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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29. 독자 기술 고집한 후발 주자…혼다의 기적 본문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29. 독자 기술 고집한 후발 주자…혼다의 기적
Ador38 2014. 12. 11. 11:23[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29. 독자 기술 고집한 후발 주자…혼다의 기적
전설의 모터사이클 C100으로 성공, 도요타와 경쟁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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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2월 독일 함부르크. 중년의 일본 남성 두 명이 거리를 뒤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도로를 오가는 스쿠터와 모터사이클을 유심히 살펴보며 메모했다. 벌써 두 달째 유럽을 돌아다니며 같은 일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차체는 작고 가벼워야 해. 여러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성을 갖추고 유지비도 적게 들어야 경쟁력이 있겠군. 초보자들도 편하게 탈 수 있는 그런 모터사이클이 시장에서 통할 거야.”
이 말을 들은 다른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인 후 웃으며 말했다. “국숫집 배달원이 한 손에 배달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편하게 운전할 수 있는 탈것을 만들자.”
그로부터 1년 8개월이 지난 1958년 8월, 일본 모터사이클 제조사 혼다는 ‘슈퍼커브 C100’이라는 이름의 신모델을 내놓았다. 유럽에서 두 달간 머무르며 시장을 조사한 일본인은 바로 혼다의 창업주인 혼다 소이치로와 영업 총괄 전무 후지사와 다케오였다. 이들이 창조한 슈퍼커브 C100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실용적인 모터사이클로 꼽힌다. ‘서민의 동반자’라는 수식어까지 붙은 모델이다.
모델 T를 보고 자동차에 빠진 혼다 소이치로
슈퍼커브 C100과 함께 성공적으로 시장에 입성한 혼다는 모터사이클 레이싱에서도 우승컵을 휩쓸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자동차 부문에도 진출해 도요타에 이어 일본에서 둘째로 큰 회사로 거듭났다. 극한의 레이싱인 포뮬러원(F1)에서도 우승컵을 거머쥔 이 회사에 ‘기술의 혼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자동차를 넘어 로봇과 항공기에까지 사업 영역을 넓힌 혼다의 중심에는 항상 ‘기술’이 자리 잡고 있다. 창업주이자 회사의 핵심 엔지니어인 혼다 소이치로는 인수·합병(M&A) 대신 기술 개발에만 전념해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소유와 경영을 철저하게 구분했고 ‘기업은 주주들의 것’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
1906년 일본 시즈오카현 근처의 작은 마을 하마마쓰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혼다 소이치로는 여섯 살 때 마을 어귀에서 포드의 ‘모델 T’를 본 뒤 자동차에 빠져든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자동차 수리업을 겸업하던 그는 자동차 정비 종업원을 모집한다는 구인 광고 전단지를 보고 홀로 도쿄의 ‘아트상회’로 향한다.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정비 기술을 배우다가 정식 정비공이 됐다. 6년 후인 1928년(22세)에는 고향에 ‘아트상회 하마마쓰 지점’을 연다.
이 정비소는 3년 후 종업원 50명의 하마마쓰 최대 규모 정비 공장으로 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공장을 매각한 그는 1946년 10월 혼다자동차의 모태인 ‘혼다기술연구소’를 설립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혼다로 이어졌다. 도요타가 품질과 생산방식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면 혼다는 ‘기술의 혼다’로 불릴 만큼 높은 기술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슈퍼커브 C100의 ‘커브(cub)’는 맹수의 새끼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속과 제동이 간편한 스쿠터와 수동 기어가 달린 매뉴얼 모터사이클의 장점을 결합했다. 무거운 부품인 엔진을 차체 가장 낮은 곳에 배치해 무게중심을 낮췄다. 메인 프레임(뼈대)도 낮게 장착했다. 초보자도 안정적으로 주행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런 식의 구조를 ‘언더 본(Under Bone)’이라고 부른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 변속이 가능한 클러치를 개발해 조작 방식도 간소화했다. 혼다 소이치로의 말처럼 한 손으로 배달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들을 조작할 수 있었다. 슈퍼커브 C100의 등장은 화젯거리가 됐다. 출시 첫해에 9만 대, 이듬해에는 16만 대가 팔렸다. 출시 이후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서 7600만 대(2013년 말 기준) 이상 팔린 스테디셀링 모델이다.
혼다가 상용 모터사이클만 개발한 것은 아니다. 레이싱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보이며 BMW모토라드, 두카티, MV아구스타 등 유럽 메이커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1961년 영국 맨섬에서 열린 ‘국제 투어리스트 트로피 레이스(International Tourist Trophy Race)’에서 배기량 125cc, 250cc, 350cc 등 세 개 부문을 휩쓴 것이 대표적이다.
독일 폭스바겐그룹의 이사회 의장이자 뛰어난 엔지니어인 페르디난드 피에히조차 그의 자서전에서 혼다 모터사이클과 엔진 기술력에 대한 부러움을 고백했을 정도다. 혼다는 지난해 1034만 대의 모터사이클을 판매했다. 판매 규모 면에선 세계 1위다. 매출액은 1조6000억 엔으로, 혼다 전체 매출액의 14%를 차지했다.
두 바퀴 사업의 성공은 자연스레 네 바퀴로의 영역 확대로 이어졌다. 여기에 일본 정부가 신규 자동차 업체를 규제할 움직임을 보이자 1962년 자동차 사업을 서둘러 시작했다. 혼다는 자동차 사업도 다소 급진적인 방법으로 시작함으로써 시장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1963년 혼다의 첫 스포츠카 S600과 경트럭 T360을 내놓더니 이듬해인 1964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레이싱카들의 경주인 F1에 참가했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레이싱카 RA271을 앞세워 독일 그랑프리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3번의 레이스에 참가해 모두 리타이어(중도 탈락)했다. 그러나 1965년 상황이 바뀌었다. 8번의 레이스에 참가해 최종전인 멕시코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혼다 기술력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F1 역사상 아시아 제조사가 거둔 첫 우승이었다. 이후 혼다는 프랑스 그랑프리 경기 도중 드라이버인 조 슐레서가 사망하면서 1968년 F1을 떠났다. 혼다가 F1에 복귀하기까지는 그 후 1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69차례 우승 차지한 F1의 명가
1983년 F1으로 돌아온 혼다는 무선과 컴퓨터를 이용해 경주용 차량 상태를 관리하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 시스템은 아직도 F1의 기본 기술로 널리 응용되고 있다. 혼다는 총 151개 그랑프리에 참가해 69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F1 명가로 인정받았다.
후발 주자는 선두 주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기술과 운영 노하우를 습득해 시행착오를 줄이고 한층 수월하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에선 대부분의 후발 주자가 다른 기업과 합작, 기술제휴하며 차량을 만들었다. 혼다는 예외였다. 혼다 소이치로는 독자 기술만을 고집했다. 그 자신이 엔지니어이기도 한 혼다는 연구·개발(R&D)의 수장으로서 기술 개발에 몰두했고 실제로 전 세계 자동차 업계를 놀라게 하는 혁신을 이뤘다.
이런 혼다엔 한 번의 합작이 있었다. 1979년 영국 브리티시-리랜드그룹의 오스틴 로버사와 제휴한 것이다. 첫 단계로 로버가 영국에서 혼다의 준중형차 시빅 해치백과 바라드(시빅의 세단형)를 생산했다. 이후 1983년 고급차 공동 개발을 위한 XX프로젝트 협약(1988년 종료), 1986년 소형 차량 YY프로젝트 공동 개발 협약도 맺었다. 혼다 유럽 시장 판매 물량을 로버그룹에 전량 위탁 생산하는 한편 50억 엔을 투자해 YY용 엔진을 현지 생산하기도 했다.
협력 관계는 갈수록 깊어졌다. 1989년 로버그룹과 영국 혼다(HUM)가 주식 20%를 상호 교환했다. 실적이 부진한 로버그룹엔 품질과 기술을 갖춘 혼다의 지원이 필요했고 로버는 유럽 시장 확대를 노린 혼다에 효율적인 생산 기지였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로버그룹의 혼다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BMW그룹이 로버그룹을 인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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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31일, BMW그룹이 로버그룹을 전격 매수했다고 발표했다. 15년간 로버그룹과 인연을 맺어 왔고 20%의 지분을 갖고 있던 혼다는 발표 전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로버그룹의 소유자인 브리티시에어로스페이스(BAe)가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매각을 결정한 것이다.
BMW그룹은 혼다와의 협력이 유지되길 바랐다. 협력 관계가 깊었고 부품 공급을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 만큼 이제 와서 발을 빼지 못할 것이란 계산도 숨어 있었다. 하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같은 해 2월 21일 혼다의 가와모토 노부히코 사장은 도쿄에서 열린 회담에서 BMW그룹의 베른트 피세츠리더 사장에게 말했다. “로버그룹의 주주 구성이 변했습니다. 혼다는 로버그룹과의 상호 주식 보유 관계를 청산하고자 합니다.” 혼다로선 20%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에게 M&A 전 충분한 논의도 없었던 것이 불쾌했다. 또한 모터사이클 부문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BMW 측과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았다. 혼다는 회담 후 로버그룹 지분을 매각했다.
철저한 소유·경영 분리…“기업은 주주들의 것”
도요타와 혼다는 최대 경쟁자다. 기업 규모는 크게 벌어졌지만 여전히 일본과 미국 등 전 세계 곳곳에서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라이벌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요타와 혼다는 1970년대 소형차급을 시작으로 중형차와 고급차, 미니밴과 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CUV)으로 경쟁 차급을 확대하며 서로를 견제해 왔다. 1970년대 소형차급에서 코롤라와 시빅이, 1980년대 중형차급에서 캠리와 어코드가 각 차급 판매 1위 자리를 놓고 다퉜다.
특히 1990~2000년대 중반까지 경쟁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차의 전성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1991년 도요타가 에스티마를 출시하며 미니밴 시장에 진출하자 3년 뒤인 1994년 혼다가 오딧세이를 출시, 이듬해인 1995년에 에스티마 판매를 추월했다. 1994년에는 도요타가 RAV4를 출시하며 CUV 시장을 개척하자 곧바로 이듬해에 혼다가 CR-V를 내놓았다. 경쟁 구도는 2000년대 초반 하이브리드 차량에서 무너졌다. 도요타가 프리우스로 큰 성공을 거둔 반면 혼다 인사이트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프리미엄 브랜드 전략에서도 희비가 엇갈렸다. 1986년 미국에 프리미엄 브랜드인 어큐라를 론칭했다. 1989년 등장한 도요타의 렉서스보다 3년 이른 시점이었다. 하지만 어큐라 역시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반면 렉서스는 제품과 마케팅 전략이 맞아떨어지면서 북미 럭셔리 세단 판매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해 렉서스의 미국 판매량은 3만4757대였다. 어큐라는 1만5751대로 초라한 실적을 올렸다.
혼다와 도요타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시장 확대 과정에서 상호 경쟁을 통해 실력을 키웠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또한 지난 몇 년간의 침체기를 뚫고 체력을 회복한 혼다가 제품 혁신과 F1 재진출 등을 통해 다시 도요타의 강력한 경쟁자의 입지를 굳힌 것은 한국 자동차 업계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문제다.
혼다는 세습 경영을 하고 있는 도요타와 달리 혈통이나 인맥 등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혼다 소이치로는 세습 경영을 거부하고 친인척은 물론 자식들에게조차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았다. 부인에게 준 혼다 지분 1%가 전부다. 혼다 소이치로는 197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1991년 지병인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혼다 소이치로가 사망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퇴임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99%를 실패하는 일에 쓴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
'📡 4차산업.보안.특허.AI.IT > 🚢 조선.차량.항공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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