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는 또한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과 남군이 모두 전쟁 찬송가(Battle Hymn)로불렀습니다. 요즈음은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하는 재활원이나 교도소에서도 치료와 교화 목적으로 환자와 재소자들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세계적인 애창곡이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태어난 배경을 살펴 보는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약 260 여년전 일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싣고 미국으로 가는 노예선의 선장이며 노예상인이던 영국인 존 뉴턴(John Newton)은 1748년 5월 10일 항해중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의 위험에 처하자 하느님께 매달리며 구원을 빕니다. 생사의 갈림갈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뉴턴은 크리스천으로 개종합니다.
이와같이 세계적인 애창곡이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태어난 배경을 살펴 보는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약 260 여년전 일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싣고 미국으로 가는 노예선의 선장이며 노예상인이던 영국인
존 뉴턴(John Newton)은 1748년 5월 10일 항해중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의
위험에 처하자 하느님께 매달리며 구원을 빕니다.
존 뉴턴(John Newton)
그 후 몇년간 그는 노예 사업을 계속 했으나 결국 노예 상인 생활을 청산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나중에 목사가 된 그는 자신을 구해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 하게 됩니다.
방탕하고 부도덕한 노예 상인이었던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해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한다는 내용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널리 애창되기 시작하였으며
Amazing Grace
지금으로부터 160여년 전인 1838~39년. 지금의 미쿡 동부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앨러배마 주 일대에 살고 있던 체로키 인디언이 백인이주민 국가 '미합중국'의 강제이주령에 의해 고향에서 5천리(2000km) 떨어진 머나먼 오클라호마 주 허허벌판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들이 미쿡 기병대에 쫓겨 피눈물을 흘리며 떠난 사변을 미쿡사에서 '눈물의 길' 또는 '눈물의 행로'(the Trail of Tears)라고 하지요.정확히 말하면 '눈물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화가 로버트 린드노(1871~1970)가 그린 '눈물의 길'(1942년 작) 이 그림을 보면 마치 이들이 따뜻한 담요와 말, 마차를 갖고 떠난 것 같지만 사실은 몸에 걸친 옷 정도밖에는 거의 갖고 갈 수 없었답니다. 그야말로 맨몸으로 쫓겨난 거지요. 그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 걸어서 이동해야 했고, 추운 한겨울에도 맨바닥에 누워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체로키 인디언 강제이주로 고향에서 5천리 너머 중부지방으로 쫓겨났다. 결국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얼추 4,000명 이 도중에 숨졌습니다. 이 피눈물과 죽음의 강제이주는 1839년 봄에 끝났습니다. 이때 이들이 부른 노래가 Amazing Grace였습니다. 죽은 이들을 땅에 묻으며 이 노래의 영감을 빌려 그들의 명복을 빌었고 살아남은 이들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체로키어로 번역해 이들에게 전해 준 인물은 이들과 함께 살면서 강제이주에 끝까지 반대해 법정투쟁까지 하며 이들을 도운 백인 선교사 새뮤얼 워시스터(1798~1859)였습니다. 오늘날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 노래를 거의 애국가처럼 부릅니다. 여기에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지요. 말하자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체로키 여성 트리오 왈렐라(Walela: 체로키어로 '벌새', '영감')가 이 노래를 부릅니다.
지금으로부터 160여년 전인 1838~39년.
지금의 미쿡 동부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앨러배마 주 일대에 살고 있던 체로키 인디언이
백인이주민 국가 '미합중국'의 강제이주령에 의해 고향에서 5천리(2000km)
떨어진 머나먼 오클라호마 주 허허벌판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들이 미쿡 기병대에 쫓겨 피눈물을 흘리며 떠난 사변을 미쿡사에서 '눈물의 길' 또는
'눈물의 행로'(the Trail of Tears)라고 하지요.
정확히 말하면 '눈물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화가 로버트 린드노(1871~1970)가 그린 '눈물의 길'(1942년 작) 이 그림을 보면 마치 이들이 따뜻한 담요와 말, 마차를 갖고 떠난 것 같지만 사실은 몸에 걸친 옷 정도밖에는 거의 갖고 갈 수 없었답니다. 그야말로 맨몸으로 쫓겨난 거지요. 그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 걸어서 이동해야 했고, 추운 한겨울에도 맨바닥에 누워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체로키 인디언 강제이주로 고향에서 5천리 너머 중부지방으로 쫓겨났다. 결국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얼추 4,000명 이 도중에 숨졌습니다. 이 피눈물과 죽음의 강제이주는 1839년 봄에 끝났습니다. 이때 이들이 부른 노래가 Amazing Grace였습니다. 죽은 이들을 땅에 묻으며 이 노래의 영감을 빌려 그들의 명복을 빌었고 살아남은 이들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체로키어로 번역해 이들에게 전해 준 인물은 이들과 함께 살면서 강제이주에 끝까지 반대해 법정투쟁까지 하며 이들을 도운 백인 선교사 새뮤얼 워시스터(1798~1859)였습니다. 오늘날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 노래를 거의 애국가처럼 부릅니다. 여기에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지요. 말하자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체로키 여성 트리오 왈렐라(Walela: 체로키어로 '벌새', '영감')가 이 노래를 부릅니다.
화가 로버트 린드노(1871~1970)가 그린 '눈물의 길'(1942년 작) 이 그림을 보면 마치 이들이 따뜻한 담요와 말, 마차를 갖고 떠난 것 같지만 사실은 몸에 걸친 옷 정도
이 그림을 보면 마치 이들이 따뜻한 담요와 말, 마차를 갖고 떠난 것 같지만 사실은 몸에 걸친 옷 정도
밖에는 거의 갖고 갈 수 없었답니다. 그야말로 맨몸으로 쫓겨난 거지요.
그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 걸어서 이동해야 했고, 추운 한겨울에도 맨바닥에 누워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체로키 인디언 강제이주로 고향에서 5천리 너머 중부지방으로 쫓겨났다. 결국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얼추 4,000명 이 도중에 숨졌습니다. 이 피눈물과 죽음의 강제이주는 1839년 봄에 끝났습니다. 이때 이들이 부른 노래가 Amazing Grace였습니다. 죽은 이들을 땅에 묻으며 이 노래의 영감을 빌려 그들의 명복을 빌었고 살아남은 이들의 힘을 북돋우기
위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체로키어로 번역해 이들에게 전해 준 인물은 이들과 함께 살면서 강제이주에 끝까지 반대해
법정투쟁까지 하며 이들을 도운 백인 선교사 새뮤얼 워시스터(1798~1859)였습니다. 오늘날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 노래를 거의 애국가처럼 부릅니다. 여기에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지요. 말하자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체로키 여성 트리오 왈렐라(Walela: 체로키어로 '벌새', '영감')가 이 노래를 부릅니다.
오늘날 체로키 인디언들은 이 노래를 거의 애국가처럼 부릅니다. 여기에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지요. 말하자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체로키 여성 트리오 왈렐라(Walela: 체로키어로 '벌새', '영감')가 이 노래를 부릅니다.
여기에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있지요. 말하자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체로키 여성 트리오 왈렐라(Walela: 체로키어로 '벌새', '영감')가 이 노래를 부릅니다.
말하자면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체로키 여성 트리오 왈렐라(Walela: 체로키어로 '벌새', '영감')가 이 노래를 부릅니다.
체로키 여성 트리오 왈렐라(Walela: 체로키어로 '벌새', '영감')가 이 노래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