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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 민주당 국회의원에게 묻는다! - 조갑제 본문

🙆‍♂️ 시사 & 인물 & 인터뷰

* 박지원 민주당 국회의원에게 묻는다! - 조갑제

Ador38 2012. 7. 30. 21:21

 

[공개서한] 박지원에게 묻는다.

趙甲濟

'빨갱이의 아들' '독재자의 딸'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해도 아들이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된다는 게

우리 헌법정신이고 민주국가의 윤리이다.

'독재자의 딸'이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되는 것도 물론이다.

아버지의 잘못을 딸이나 아들이 상속 받는 제도는 없다.

'빨갱이의 아들'[박지원]이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욕하는 이는 없다.

아버지가 빨갱이라고 해도 아들이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된다는 게

우리 헌법정신이고 민주국가의 윤리이다.

'빨갱이의 사위'[노무현]가 대통령이 되는 길을 막을 방법은 없다.

'독재자의 딸'[박근혜]이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되는 것도 물론이다.

아버지의 잘못을 딸이나 아들이 상속 받는 제도는 없다.

그런데 '빨갱이의 아들'이 여론조사에서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히기도 하는데,

朴正熙를 독재자로 몰면서 그의 딸을 '독재자의 딸'이라고 욕한다면,

같은 입으로 흉악한 북한의 세습 독재는 비호한다면,

또 언론이 그의 막말을 신나게 중계해 준다면 政治는 실종되고 언론은 타락한다.

2012-07-18

[공개서한] 박지원에게 묻는다

공인 박지원에게 묻노니, 답하라. 아래 의혹들이 사실인가, 아닌가?

'매국(賣國)'이란 외국 또는 적에게 국가를 넘기거나 이롭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예컨데 독도를 외국에 팔아먹는 자나 적에게 무기나 핵폭탄을 만들 자금을 건내는 자나

적국을 이롭게 하여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한 매국노다.

이에 대하여 대한민국 형법 제93조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형법 제 93조(여적)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1. 박지원의 아버지에 대한 엄청난 의혹

인터넷에 떠도는 의혹들을 보면,

박지원의 아버지는 매국/역적 현장범으로 대한민국 경찰에 의해서 사살된 자라고 한다.

박지원의 부친 박종식(1910년생)은 1940~45년까지 일본통치 시절 일본인들에게

고향인 진도군 군내면과 고군면에서 목화수매 책임자로 친일파 두목 행세를 하다

1945년 해방 후 박종식은 남로당(공산당) 진도지역 책임자가 되었고

숙부 박종국은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박종식과 박종국은 1948년 10월 23일 경찰에 수배되어 도피 중 진도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형사 등에 의해 총격전 끝에 사살되었으며 (1976년 2월 25일 진도군이 발행한 진도 군지(郡誌)에 기록되어 있으며 곽순배 형사의 친척이 되는 곽우불 진도번영회 회장 증언)

1950년 6.25 한국전쟁때 진도군에 북한 인민군이 진주했으며 이때 박지원의 삼촌, 고모 등이 북한 인민군 편에 나서 면민들을 가혹하게 북한의용군에 징용되도록 만들어 주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그러다가 9.28수복 후 패전 북한인민군이 도망가자 박지원의 삼촌, 고모도 인민군과 함께 도주하다가 주민들에게 붙잡혀 돌과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진도군 무공수훈자 회장 최기남씨 증언)

이런 모든 사실을 숨기기 위해 호적 등 관계서류를 파기, 변조하고 1992년 2월 20일자에

호적을 다시 만들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발부, 취득한 것으로 되어있다.

본 자료는 손충무라는 재미언론인에 의해서 보도되었고 그 이후 인터넷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는데, 박지원은 박근혜를 논하기 전에 이에 대한 사실관계부터 명확히 밝혀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그 이후 국가보훈처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5년 1월 그동안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제외시켜온 서훈심사 기준 가운데 ‘공산주의자’ 항목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한 활동에 주력했거나 적극 동조한 자’로 바꾸었고, 그동안 공산계열로 서훈이 보류됐던 좌익계열 항일운동가 등에게 '건국유공자' 서훈과 각종 혜택을 주었고, 현재도 이 기준에 따라 서훈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일부 애국단체들은

“건국포장을 받은 P의원의 부친 박종식(1948년 사망)의 경우 해방 후

남로당 지역 책임자로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해 공산당 활동을 했다”며

“반란이 진압되자 섬에 도피해 있던 중 경찰과 총격전 끝에 사살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 같은 사실은 해당 군지(郡誌)에도 기록이 있으며 증언도 확보했다”고 말하고 “대한민국 상훈법 20조(건국포장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기를 공고히 하는데 헌신진력하여 그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의 취지에 반하므로 서훈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현재까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출처 : http://blog.naver.com/coldtruth/20114049394>

지금 인터넷에서 급속하게 퍼져 나가는 이런 추악한 의혹에 대하여

박지원은 해명해야 한다 그는 공인이기 때문에....

그러나 연좌제가 폐지된 지금 박지원의 아버지를 논하여 박지원을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방식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부(虎父)에 견자(犬子)없고, 견부(犬父)에 호자(虎子)없다는 정도만 새기면서

미국으로 건너갔던 시절부터 박지원 본인의 행적을 보자.

2. <미국에서의 박지원>은 어땠을까.

아래 기사를 보면 그의 미국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인용시작> 1996년 4월 총선 당시 부천 소사구역에서 한 여인이

눈물어린 호소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인간 박지원의 가면을 벗기는 진정서'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문제의 여인은 최정민이다.

최정민은 70년대 초 은막을 풍미하던 영화배우였다.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주연을 맡았고,

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아시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최정민은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이때 박지원은 미국에서 가발장사로 꽤나 돈을 모은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최정민이 박지원을 만난 것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1978년 두 사람이 비밀동거를 시작했을 때 박지원은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박지원은 몇 년 후 들통날 때까지 최정민에게 이런 사실을 숨겼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지원의 부인은 "자살 하겠다"고 눈물을 뿌리고 다녔다.

이로 인해 교민사회에서 박지원 가정과 아내의 존재가 드러나자

최정민은 박지원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다른 사람과 맞선을 보게 되었다,

이에 박지원은 분노하여 최정민을 살해하려고 혈안이 되어 살인청부업자를 보냈다,

최정민의 자필 진정서(복사본 확보)에는 그 부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맞선 본 사실을 알게 된 박지원씨는 사람을 시켜 청부 살인을 하려고 계획하고

어느 날 9시경 내가 경영하는 스타꽃집에 괴한 최모씨를 보냈습니다.

살인 청부업자인 최모씨는 가게 문을 걸게 만든 후 총을 들이 대며 죽인다고 말하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차라리 나를 먼저 죽이고 딸을 데려 가라”고

최씨에게 애원하고 호소하며 매달렸습니다.

엄마의 호소에 최씨는 우리 모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엄마의 모습에 감동되어

저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청부업자는 또 다시 박지원 부인의 부탁을 받고

저를 또 다시 처치해야 되는 처지가 되어 (2천불) 저의 가게로 왔으나 그

때도 제 약한 처지를 깊히 알고 동정을 하게 되어서 오히려 우리 모녀를 보호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지만 저는 늘 불안 속에서, 공포에 질려서 결혼을 포기하고

박지원씨의 노예 마냥 끌려가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래에 인용 계속)

3. 강간범 박지원 ? (인용계속)

이들의 관계는 89년 박지원이 한국으로 귀국함에 따라 완전히 끝났다.

1992년 대선 당시 박지원은 최정민씨가 한국에 온 것을 알고 최여인을 불러내

서울 송파구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단지의 한적한 곳에 소나타 승용차를 대놓고

운전기사를 차 밖으로 나가게 하고 차 뒤 좌석에서 최여인을 강제로 성폭행 SEX를 했다고 한다,

(1996.4.10일자 부천신문에 최정민 증언으로 보도)

또한 최 여인이 반항하다 더 이상 견디다 못해 성폭행을 당한 뒤에 울먹이며

박지원에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부끄럽지도 않아요?”하고 거칠게 항의하자 박지원은 오히려 큰소리치며 “So What..." 하면서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1996.4.10일자 부천신문에 최정민 증언으로 보도)

당시 교민들의 증언과 2010,10월에 작고한 故손충무(전 경향신문기자.

뉴욕 교민신문, 인사이드월드 발행인) 씨의 기사와 기록에 따르면

박지원은 최정민을 마담으로 내세워 뉴욕 28번가 브로드웨이에서

여종업원을 두고 불법장사까지 시켰다고 한다.

이 사실을 보도한 손충무씨는 훗날 박지원이 권력실세로 등장한 김대중 정권 초기에

대통령 명예훼손죄로 엮여 벌금형이 아닌 2년의 실형을 살아야 했다.

실로 경악스러운 박지원의 여성편력에 추악한 과거가 아닐 수 없다.

(프런티어타임스 김동일 기자)

2012년 05월 25일(금) 오전 07:22 <위 2, 3항 인용 끝>

이런 추악한 의혹에 대해서도 박지원은 해명해야 한다 그는 공인이므로....

4. 5.18 광주의 공적, 박지원?<인용 시작>

광주 5.18이 터졌다.

1981년 한미수교 100주년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 前대통령 교민환영위원장을 맡은 박지원.

12.12와 5.18은 영웅적 결단이라고 헤헤거리며 대통령에게 갖은 교태를 부렸다.

이어 우리나라에는 전두환 각하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광주 5.18을 폭동으로, 시위 가담자들을 폭도로 몰아갔다.

여기서 5.18의 정치적, 역사적 해석은 중요하지 않다.

박지원이 5.18을 짓밟으며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박지원의 놀라운 아부는 5공시절 청와대를 두 차례 방문하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이후 읍소의 달인 박지원은 끝내 전두환 대통령에게서 훈장까지 받아냈다.

국민훈장 동백장이다.

당시 국무회의 안건 의결에는 뉴욕한인회장 박지원이

'북한의 대(對) 교민 침투 봉쇄에 노력하고 있다' 라고 적혀있다.

이런 反北인사가 김대중 정권에서 묻지마 퍼주기 햇볕정책의 실무 총책으로

김정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군분투 했으니 이 작자의 변절 기술은 그야말로 입신의 경지다.

뿐만 아니다.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광주진압작전은 정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인 박지원이다.

이런 박지원의 더러운 이중성과 표리부동을 광주시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프런티어타임스(www.frontiertimes.co.kr))

<출처 : http://www.frontiertimes.co.kr/news/news/2012/05/26/85057.html <인용 끝>

위 의혹은 사실인가, 아닌가.... 박지원 본인이 밝혀야 할 문제는 하나, 둘이 아니다.

5. 박지원의 매국/여적 종북행위

박지원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당시 4억5천만달러의 대북송금을 주도하고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천억원을 대출해주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와

금호와 SK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원심대로 징역 3년에 추징금 1억원을 선고받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한민국 법원이 대북송금의 불법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1심, 2심, 파기환송 등을 오가면서 엄청난 재판이 벌어졌지만

대북송금 부분만은 공히 유죄로 인정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동안 보수계에서 주장해오던 대북송금→핵무기 개발이

법적으로 인정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밝혀진 것만으로도 4억 5천만 달러인데, 발혀지지 않은 부분은 얼마일까....

또한 지금 종북주의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진짜 종북주의의 원흉은 핵무기 개발 자금까지 갖다 바친 박지원이 아니냐....

이 부분도 박지원은 해명해야 한다.

대한민국 형법에는 분명히 (역적)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6. DJ 비자금 의혹 <인용 시작>

검찰이 해외로 도피했던 대북송금 사건 핵심인물 김영완(58)씨를 최근 조사함에 따라

2000년 당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검 중수부(최재경 검사장)는 그러나 무기 중개상인 김씨가 현대그룹 비자금으로 조성된

150억원 상당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전달했다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현 민주당 의원)에 대한

재수사는 불가능 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수부 관계자는 2일 "박 의원은 이 사건과 관련해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같은 사안으로 다시 수사할 수 없다.

피고인에게 불리한 쪽으로는 재심을 청구할 수도 없다"면서

"유죄확정 판결을 받은 권노갑 전 의원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김씨 본인은 수사하고 기소도 할 수 있다"며

"2003년 수사 당시 혐의사실을 알고 출국했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중단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박 의원을 직접 수사할 수는 없지만 김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박 의원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현대그룹 비자금 의혹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또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김씨를 통해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측에 전달하려고 했던

미화 3000만달러의 행방을 추적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김씨를 조사하면 스위스계좌로 입금됐다는 미화가 어디로 갔는지

파악할 수 있을 걸로 본다"고 전했다.

김씨는 대북송금 사건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2003년 3월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8년9개월 만인 지난달 26일 귀국해 검찰에 자수서를 제출하고 조사를 받았다.

김씨는 조사를 받은 직후 다시 출국했으며 검찰은 필요할 경우 재소환할 방침이다.

한편 박지원 의원 측은 "수사 시작부터 표적수사였다.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까지 났기 때문에 일사부재리 원칙에 의해 수사가 될 수 없는 사안이다.

야당의 유력한 당권 후보 죽이기"라고 밝혔다.

(세계파이낸스 뉴스팀 fn@segyefn.com 입력 2011.12.03 (토) 08:03) 출처 : http://fn.segye.com/articles/article.asp?aid=20111203000170&cid=0501030000000 <인용 끝>

7. 독도를 팔아먹은 박지원 ?

김대중 정권의 최대 의혹은 신한일어업협정일 것이다.

이 협정으로 독도 인근 수역은 한일 공동어로수역이 되어버렸고,

독도 인근 수역 영토주권의 50%는 일본으로 넘어 가 버렸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매국행위이고 이 협정을 추진한 자는 매국노다.

만약 형법을 제대로 적용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다.

이 문제는 독도로 인하여 한일 양국이 첨예한 대립을 이룰 때마다 불거져 나왔다.

2008년 8월 1일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인 지난 99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에 대해 '그 결과 우리의 영토인 독도가 주권없는 섬이 됐고

그 때부터 독도에 대한 우리 주권이 완전히 침탈됐다.

완전 졸속이었다'고 맹비난한데 대해

당시 무소속 의원이었던 박지원이 갑자기 나타나 파르르 떠는 반응을 보였다.

박지원은 "한일어업협정과 독도 영유권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당 대표로서 신중히 발언해 주기를 촉구한다"고 박 대표의 발언을 반박했다.

박지원은 신한일어업협정이 논의, 체결될 당시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던 인물로 신한일어업협정과는 무관해 보이고,

특히 야권 다른 사람들은 침묵하는 분위기에서 왜 갑자기 무소속이었던

박지원이 갑자기 흥분하고 나섰을까?

박 의원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한·일어업협정 당시에도 우리는 국제해양법계의 가장 권위자인

박춘호 교수(당시 UN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의 자문을 받는 등 해양법 전문가와 수산업계로부터

많은 자문을 받아서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한 바 있다"며

"박춘호 전 UN국제해양법재판소 재판관 등 해양법학계와 수산업계로부터 다시 자문을 받아 보면

우리가 일본에 비해 훨씬 많은 어획고를 거두면서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과연 그럴까?

2006년 4월 27일 저녁.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임석한 가운데

독도 문제로 4시간의 토론이 있었다.

그 때 신한일어업협정 문제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이 박춘호 유엔 해양법 재판소 재판관이었다.

그는 한국이 낳은 해양법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럴까?

유엔 해양법재판소 재판관이 되려면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해양국가인 일본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데서 당연히 일부에서는 강력한 의혹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박춘호 재판관은 일본 서남대 교수를 겸임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양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협정 체결에 쟁쟁한 국내의 해양법, 국제법 전문가를

배제시키고 구태여 일본과 개인적인 이해 관계가 얽혀있는 박춘호 교수를

외교부 자문으로 선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DJ의 독도 문제에 박지원이 파르르 떨고 나올 수도 있다.

DJ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 신종 친일파로 분류하고 있는 박춘호 교수를 들고 나와 억지 합리화를 도모하면서

혹세무민하고 있는 박지원을 볼 때, 한 때 DJ의 복심 박지원.... DJ와 대북 송금의 박지원....

DJ비자금 의혹의 박지원을 볼 때, 독도와 신한일어업협정에 박지원이 빠질 수 있었을까 하는

강력한 의구심이 드는 것이 필자 뿐일까?

이 부분도 박지원의 해명을 듣고 싶다.

8. 이중국적자 박지원(인용시작)

그동안 박지원이 부친 박종식을 독립유공자로 만들어, 보훈연금을 받는 그 파렴치함으로부터 대북송금,

여성 편력, 사기행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보를 받는 과정에서 필자(筆者)는 박지원의 이중국적을 확인하였다.

박지원의 미국 영주권 번호는 A21-762-961이며,

그의 부인 이0자와 딸 박0연, 아들 박0준은 모두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은 대한민국에는 주민등록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박지원이 미국 영주권을 얻게 된 사연도 기구한 일이었다.

60년대 도미(渡美)하였으나, 부친 박종식의 좌익 경력에 따른 연좌제로 인해, 영주권을 받지 못하다가 20여년 후 전두환 정권이 연좌제를 폐지하자, 1981년 가까스로 미국영주권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가족들이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는,

대한민국의 법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임을 증명한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박모 군과 가족들은 대한민국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며,

세금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에 어떤 의무도 지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이중국적으로 미국과 한국에 양다리를 걸친 박지원을 제외한 가족 전체가 대한민국 국적,

즉 이중국적 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논란의 소지로 충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박지원은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면서 현직 국회의원인 것이며,

전직(前職) 대통령 비서실장과 문화부 장관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평범한 보통사람들보다 더 잘 살고,

보다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법과 원칙의 평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박지원은 평등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등을 공유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이중국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사람이 보훈연금을 받고 있다.

연금은 그의 자식인 미국인 박모군에게까지 3대에 걸쳐 지급 될 것이다.

자신과 가족의 국적을 마음대로 주물럭 거릴 수 있었던 박지원은

민주당의 대표이면서 神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자식들은 '神의 자식'이 되어 대한민국의 온갖 의무에서 빠져나갔다.

그런 자가 지금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와 비대위원장을 맡으면서,

타인의 윤리와 덕목을 헐뜯고 지적하며 세상을 호령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날 박지원은 최근 북한인권법을 반대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종북주의자며 빨.갱.이’라는 발언을 했다.

그 후 우리는 이 발언에서 박지원의 정체성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말과 글의 표현이란 생각 없이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평소 박지원은 자신의 언행이 종북주의자 빨.갱.이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필자(筆者)는 박지원의 이 모든 것(학력조작, 호적세탁.이중국적 등)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을 바로잡고자 한다.

이중국적은 대한민국 어느 공직자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항목이다.

그런 자가 어찌 공당(公黨)을 지휘하는 위치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것인가.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다.

특히 공인의 경우는 더욱 더 세밀한 검증을 받고 그것을 국민 앞에 내 놔야 한다.

박지원은 조속히 이 모든것을 스스로 밝혀야 할 것이다.

박지원은 자신의 이중국적 의혹에 대해서도 속 시원하게 밝혀야 한다.

그는 대한민국 야당의 원내대표로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인 아닌가.

이 외에도 많다. 그런 점에서 박지원은 걸어다니는 의혹의 백과사전이다.

(밝혀진 진실만으로도)

최소한 종북 헌금의 주인공으로 우리의 머리 위에 핵무기를 매달아 놓을

돈까지 갖다 바친 박지원....

이런 사람이 박근혜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런 박지원을 용인할 것인가.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


 

박지원의 권모술수 

박지원을 잡으려면 호박에 줄쳐 수박 만드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검찰에게 과연 그런 꾀가 있을까? 한명숙과 박지원은 차원이 다르다. 미꾸라지 단수가 한명숙이 2, 3단 쯤 된다면 박지원은 9 10, 그 이상이다.

 

김대중과 김정일, 김대중과 노벨평화상, 김대중의 고단수 사기행각 뒤엔 어김없이 박지원의 그림자가 있었다. 김대중 만들기에 목숨까지 담보하던 기라성 같은 참모들을 밀어내고 둥지를 틀고 앉은 뻐꾸기 근성을 모르면 박지원을 모른다.

 

“非理도 잘하면 출세한다”. 이것이 박지원의 인생철학이고 생활철학이다. 그래서 박지원은 출세했다. 비리로 출세하는 비결을 알면 박지원을 안다. 다시 말해 박지원의 출세 길을 역추적하면 박지원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김대중의 노벨평화상을 위해 김정일에게 현금 4 5천만 달러와 물자 5천만 달러를 퍼다 주고도 당당하게 국민 앞에 나와 “단 한 푼도 준 일이 없다”고 사기 친 박지원,

 

그러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아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데, 저축은행 돈 겨우 1억 쯤 받았다(?)고 해서 순순히 검찰의 말을 들을 박지원이 아니다. 박지원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정치는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허용돼야 한다’는 유교의 근본, 그에게는 안 통한다. 狡猾(교활)의 대명사 曹操(조조)에게도 眞心은 있었다. 그런데 박지원은 교활과 거짓말, 덮어씌우기와 이간질, 말장난과 권모술수로 똘똘 뭉쳐있다.

 

그의 사전엔 진심이란 없다.

보통사람 대하듯 했다간 백번 당한다.

 

이번 정두언 사건도 덮어씌우고 빠져나가기의 달인 박지원 작품 아닌가. 누가 그 술수를 당해낼 수 있는가.

 

진통으로 당한 새누리 당도, 진실을 파헤치고 사실을 밝혀야할 言論도 박지원의 꼼수에 대해 말 한마디 제대로 안하는(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곤 박지원을 잡을 수 없다.

 

빨갱이 가족사, 150억 뇌물 수수 죄, 상대방에 대한 거짓말 음해를 밥 먹듯이 하고도 끄떡없이 살아남아 나라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그 힘의 원천을 파내지 않고는 박지원을 다룰 수 없다.

 

다른 정치인에게 없는 또 하나의 힘은 마당발 정보망이다. 그 정보인맥 구축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 뿌리를 파헤쳐야 한다.

 

김대중 시대에 심어놓은 세작들의 분포도를 파악하고 그 관리 시스템을 깨뜨려야 한다. 시스템관리에는 자금이 필요하다. 그 자금이 어디서 나와 어떻게 흐르는지, 그 배후를 가려내야 한다. 어설픈 수단으로 뱀을 잡으려다간 뱀에 물리기 일쑤다.

 

박지원은 김대중처럼 목포를 끌고 들어가 위기를 탈출하려는 물귀신 작전을 획책하고 있다. 김대중은 자기출세를 위해 목포와 호남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철저하게 버린 배신의 화신이다.

 

목포와 호남이 다시 박지원의 술수에 말려들어 역사를 배신하는 행위는 절대 안 할 거라 믿는다. 위기 때마다 나라를 구하려 일어섰던 호남을 기억하면 말이다. 광주학생사건, 5.18민주화운동, 결코 不義와의 타협을 모르는 호남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박지원을 이기려면 그의 꼼수를 꿰뚫어보는 눈과 귀와 그에게서 부는 바람의 향방을 관측하는 풍향계가 있어야 한다. 그의 뻐꾸기 근성, 덮어씌우기 술수, 거짓말 족보, 출세를 위해서라면 순식간에 호적도 뜯어고치는 치밀한 두뇌, 아나로그 수법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박지원의 專橫(전횡)을 이대로 방치하다간 어떤 국가적 불행을 겪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김대중 위의 박지원이란 말이 안 나온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2의 김대중, 박지원을 잡으려면 우선 비리로 출세하는 비결을 알아야 하고, 그의 출세가도를 역추적해야 하고, 그의 정보 안테나가 어디 꽂혀있는지, 정보시스템 관리비용은 정상적인지, 디지탈 전략이 필요하다.

 

한마디로호박에 줄쳐 수박 만드는 지혜(기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2012. 7. 18.

 

ROTC Guguk Yonhap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

대한민국 ROTC 救國연합,js

 

 

박지원 (朴智源.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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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기본 정보
출생 1942년 6월 5일(1942-06-05) (70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거주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 단국대학교 상학과 학사
종교 천주교
배우자 이선자
자녀 장녀 박혜연, 차녀 박혜준
경력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
문화관광부 장관
제25대 대통령 비서실장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
민주당 원내대표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국회의원 정보
의원 선수 3선
의원 대수 14·18·19대
정당 민주통합당
지역구 전라남도 목포시
웹사이트 http://www.jwp615.com

박지원(朴智源, 1942년 6월 5일 ~ , 진도)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다.

김대중정부 때 문화관광부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의정활동으로는 14대 국회의원을 거쳐 2008년 전남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당화합을 위하여 민주당으로 복당을 결심하고, 민주당 복당 1년 만에 정책위의장이 됐다. 2010년 5월 7일 당 2인자인 원내대표에 당선되며 입지를 빠르게 굳혔다. [1] 2012년 1월 15일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편집] 학창 시절

박지원은 1942년 6월 5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독립운동가 박종식의 아들로 태어났다.[2][3] 진도중학교와 1960년 목포 문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3월 광주교육대학교를 입학, 1964년 단국대학교로 편입학, 1969년 단국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1999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3기를 수료하였고, 2009년에는 목포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편집] 재미 사업가 시절

[편집] 청년 사업가

단국대학교 졸업 뒤 1970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다 미국에 건너가 1972년 11월 주식회사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에 임명됐다.

이후 사업을 하였다. 장기간 미국 체류 중 사업가로서 성공하고 1980년에는 뉴욕 한인회 회장을 지냈다. 이때 망명중인 김대중을 알게 되어 정치적으로 그를 따르게 되었다. 망명인사인 김대중을 극진히 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편집] 귀국

1979년 5월 미국 교포 자격으로, 수출유공자로 지정되어 국무총리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84년 김대중이 설립한 인권문제연구소 등의 후견인이 되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김대중이 사면복권되고 정계에 복귀하자, 미국영주권을 정리하고 귀국하였다.

[편집] 정치 활동

[편집] 정계입문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14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당대변인을 거쳐 1996년 15대 총선 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의 노동운동가 출신 김문수에게 석패해 금배지를 잃었으나, 1997년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에 선출되었다.

[편집] 국민의 정부 시절

국민의 정부 출범 이 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1997년-1998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1998년-1999년) 문화관광부 장관(1999년-2000년) 등을 지냈다.

1999년 6월 4일 장면 총리 서거 33주년 기념일에 추기경 김수환에게 취임인사차 예방하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장면 전총리의 포천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것을 제의하면서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4] 그러나 여건이 좋지 않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99년 8월 문화관광부 한국문화산업진흥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편집] 2000년대 이후

2002년 대통령비서실 실장에 취임하였고, 2003년 사퇴하였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사건 의혹이 제기되면서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직전 불법대북송금사건을 맡은 송두환 특검팀에 의해 2003년 6월에 구속되었으나, 2004년 11월 대법원에서 당시 주요 혐의로 거론되었던 '현대비자금 15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함에 따라 2006년 5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대북 불법송금과 대기업 자금 1억 원 수수에 대한 유죄가 인정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2007년 2월 9일 특별사면조치로 형집행이 면제되었다.[5]

석방 이 후 2007년 12월 복권되었다.[6][7][8] 그러나 이때의 복권을 노무현이 정치적 복권을 시켜준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9]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12년 만에 원내에 복귀하게 된다. 2008년 8월 13일, 민주당으로 복당하였다. 이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비서실 실장[10] 등에 선임되었고,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10월 경북교육감 선거 관련, 뇌물수수 의혹을 사실확인하지 않고 보도한 모 방송을 고소한다고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11][12]

2009년 5월에는 섬지역 학생들 3박4일 서울체험 행사를 지원, 주관하기도 했다.[13] 10월 30일 목포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령했다.[14] 11월 일본 도쿄 시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추모식에 참석하였다.[15][16]

2010년 12월에는 한나라당의 2011년 예산안 강행처리 이후 개헌을 반대하였다.[17]

[편집] 학력

[편집] 경력

  • 2012년 5월 4일 ~ 현재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 2012년 5월 4일 ~ 6월 9일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
  • 2012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 2010년 민주당 원내대표
  • 2008년 민주당 정책위의장
  • 2008년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
  • 2008년 국회 법사위원회 위원
  •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전남 목포시)
  •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
  • 2007년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 비서실장
  • 2002년 ~ 2003년 제25대 대통령 비서실장
  • 2002년 대통령 비서실 정책특별보좌관
  • 2001년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 수석비서관
  • 1999년 문화관광부 장관
  • 1998년 ~ 1999년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대변인
  • 1997년 대통령직 인수위원
  • 1996년 ~ 1997년 국민회의 기획조정실장
  •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경기 부천소사구 지구당위원장
  •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
  • 1995년 민주당 탈당
  • 1995년 민주당 경기 부천소사구 지구당위원장
  • 1993년 ~ 1995년 민주당 당무위원
  • 1992년 ~ 1993년 민주당 대변인
  • 1992년 국회 문화체육공보 위원회 위원
  • 1992년 민주당 수석부대변인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비례대표)
  • 1991년 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
  • 1989년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
  • 1987년 평민당 진도군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 1980년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
  • 1980년 뉴욕한인회 회장
  • 1975년 데일리팻숀스 대표이사
  • 19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장
  • 1970년 럭키금성상사

[편집] 수상

  • 1983년 6월 국민훈장 동백장
  • 2002년 6월 청조근정훈장
  • 2005년 11월 진도군민의 상
  • 2009년 11월 국회전문위원 선정 국정감사 우수위원
  • 2009년 11월 국회 상임위(법사위,정보위) 의정활동 각각 1위 의원
  • 2009년 11월 (사)한국지역신문협회 광주전남협의회 선정 풀뿌리 의정대상
  • 2009년 12월 백봉신사상 베스트 10 선정
  • 2010년 11월 NGO 모니터단 선정 국정감사 우수위원
  • 2010년 12월 백봉신사상 베스트 10 선정
  • 2011년 11월 (사)바른사회 밝은시민연합 18대 종합 최우수 국회의원
  • 2011년 11월 (사)한국문화예술유권자총연합회의 18대 최우수 국회의원 모범상
  • 2011년 11월 NGO 모니터단 선정 국정감사 우수위원
  •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자체 선정 국정감사 최우수 의원

[편집] 가계

  • 아버지 : 박종식
  • 어머니 : 조악덕
  • 처 : 이선자
    • 딸 : 장녀 박혜연, 차녀 박혜준

[편집]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 14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14대 민주당 29.2% 6,004,578표 비례대표 21번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15대 총선 국회의원(부천시 소사구) 15대 새정치국민회의 37.25% 31,786표 2위 낙선
18대 총선 국회의원(목포시) 18대 무소속 53.58% 45,415표 1위 목포시 국회의원 당선
19대 총선 국회의원(목포시) 19대 민주통합당 71.2% 63,705표 1위 사상구 국회의원 당선

[편집] 논란

[편집] 노무현 대통령 비판 논란

2008년 9월 24일 박지원 의원은 이날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좀 해도 해도 너무 한 것 같다"며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에도 유독 호남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는 말을 많이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호남사람들이 노무현이 좋아서 투표했느냐, 이회창을 당선 안 시키려고 했다. 호남당을 벗어나기 위해서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호남민심이 더 나빠져야 된다'는 말을 박근혜 전 대표에게 하면서 연정을 제안하지 않았냐"고 꼬집었다. 또 "사실 민주당을 망친 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 아닌가"라고 반문한 뒤 "민주당 정책, 공약, 지지세력으로 당선했는데 분당하지 않았나.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이 받았던 지지표를 이번 선거에서 반토막 내서 한나라당에다 정권을 바친 꼴 아닌가"라고 성토했다. 그는 "한나라당 공천이면 무조건 당선되는 영남지역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말해야지 표 찍어주고 지지해준 호남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호남 국회의원들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말"이라고 힐난했다.[18]

“구치소에 있을 때 왼쪽 눈의 시력을 상실했다. 오른쪽 눈도 거의 보이지 않지만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게 되어 일목요연(一目窈然)하게 볼 수 있다”말했다. 그는 “대북송금 특검법은 국민들의 70~80%가 반대했다. 집권 여당 강금실도 반대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이어 받는다”고 하면서 “김대중 대통령과 차별화 하기 위해 대북송금 특검을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노무현 정부의 불행은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와병설에 대해서는 “만약 김정일 위원장이 집권이 어려워지면 북한군부가 중국군부와 결탁하게 될 것이다. 그리면 38선까지 그 영향력이 미칠 것이다.” 고 했다. 이어 그는 “실제로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과 유대관계를 견고히 하면 한반도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 內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가장 친미주의자고 실제로 그렇다.”고 했다.[19]

[편집] 천성관후보 폭로관련 검찰수사 논란

2009년 천성관검찰총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천 후보자의 낙마에 큰 역할을 했던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7월 17일 “최근 국정원과 검찰에서 나와 내 주변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고 폭로하는 등 실제로 폭로된 자료가 유출된 것과 관련해 검찰이 내사에 나서 논란이 일었다.

검찰의 이 같은 처사는 과거 한나라당 의원들의 폭로사례 등과 비교할 때 형평성을 잃거나 청문회 준비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검찰이 수사하는 것이 적절한지의 의문과 검찰 조직에 흠집을 낸 데 대한 보복성 수사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민주당 등 야권에서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정치 사찰’이 부활한 것이 아니냐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민주당 김유정 대변인은 7월 18일 논평을 통해 “불법의혹과 거짓말로 뭉쳐진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의 낙마 후 보이는 검찰의 태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적반하장”이라며 “천 후보자의 낙마 후 검찰이 박지원 의원 뒷조사를 하는 것은 반민주적인 보복수사”라고 비난했다. 이어 “검찰은 야당 의원의 정당한 의정활동에 대한 사찰을 중단하고 천성관 후보자의 불법 의혹에 대해 수사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방해하는 건 민주주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조사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20]

[편집] 단국대학교 편입학 부정 의혹 논란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은 2001년 1월 15일 “박지원 전 장관이 단국대편입학 할때 이전 학력을 ‘조선대학교 상학과’로 속여 허위성적증명서를 제출, 불법으로 편입학했다”며 “사실은 지난 1963년 3월 광주교육대를 입학해 1965년 2월 졸업했다”고 주장했다.[21]

그러나 단국대학교에 제출한 학적정리 청원서에는 “본인인 광주교육대학 졸업증명서를 제출하고 귀 대학의 편입허가를 받았으나 최근 학적부를 조회한 결과 오류를 발견해 광주교대의 졸업증명서를 다시 제출하니 학적을 정리해 주길 바란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박지원 전 장관은 “나는 분명히 광주교육대를 졸업하고 광주교육대 성적증명서 제출하고 입학허가를 받았다”며 “학적문제를 최근 제3자를 통해 조선대를 다닌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확인해 보니 잘못돼 있어 정정신청을 했다”고 해명했다.

박지원 전 장관은 그러면서 “내가 동창회 고문을 하기 위해 졸업 후 교문을 수억을 들여 해줬다”며 “(편입학 당시 학력이 조선대로 돼 있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고 하지만 정정신청을 해 대학으로부터 학적정정이 됐다는 확인서를 받았다”고 말했다.[22]

[편집] 시진핑 발언 왜곡 논란

2010년 10월 19일 박지원은 당 회의를 통해 "중국 시진핑 부주석이 한국 정부가 왜 일본과 함께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 노릇을 하고 있느냐고 지적했다" 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시진핑 부주석의 회담 내용을 공개해 논란을 일으켰다. 청와대는 박지원의 발언은 사실무근이며 국익을 훼손하는 이적행위라고 비난했다. [23] 하지만 민주당은 당시 배석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과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으로부터도 확인된 사항이라며 되받아쳤다.[24]그러나 3일후 중국정부 마자오쉬 외교부 대변인은 박지원의 시진핑 부주석의 훼방꾼 발언 주장은 확인해 본 결과 사실과 다르다고 공식 부인했다.[25] 이에 청와대와 여당은“박 원내대표가 거짓말을 한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외교를 악용하고 국익을 훼손하며 국민과 국가를 망신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공세를 폈다. 박지원은 "국익을 위해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고 한발 물러섰다.[26][27][28] 정세현 전 장관은 이 훼방꾼 발언은 통역사의 실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29]그러나 원희룡이 밝힌 면담록에 따르면 그런 취지의 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했고, 시진핑은 그것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미국의 역할을 강조했다.[30]며 실컷 고생한 통역을 끌고 들어가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손학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본질을 외면한 채 특정 표현이 있었으냐 없었느냐에 매달리는 이명박 정부가 밖에 성숙하게 비치겠느냐"라고 박지원의 발언을 방어하였다.[31]

[편집] 전두환 찬양 논란

1980년 8월 28일, 박지원은 미국지역 한인총연합회장을 맡으면서 전두환대통령 당선되자 "전대통령의 당선을 55만재미동포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국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해외교포로서 긍지를 갖도록 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32] 1981년 1월, 박지원은 당시 대한민국대통령 전두환미국을 방문할 때 미국 교포로써 박지원한인회장을 중심으로 각 교포단체들이 참가, 환영준비위를 구성한 교포들은 케네디공항과 숙소인 월돌프아스토리아 호텔 부근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환영 행사를 치뤘다.[33] 1985년에도 박지원은 뉴욕평통자문위원회 회장을 맡을 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환영했다.[34]

2010년 나라사랑실천운동, 자유민주수호연합, 건국이념보급회 등 보수적 시민단체들은 민주당사 앞에서 제5차 '박지원 정계 퇴출 및 북송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1981년 한국방송공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5.18은 영웅적인 결단이었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으며, 박지원의 환영위원장 경력을 함께 거론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고 민주당의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것에 대하여 '권력의 딸랑이'라고 비판했다.[35] 박지원 원내대표트위터를 통하여 자신이 12.12와 5.18을 영웅적인 결단이라고 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 사실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저에 대한 비판 비난 음해 사실도 있고 허위도 있지만 대응 않고 제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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