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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因緣이 고이는 방
[주간조선] 이우환 - “한국어엔 왜 띄어쓰기가 있나?” 평생 여백을 물어온 이 사람은.. 본문
- 2011년 11월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대화' 전시회에서의 이우환 화백/ 이덕훈 기자
이 화백은 1년 중 대부분을 프랑스(7개월)와 일본(5개월)에서 작업을 한다. 한국에 머무는 날은 며칠 되지 않는다. 현재 그는 파리에서 작업 중이다. 그는 10월 19일 금관문화훈장 수여식에도 참석할 수가 없어 부인 김성순씨가 대신 받았다.
기자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우환이라는 존재감을 실감한 적이 있다. 2011년 10월, 기자는 뉴욕 맨해튼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흔적을 추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여정에서 들른 곳이 센트럴파크 옆에 있는 구겐하임미술관이었다. 알려진 대로 2000년 2월, 백남준은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을 개최했다. 아시아인 최초였다.
구겐하임미술관을 보고 뭔가 기념품을 사려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 순간 깜짝 놀랐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우환의 도록과 그림 복사본을 전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영어로 Lee U Fan이 선명했다. 그의 그림은 복사본인데도 신비하게 주변의 다른 그림을 압도했다.
이우환 화백이 2011년 초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세 번째로 전시회를 했다는 소식은 언론보도로 듣고 있었다. 두 번째로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화가는 중국의 차이궈창(蔡國强)이었다.
지금 세계 미술시장에는 중국 화가들의 기세가 무섭다. 차이궈창을 필두로 중국 화가들은 미국과 유럽 미술계에서 컬렉터들의 관심을 받으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군림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우환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세계는 이우환을 언제나 백남준 다음의 자리에 놓는다. 그런 이우환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우환은 1936년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서당에 다니면서 시·서·화를 배웠다. 부산의 경남중학교에 다니던 중 6·25남침전쟁이 터졌다. 경남중을 졸업한 후 그는 당시 부산에 피란 내려와 있던 서울사대부고에 입학했다. 1956년 서울대 문리대를 들어가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2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을 정도로 그는 미술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니혼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백남준은 일본 도쿄대를 졸업한 195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이우환이 느닷없이 미대를 다니다 일본으로 가 철학을 공부한 이유에 대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학이나 사회사상사를 튼튼하게 알아놓아야 나중에 무엇이든 제대로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었으면 100% 문학을 했지 미술은 안 했을 것이다. 화가는 알고 있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알고 있지 않은 것을 건드리기에 화가다. 미술·음악·문학 등 모든 예술이 어떤 철학보다 위대한 이유이다.”
일본에 유학 온 지 10년쯤 지난 1960년대 말. 이우환은 일본 화단과 평단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예술계에는 회화와 조각에서 손대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두는’ 모노하(物派)가 유행했다. 이우환은 모노하 흐름을 따르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미술평론가로 주목을 받았다.
유리판에 적당한 크기의 돌을 알맞은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유리판에 금이 간다. 우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수없이 목격하는 것이다. 이우환은 이렇게 금이 간 유리판을 그대로 전시장에 이동시켰다. 1970년대 중반 이우환은 일본 화단에 ‘점’ ‘선’ ‘바람’ 시리즈를 선보였다. 일본에만 머물던 이우환이 유럽으로 진출한 것은 1971년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하면서부터다. 이때까지 한국에서 이우환이라는 재일 화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시절 등장하는 인물이 문학평론가 이어령(1934~)이다. 무명이던 이우환이 고국을 찾아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이어령을 만났다. 당시 이어령 교수는 신문에 한국인을 주제로 한 칼럼을 연재했는데, 이 연재물이 단행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묶여 나왔다. 최초의 본격 한국인론(論)인 이 책은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이우환은 이 책을 읽고 이어령 교수를 만나고 싶어했다. 이어령씨는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우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이우환씨가 나를 찾아와 왜 한국어에서는 띄어쓰기를 하느냐고 물었다. 당시 일본어와 중국어에는 띄어쓰기가 없는데 왜 한국어에는 띄어쓰기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공백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첫 만남에서 이우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 텅 빈 화폭에 점 하나 찍기도 하고, 흰색 바탕에 조그만 항아리 이미지 하나만 그려 넣기도
이후 이어령과 이우환은 지적 관계로 발전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우환은 이어령이 책을 출판하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편지나 그림엽서를 보내오곤 했다. 책을 출판한 뒤에는 으레 짧은 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이 화백과 잠깐 짧은 전화통화를 했을 때 그는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평론가 이어령과 조각가 신문섭 두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령에 따르면 이우환이 유럽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게 1980년대 초 파리 주드폼미술관 전시회였다. 유럽 미술계의 문을 두드린 지 10여년 만이다.
이우환은 매우 특별한 화가다. 미술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로서 그는 ‘여백의 예술’ ‘시간의 여울’ ‘만남을 찾아서’ 등 10여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 글도 잘 쓰는 화가는 흔하지 않다. 디자인하우스에서 발행한 ‘시간의 여울’에는 이어령이 서문을 썼다. 그중 일부를 옮겨 보자.
‘지금 우리의 손에 이우환의 책이 있다. 태고의 동굴에서 들려오는 물방울 같은 상상력이 있다. 부싯돌이 일으키는 지적 섬광이 있다. 나무들의 우라노트로피즘과 모순을 통합하는 흙의 수용성이 있다. 그리고 광석으로 향한 돌의 꿈, 순순한 물질에의 꿈, 이우환의 글은 현대의, 앞으로 올 세기의 우리들의 오행사상이다. 우리가 이우환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나무를 만나는 그 기쁨과도 같은 것이다.’
이우환의 작품을 본 사람이 꽤 있다. 서울의 국제갤러리, 현대화랑 등에서도 전시회를 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의 작품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무슨 이런 장난을 했느냐는 생각도 든다. 텅 빈 화폭에 점 하나를 찍기도 하고, 흰색 바탕에 역시 조그만 항아리 이미지를 하나 혹은 두 개를 그려 넣기도 한다. 2011년 구겐하임전시회 때는 녹슨 철판을 세워놓고 그 아래에 돌덩이를 하나 놓는 설치미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문외한이 보아도 그가 여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우환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여백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는 여백은 동양화에서 흔히 얘기하는 여백과는 다르다. 어떤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지지 않은 부분과 그린 부분이 서로 긴장관계를 갖게 되고 어떤 울림이 생길 때를 ‘여백’이라고 한다.”
이우환은 1960년대 일본에서 활동할 때부터 여백의 예술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왔다. 흔히 이우환의 미술세계를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지칭한다. 크게 보면 그의 작품세계는 미니멀리즘 범주에 들어간다. 이우환은 이런 견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내 작업에 대해 미니멀리즘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90%가량 되는데 내가 단순한 작업을 하니까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미니멀리즘이 ‘바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임에 반해 내 작업은 ‘그것 이외의 그 무엇’을 추구하기 위해 ‘그것’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우환의 작품 앞에 서면 처음엔 낯섦에 어색하다가도 어느새 그 고요 속에 빠져든다. 일본, 유럽, 미국에서는 바로 이런 심오한 동양미학에 경탄을 보내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후(戰後) 50년간의 화가·평론가 랭킹에서 이우환이 당당하게 10위 안에 든다. 2010년 일본 가가와현 나오시마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우환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작가는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지만 그의 작품은 홍콩 경매에서 20억원을 넘긴 지 오래다.
이우환의 작품세계와 성취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문학평론가 이어령씨는 백남준과 비교해 이우환을 설명했다.
“백남준이 과거에 없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면, 이우환은 전통 속에서 세계성을 기록한 사람이다. 이우환은 글로벌시대에 심오한 철학을 통해 로컬(local)이 어떻게 글로벌하게 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이우환이 애국을 의식하거나 한국을 내세웠다면 저렇게 못 되었을 것이다. 이우환은 일본 화가로 불리다 지금은 프랑스 화가로 불린다. 그는 국적을 뛰어넘어 세계화에 성공한 사람이다.”
이우환은 지난 50년간 화가로 해외에서 활동하며 한국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의 의식의 밑바닥에는 한국적 정서와 미학이 깔려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흔여섯 노화백에게 금관문화훈장으로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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