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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상륙작전 전과 후의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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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상륙작전 전과 후의 이야기

Ador38 2014. 2. 8. 16:02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 주요 작전 관계자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 겸 UN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불리하던 전세를 역전

 

 

 

미국 해군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

미 해군을 지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

 

 

 

대한민국 육군 제15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

인천상륙작전 첨가를 위해 스스로 사단장직 사임, 제15연대를 지휘 (백선엽 장군의 친동생)

 

 

 

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대한민국 해군 함정 15척을 이끌며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미국 육군 제10군단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중장

미국 해병대 제1사단과 미국 보병제7사단을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미국 해병대 제1사단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

미국 해병대 제1사단 병력을 이끌고 인천상륙작전 선봉부대로 참가

 

 

 

 미국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 조장 임병래 중위

작전에 앞서 인천에 잠입,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북한군의 군사기밀 탐지

 

 

 

미국 육군 제8군단 군단장 해리스 월턴 월커 중장

낙동강 전선 미군 총사령관, 인천상륙작전 시행 후 총반격을 감행하는 임무책임자

 

 

*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 수립

 

 

 

UN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연합군과 북한군이 전투를 치르던 당시

'특정 장소'에 미 해병대를 상륙, 서울을 함락하여 북한군의 군수물자 루트차단하고 북한군을 고립시킨 후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에 나선다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고심끝에 서울에서 32km 떨어진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결정하게 된다.

인천은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였으며 수도 서울을 탈환한다면 아래와 같은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1. 수도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

2. 적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다.

3. 적의 보급선이 차단 되였다면 낙동강에서 총반격을 감행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합동최고참모본부와 미국 해군본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반대했다.

 

1.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는 좁은 단일 수로였기에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다.

2. 북한군이 상륙에 대비하여 지뢰를 매설해놓았을 경우 많은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3. 병력, 탄약, 보급품 등의 운송이 어려워 작전이 실패한다면 전쟁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그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충청남도 아산만 해안의 포승면 일대로 상륙지점의 변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 할 수 있다.

그들(북한군)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되어

훈련된 예비 병력마저 없어, (작전이 성공한다면)전세를 회복할 능력이 거의 없다.

 

이 작전의 타당성에 대해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이것이야말로 적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며 결정타를 입힐 수 있는 기회이다.

이렇게 말을 하며

 

전략적(서울 함락 후 점령, 낙동강에서 총반격)

리적(수도 서울 탈환 시 국군의 사기 상승)

정치적(빠른 시일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이 세가지 이유를 들어 합동최고참모본부와 해군본부를 설득하였고 결국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게 된다.

 

 

*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이 미국 합동최고참모본부, 미국 해군본부에서 최종 승인을 받자

맥아더 장군은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민국 육군, 해병대의 작전 참가를 요청한다.

 

 

    

 

이에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백선엽 장군의 동생인 백인엽 대령을 추천하게 된다.

 

 

 

 

 백인엽 대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제17연대장에서 수도 사단장으로 승진했었던 분이다. 

그는 친형인 백선엽 장군처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고 북한군 12사단, 766부대에 궤멸적 타격을 입히는 전공을 세운다.

 

 

    

 

그런데 신성모 국방장관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단장인 백인엽 대령을 연대장으로 지위를 낮추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에 신성모 국방장관이 백인엽 대령에게 묻기를

 

 

"자네, 사단장 한 사람인데 연대장...을 할 수 있겠나?"

(연대장은 사단장의 아래 직책)

 

 

그러자 백인엽 대령이 답하길

 

"전쟁을 하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떻습니까. 중대장도 괜찮습니다. 백의종군 하겠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광경인가

백인엽 대령은 스스로 사단장에서 연대장을 자청하였고, 자신이 과거에 이끌었었던 제17연대를 이끌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한편 맥아더 장군에게는 작전은 승인되었지만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것은 바로 웬만한 부대가 아니면 불가능 하다는 점이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미국 육군, 해군, 해병대로 구성된 미국 제10군단을 편성하게 된다. 또한, 인천의 조수간만의 차가 커 상륙작전을 시행하기에는 위험하다는 점이 있었다. 이에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해 상륙을 두 번하는 계획을 세운다.

 

 

 

미국 제10군단에는 군단장으로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이 임명되었고



       

 

 

미국 해병대 제1사단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

대한민국 육군 제15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 연대장 신현준 대령

 

세 사람이 이끄는 부대를 비롯해 여러 부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며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는 총 병력의 수는 75,000명이 되였다.

 

 

 

이들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인천항의 확보와 해안교두보 점령

2. 가능한 한 신속히 진출하여 김포비행장 확보(서울 폭격이 가능)

3. 한강도하 및 서울 탈환(궁극적 목표)

4. 미국 제8군단과 연결작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서울 근교의 진지 점령(낙동강 총반격)

 

 

 

이 때 당시 북한 내각 총리 김성주(김일성)은 이미 미군이 상륙작전을 시행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 수뇌부는 그 상륙지점이 3.8선 이북인지 3.8선 이남인지조차 파악을 못 하였고

북한군 전력 80% 가량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 하였으나 상륙이 예상되는 지점 모두에 병력을 배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50년 9월 4일부터 1950년 9월 14일까지

미국의 F4U 커세어(Corsair) 항공모함 탑재기가 출격하여

인천, 군산, 삼척 등 상륙이 가능한 지점에 집중적으로 폭격을 감행한다.

 

(다른 지점에도 폭격한 이유는? 상륙지점이 인천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기만술))

 

 

 

작전에 앞서 미국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 임병래 중위의 1개 공작조가 인천 잠입에 성공한다.

이들 공작조는 방심하고 있는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인천의 장비배치도, 병력, 고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인천 월미도에서 북한 군관 2명을 생포하는 공을 세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D-DAY 1일 전인 1950년 9월 14일

 

북한군에 의해 공작조가 발각되자 자신은 홀로 남아 북한군과 교전하였고 공작조가 퇴각할 시간을 벌게 된다.

임병래 중위가 벌어준 소중한 시간 덕분에 공작조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고 임병래 중위는 생포되었을 경우

고문당해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자결하게 된다.

 

 

 

1950년 9월 12일 D-DAY 3일 전

 

영국 특수부대(SAS)는 전라북도 군산에 잠입하여 미군의 군용장비를 일부러 버려두고 도망친다.

(미군이 군산에 잠입했다고 북한군이 믿도록 하는 전략)

 

 

    

1950년 9월 13일 D-DAY 2일 전

 

미국 해군 미주리호(USS-Missorui)는 동해안으로 출동하여 강원도 삼척에 함포 사격을 감행한다.

같은 날,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제8군 사령관 해리스 월턴 월커 중장은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한다.

 

 

"UN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에 총반격을 감행할 것입니다 ."

 

 

이에 기자들은 일제히 'UN군과 한국군, 10월 중순에 반격할 듯'이라는 기사를 보도한다.

이 첩보를 접한 북한 수뇌부는 반격이 이루어지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후방에 남아있는 예비 부대 또한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게 된다.

 

 

    

1950년 9월 14일 D-DAY 1일 전

 

북한군은 평양에 아래와 같은 보고를 한다.

 

 

적 함정들이 인천에 접근 중, 다수의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 중, 유엔군 상륙기도가 극히 농후함.

휘하 전 부대에 전투준비를 명령하였음. 적이 상륙을 기도하면 저지ㆍ격멸할 것.

 

이에 김성주(김일성)는 매우 놀랐다.

급히 소련의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소련이라고 한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D-DAY

 

제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한다.

(261척 : 미국225척, 영국12척, 캐나다3척, 호주2척, 뉴질랜드2척, 네덜란드1척, 프랑스1척, 한국15척 )

 

 

 

 

1950년 9월 15일 오전 5시 00분

미국 해군은 인천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을 감행한다.

 

 

 

1950년 9월 15일 오전 5시 45분

 

미국 제15항모부대의 F4U 커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 지역에 폭격을 감행한다.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 33분

 

미국 해군의 녹색 해안 함포 사격 후 미국 상륙주정 7대가 녹색 해안(Greean Beach) 상륙에 성공한다.

상륙에 성공한 이들은 사상자 없이 인천 월미도 105고지를 탈환하는데에 성공한다.

 

 

(인천상륙작전과 관계가 없는 사진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오전 10시 00분 미군은 소월미도에 공격을 감행한다.

그로부터 1시간 정도 지난 1950년 9월 15일 오전 11시 15분 미군은 소월미도 점령에 성공한다.

 

 

미군 사상자 없음

북한군 사망자 108명

북한군 부상자 137명

 

 

 

1950년 9월 15일 오후 2시 30분

 

미국 해군은 또 다른 상륙 지점인 적색 해안(Red Beach)과 청색 해안(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한다.

 

미국 해군이 함포 사격을 가할 때

 

대한민국 육군 제15연대,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는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타고 상륙 명령을 기다리게 된다.

 

 

    

1950년 9월 15일 오후 5시 33분

 

미국 해군의 함포 사격 후 미국 해병대 제1연대가 청색 해안(Blue Beach) 상륙에 성공한다.

 

 

미군 전사자 1명

미군 부상자19명

북한군 사망자 50명

북한군 포로 15명

 

 

   

1950년 9월 15일 오후 5시 33분

 

미군 해군의 함포 사격 후 미국 해병대 제5연대가 적색 해안(Red Beach) 상륙에 성공한다.

 

 

미군 전사자 8명

미군 부상자 28명

북한군 사망자 ?명

북한군 포로/부상자 ?명

 

 

 

950년 9월 15일 오후 8시 00분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가 적색 해안(Red Beach)에 상륙하여 인천 시가지 소탕, 해안 경비를 담당하게 된다.

대한민국 해병대 제1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게 된다.

 

 

 

인천 상륙작전  이야기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수립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다.

 

 

 

1950년 9월 18일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 미국 제7사단 병력이 상륙하여 서울 수복,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시행하였고

전쟁 발발 90일이 지난 1950년 9월 28일 국군은 수도 서울 탈환에 성공한다.

 

 

 

국군과 미국 제8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하여 3.8선 이남의 영토를 전부 수복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UN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6.25전쟁 도중 중공군이 개입하자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만주에 핵폭격을 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UN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당한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직 수락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 후 경제계, 언론계에서 활동하다가 1964년 4월 5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인천직할시(現 인천광역시)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미국 해군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은

1950년 10월 10일 원산상륙작전에서 해군부대를 지휘하여 성공하였고

 

1955년 동부해역 사령관과 대서양 예비함대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다음해 대장으로 예편하여 1983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육군 제15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준장으로 진급한다.

 

그는 1952년 10월 14일~1952년 11월 24일, 중공군과의 저격능선전투에서 승리하는 공을 세운다.

 

1960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백인엽 장군은 형인 백선엽 장군과 함께 현재도 대한민국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무적해병대의 신화를 창조한 주역으로 국토방위에 헌신하였고

 

1961년 해병대 중장으로 예편되여 모로코 대사와 바티칸대사를 역임, 제5대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2007년 10월 15일, 91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제독은

1953년 6월 28일, 해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제5대 국방부장관을 지내고

1957년 초대 독일(서독)대사를 역임하였다.

 

1980년 2월 15일, 사망하였다.

 

 

 

미국 육군 제10군단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은

1950년 11월 26일 ~ 1950년 12월 13일, 중공군과의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였고

1950년 12월 14일 ~ 1950년 12월 24일, 흥남철수작전에서 대한민국 10군단 민사부 현봉학 고문의 애절한 요청에 감동하여

월남을 바라는 민간인들도 함정에 태워 철수하게끔 해준다.

 

1953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고 1979년에 사망했다.

 

 

 

미국 해병대 제1사단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1953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55년 9월 1일,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977년에 사망하였다.

 

 

 

미국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 조장 임병래 중위는

1950년 9월 14일, 특공대를 도피시키고 생포될 경우 고문에 의해 작전 정보를 유출할 것을 염려하여 자결했다.

 

후일,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1계급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고

미국정부도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참고자료

 

 인천상륙작전기념관 - 인천상륙작전이란?

위키백과 - '인천상륙작전

중앙일보 - [6.25 전쟁 60년] 밀리던 연합군의 대반격 인천상륙작전

미국 다큐멘터리 - 컬러로 된 한국전쟁

KBS다큐멘터리 - 한국전쟁 - 전쟁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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