 영국에서 귀중한 자극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극히 독창적인 영감, 교묘한 테크닉, 세련된 음악성과 오케스트레이션, 작품의 다양성 등으로 보아, 멘델스존은 낭만파의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출처 : 어리버리동키호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