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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16. 포드와 결별한 정주영, 독자 모델 ‘올인’ 본문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16. 포드와 결별한 정주영, 독자 모델 ‘올인’
Ador38 2014. 12. 11. 10:59[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16. 포드와 결별한 정주영, 독자 모델 ‘올인’
포니 대히트로 세계시장 흔들어…기아차 인수하며 세계 10위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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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기아차 인수 성공. 세계 자동차 10위로 등극.’
1998년 10월 19일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가 공식 발표되자 전 세계 언론은 급박하게 이 소식을 타전했다. 당시 현대차의 연간 생산능력은 180만 대(1997년 기준) 수준으로 글로벌 1위인 제너럴모터스(GM)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83만 대의 생산능력을 보유한 기아차를 품자 세계 10위인 혼다(240만 대)를 제치고 10위로 올라섰다.
1990년대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서 업체들 간의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몸집 불리기 경쟁이 한창이었다. “21세기에는 연간 생산량 500만 대 이상의 외형을 갖춘 5개 회사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위르겐 쉬렘프 다임러그룹 회장의 예언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쉬렘프 회장은 같은 해 다임러그룹과 미국 크라이슬러그룹의 합병을 주도하며 예언을 현실화하고 있었다. 현대차도 2000년대 200만 대 생산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단기간에 외형을 키우기 위해선 기아차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6·25전쟁의 폐허 속, 자동차가 꽃피다
기아차를 인수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97년 7월 외환위기의 파도를 넘지 못한 기아차가 최종 부도를 내고 법정 관리에 들어가자 포드와 삼성차가 주판알을 튀기며 현대차와 인수 경쟁을 벌였다. 특히 삼성차는 기아차 인수에 실패한다면 그 역시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될 수 있어 인수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현대차를 향해 미소를 지었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지난해 현대·기아차는 연간 756만 대를 합작하며 판매량 세계 5위의 글로벌 메이커로 도약했다. 창업주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그의 동생이자 포니 신화의 주역인 ‘포니 정’ 정세영 회장을 거쳐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까지 이어지는 64년의 역사는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서 주목하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사이기도 하다.
현대차의 설립연도는 1967년이다. 하지만 그 뿌리를 찾아가면 이보다 27년 전인 1940년 아도서비스가 등장한다.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 명예회장이 당시 3500원에 인수한 자동차 정비 공장이다. 사업 성과가 좋았지만 2년 뒤 일본의 군소기업 강제 합병으로 일진공작소에 흡수 합병됐다. 1945년 광복 후 자동차 수요가 증가하자 정 회장은 다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서울시 중구 초동의 명보극장 부근에 660㎡(200평) 규모의 자동차 정비 공장을 짓고 ‘현대자동차공업사’란 간판을 내걸었다. 미국 병기창의 하청을 맡아 엔진을 교체해 주고 낡은 일본차를 수리하던 정 회장은 입버릇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완성차를 만들자”고 말했다고 한다.
꿈은 이내 현실로 다가왔다. 19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는 현대토건과 합병해 현대건설을 설립하면서 자본을 축적했고 1967년 12월 자본금 1억 원으로 현대차를 세웠다. 첫 대표이사는 정주영 회장의 동생 정세영 씨를 임명했다.
당시 국내엔 현대차보다 2년 먼저 개업한 아시아자동차(1966년 12월 광주공장 인가)가 있었다. 1965년 새나라자동차(1962년 설립)를 인수한 신진공업사도 이미 도요타 코로나를 생산하고 있었다. 신진공업사는 한국GM의 전신이다. 1967년 정부는 ‘자동차 제조업체 삼원화 방침’을 발표해 셋째 업체로 현대차(당시 사명 ‘현대모타주식회사’)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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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는 미국 포드와 합작회사로 출발했다. 현대차는 기술이 전무했기 때문에 사실상 포드의 차량을 조립 생산(SKD)하는 형태였다. 미국의 포드 본사는 현대차와 포드 영국 법인을 파트너로 지정했다. 코티나(Cortina, 배기량 1598cc)와 20M(1985cc 중형차), D-750 트럭 및 버스가 최초의 조립 차종으로 선정됐다. 코티나는 1966년 영국에서 개발됐고 1967년 초부터 영국 내 판매 2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 있는 차종이었다.
현대차는 1968년 5월 울산에 66만㎡(20만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연산 35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착공했다. 1962년 제정된 한국자동차공업보호법은 완성차의 부품 중 21% 이상을 국산화로 충당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현대차는 포드와 의견 조율을 통해 배터리·전선·냉각장치 구성품·스프링·유리·시트 등 50여 개 생산 업체를 국내에서 지정했다.
포드는 처음 시작할 당시 3년은 걸려야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정주영 회장과 정세영 사장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시기를 앞당겼다. 1968년 11월, 1년도 되지 않아 첫 모델인 코티나 생산이 시작됐다. 코티나는 1968년 첫해 533대가 판매됐고 이듬해인 1969년에는 수량이 10배(5567대)로 늘어났다.
원칙주의자 포니 정, “설렁탕 한 그릇도 금지”
하지만 판매 후 코티나의 성능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고장이 잦다는 것이다. 아직 익숙지 않은 조립 기술력도 문제였지만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차들이 비포장도로에서 영업용으로 혹사당하면 부품 마모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 회장은 이와 함께 ‘포드의 인색한 기술이전’을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정 회장이 정 사장에게 “순수 우리 기술로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D-750 트럭에 대한 불만도 처음엔 상당했다. 기존 화물차들은 6·25전쟁 당시 사용됐던 군사용 미군 트럭을 개조한 것이 많아 적재정량의 몇 배나 많은 화물을 실어도 문제가 없었다. 화물 차주들은 그간 적재정량의 두 배가 넘는 화물을 싣고 다녔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아무리 수리해도 군용과 상용이 다르다는 점을 인지시키지 못하면 계속 고장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부품도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다. 이런 경험은 정 회장이 1973년 애프터서비스(AS) 사업부를 분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업체에서 설렁탕 한 그릇도 대접받지 마라. 업체에 약점 잡히는 행동도 하지 마라.”
당시 현대차의 수장은 ‘포니 정’으로 더 유명한 정주영 회장의 넷째 동생 정세영이었다. 설렁탕으로 이어진 관계조차 부품의 결함으로 나타날까 우려할 정도로 원칙주의자였다. 미국 마이애미대에서 석사를 마치는 등 당시로는 드물게 해외 경험이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코티나 등 자동차 생산이 자리를 잡아가자 정세영 사장은 포드의 글로벌 판매망을 통해 자사의 차량을 수출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포드의 생각은 달랐다. 포드가 이미 진출해 있는 시장엔 완성차 수출이 불가능하다는 방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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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현대차를 국내 3대 자동차 생산 업체로 키운 정 회장은 정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를 독자적으로 생산해 수출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후진형 산업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현대차는 1973년 정부의 합작 허가 취소와 함께 포드와 결별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정 회장이 정 사장에게 지시했다. “우리 독자 기술로 신차를 만들게. 반드시 성공해야 하네.”
정 회장의 신차 개발 추진은 내부적으로도 반대가 많았다. 코티나와 같은 SKD 방식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다. 당시 국내시장 전체 승용차 수요가 1만 대 미만이었는데 5만6000대 양산 계획은 무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요 측정을 해보니 1976년 4만6000대에서 1980년 19만8000대까지 국내 수요가 증가하고 원가는 정부 시책인 2000달러 이내인 1932달러로 한국형 자동차 생산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와 힘을 보탰다. 자금은 차관을 만들고 정부가 보증을 서는 방식으로 어렵게 마련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엔진이었다. 엔진 제조 기술은 단기간에 확보하는 게 불가능했다.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만큼은 선진 업체의 도움을 받아야 생산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 이에 정 사장은 1973년 5월 일본으로 날아갔다. 미쓰비시자동차를 찾아간 그는 가솔린엔진(1238cc 수냉식 새턴엔진) 등 제조 기술 제휴를 맺고 미쓰비시 랜서와 현대차 코티나를 참고해 첫 차를 기획했다.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조르제토 주지아로 디자이너의 이탈디자인이 맡았고 디젤엔진 기술은 영국의 퍼킨슨으로부터 받았다.
어렵게 준비된 신차의 이름은 국민 공모 끝에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PONY)’로 결정했다. 여기서 문제는 또 있었다. 포드가 이미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포니라는 이름의 상표권을 등록해 놓았던 것. 현대차는 포드로부터 상표를 사들였다. 미국 상표권은 끝내 양보하지 않아 제외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포니는 1974년 10월 당시 규모가 크고 권위가 높았던 토리노 국제 모터 쇼에 출품됐다. 예상치 못한 국가의 자동차 회사가 내놓은 예상 밖의 멋진 차로 자동차 업계는 깜짝 놀랐고 세계 각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포니는 그로부터 1년 3개월 뒤인 1976년 1월부터 울산 공장에서 양산되기 시작했다. 한국이 세계에서 열여섯째,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둘째로 고유 모델 자동차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는 순간이었다.
말단 부품 과장으로 전국 누빈 정몽구 회장
포니는 1976년 한 해에 1만726대가 팔려 시장점유율 43.6%를 차지했다. 정부의 국산품 애용 캠페인도 도움을 줬다. 첫 수출은 1976년 7월 남미 에콰도르에 5대, 대형버스 1대를 수출한 것이다. 그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15대를 시험 수출했지만 현지의 현대건설이 구매한 것으로 본격 해외 공략이라고 보긴 어렵다.
포니는 대성공이었다. 국내 시장점유율은 60%를 넘겼고 1984년 단일 차종으로 50만 대 생산을 돌파하는 큰 인기를 끌었다. 포니의 성공은 엑셀(1985년)·그랜저(1987년)·쏘나타(1988년) 등 고유 모델 확대의 신호탄이 됐다.
현대차가 서서히 제국의 면모를 갖춰갈 때 다른 한쪽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청년이 한 명 있었다. 1970년 어머니이자 정 회장의 부인인 변중석 여사의 도움으로 현대차써비스 서울사무소에 취업한 정몽구였다. 부품을 실은 트럭을 몰고 전국 팔도를 누비고 다녀야 하는 말단 부품과장직이 그의 첫 경영 수업이었다. ‘회장의 아들’이라는 프리미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21년 뒤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에서 ‘갤로퍼’를 성공시키며 한국 자동차 업계를 놀라게 한 그는 1998년 기아차 인수 직후 회장 자리를 맡으며 현대·기아차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기회이자 위기였다. 정 회장은 칼날 위에 서 있었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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