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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因緣이 고이는 방
★ 롯데 신격호 - 일본서 번 돈 쏟아부어 애지중지 키웠는데… 신격호의 '중화학 열망'도 비틀 본문
[흔들리는 롯데의 꿈] 일본서 번 돈 쏟아부어 애지중지 키웠는데…
신격호의 '중화학 열망'도 비틀
日 성장 이끈 중화학에 동경… 10년 절치부심 끝 숙원 풀어
그룹 역량 쏟으며 키웠냈지만
경영권 분쟁에 결정 늦어지며 우즈벡·印尼 사업지연 잇따라
유주희·이종혁기자 ginger@sed.co.kr
아버지에 이어 한국롯데를 반석에 올려놓은 것으로 평가받던 신동빈 회장의 야망도 ‘장자의 난’으로 중대
고비를 맞고 있다. 해외사업은 어려움에 빠진 지 오래다. 사실상 중국사업 가운데 일부는 구조조정에 들어
갔고 베트남 사업도 녹록지 않다. 차입을 하지 않는 기업, 돈이 넘쳐나는 알짜기업으로 평가받던 롯데는
왜 이렇게 됐을까.
서울경제신문은 롯데그룹의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과 그의 아들이 품어온 꿈과 그 희망이 흔들리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짚어보는 시리즈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1960년대 중반 신격호 총괄회장은 일본에서 금의환향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48년부터 식품과 상사,
부동산, 물산을 갖고 있었지만 고국에서는 다른 사업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전공’인 식품이 아니라, 중화학공업이었다. “일본의 공업발전을 보면서 중화학
공업을 하고 싶었다”고 신격호 총괄회장은 훗날 털어 놓았다(2004년 일본 주간지 다이아몬드와의 인터뷰).
중화학 공업 분야에서 고도 성장을 이룬 일본과 달리, 한국은 하루 세 끼 챙겨 먹기도 어려운 현실이었다.
이는 신격호 회장이 중화학공업을 동경한 중요한 이유였다고 그룹 고위 관계자는 전했다.
하지만 희망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신 회장은 중화학공업, 그 중에서도 석유화학 사업을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이미 ‘락희화학(LG화학의 모태)’을 갖고 있던 LG그룹을 당시 대규모 프로젝트의
사업자로 결정하면서 포기해야 했다.
신격호 회장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도 더 지난 후인 1979년
결국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하면서 석유화학 산업에 진출하게 된다.
일본 롯데에서 번 돈을 쏟아 부었다. 기존 공장을 두 배로 늘리고 석유화학의 기본이 되는 납사분해시설
(NCC)을 신설했다. 최측근 경영진을 호남석유화학 최고경영자(CEO)로 임명하며 그룹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격호 회장이 이렇게 키운 회사가 현재의 롯데케미칼이고, 그는 화학사업을 애지중지한다.
그런 신격호 총괄회장의 꿈이 흔들리고 있다.
이들간 경영권 분쟁은 다음달 예정이었던 롯데케미칼의 우즈베키스탄 석유화학단지 사업 준공을 한달
이상 늦어지게 만들었다. 최근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계열사 기업공개(IPO)와 자금조달에도 이상
신호가 들리기 시작했다. 미국 에틸렌 공장도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번 일로 롯데케미칼과 다수의 계열사가 업무 차질을 빚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에서 먼저 사업을 시작한 신격호 총괄회장은 지난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한국 롯데를 창립
했다. 신 회장은 당시 ‘락희화학(LG화학의 모태)’에 밀려 자신의 가슴에 품었던 중공업(석유화학)을
포기한 뒤, 정부 권유로 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조달 계획까지 마련했지만 정부가 뒤늦게 국영기업
(현재의 포스코)을 설립키로 하면서 이 역시 접었다.
신격호 회장은 별 수 없이 식품 사업을 키우는 데 전념했지만, 중화학공업에 대한 꿈은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1979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한 이후 일본에서 무려 2,276억원의 대규모 자금을 들여온 것은 중화학
공업에 대한 그의 열망이 얼마나 컸던지를 역설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1986년에는 일본 롯데에서 번 돈 8,000억원을 더 국내로 들여와 이 중 일부를 호남석유화학에 투자했다.
에틸렌 공장을 두 배로 확대하고 납사분해시설(NCC)을 짓는 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5,300억원을
들였다. 당시 물가로는 엄청난 액수였다.
공격적인 투자와 함께 롯데그룹의 성장에도 가속이 붙었다. 당시 신격호 회장은 “그룹 역량을 결집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당시 시대 분위기상 ‘소비재 기업’으로
분류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경제 성장 기여도가 높은 화학 사업에 초점을 맞췄음은 물론이다.
1988년 롯데그룹은 총 매출 2조1,970억원을 기록하며 재계 10대 그룹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본인 스스로가 화학 부문을 중시했던 만큼, 유력한 후계자에게도 화학 산업에서 경영 수업을
시작하도록 했다. 노무라 증권 등 롯데의 지붕 바깥에서 사회 생활을 하던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을
1990년 당시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불러들였다. 신동빈 회장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적극적으로
석유화학 사업을 키웠다.
2003년 현대석유화학 2단지를 인수해 롯데대산유화를 설립하고, 이듬해 케이피케미칼을 인수했다.
NCC 생산 능력이 국내 1위까지 올라갔고, 중국·미국·말레이시아 등으로 해외 사업장도 점차 늘어났다.
그런 신 회장이기에 경영권 분쟁 이후 일어나고 있는 석유화학 사업의 부진은 너무나 속이 쓰리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석유화학단지 프로젝트는 롯데케미칼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입장에서도
의미 깊은 사업이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대규모 석유화학단지이기 때문이다.
당초 현지 정부에서 독립기념일인 9월1일에 맞춰 준공식을 열자는 제안까지 전달해왔을 정도다.
우즈벡 국영가스공사, 한국가스공사 등이 참여하는 이 사업에는 총 40억달러(4조6,7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다.
롯데케미칼의 우즈베키스탄 사업뿐만이 아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2012년 인수한 말레이시아
화학업체 ‘타이탄’을 내세워 인도네시아에 50억 달러 규모의 또 다른 초대형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우선 순위에서 밀리며 진척이 더디다. 롯데의 기업사(史)를 아는 그룹 안팎 사람들은
“화학 사업의 더딘 행보를 알면 신격호 총괄회장이 펄쩍 뛸 것”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다. 현재 롯데케미칼은 중국 같은 후발 경쟁사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수처리, 에너지
저장장치(ESS), 바이오 등 분야를 공략하겠다고 했지만, 경영권 분쟁 사태는 이 또한 장담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오랜 꿈은 이렇게 밑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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