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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因緣이 고이는 방
☆ 김우중(金宇中 1936~)과 대우그룹 본문
..
(대우실업 창립 당시의 김우중.현재와는 달리 준수한 외모가 인상적이다.)
우리가 20세기의 기업들을 애기하면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그룹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그 중에 하나는 바로 '대우'그룹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그런 대우 그룹의 회장이었던 김우중이라는 사람은, 민간인으로써나 기업인으로써나 자기 회사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으며, 그만큼 자신의 회사에 대한 애정과 노력을 '일'을 통해 승화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일
집착가이자 중독자이기도 했다.
김우중 회장은 1936년 12월 9일에 대구에서 태어난 기업가이다.
그는 위로 대구 사범학교 교장직과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던 아버지,우당 김용하 선생이 있었으며,
슬하에 4명의 형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여 대우그룹의 모태가 되는 '대우실업'을 출자금 5백만원으로 설립하여
본격적인 경영의 길로 나서게된다.
창업 이후 그는,유창한 영어 실력과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때 돈을 갚는 독특한 자금동원 능력,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맥과 경기고 인맥 등을 잘 활용해 창업 5년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으며, 대우를 국내 굴지의 10대 대기업으로 성장시키기에 이른다.
그의 그런 경영 늘력을 알 수있는 대목이, 빠릿빠릿하게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맞추어 셔츠와 내의류 원단을
싱가폴, 미국, 인도네시아에 수출하는데 성공한 일화인데, 그 결과 김우중의 대우실업은 설립 1년만인 68년에 대통령
훈장추서와 함께 대통령이 신뢰하는 그룹들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248)그러나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손영길 등
하나회 장교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육군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후에 전두환 정권이 설립한
이후에 이 일을 잊지 않은 전두환이 신군부를 필두로 김우중에게 은혜를 갚았고, 김우중과 대우는 더욱이 성장 할 수
있었다.
이때 김우중은 83년에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대우전자)동양증권,삼보증권을 인수하였으며,박정희 정권 때인
73년에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맞추어 1973년에 영진토건, 76년 한국기계, 78년 옥포조선소(대우조선해양),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면서 대우를 10대 재벌로까지 키운다.
그리고 김우중이 인수한 이들 기업들이 가진 대다수의 특징을 들자면 '부실기업 인수'라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독창적인 사업방식인 것이, 부실기업을 헐값에 인수받고 난 뒤에 그룹에 있던 기존계열사의
수익을 이식함으로 부채를 청산하고,
그 후 경영방식을 '대우식'으로 바꾸어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값는 등의 방식으로 많은 부실기업들을 단기간 내에
업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한국재벌 역사상 유래없는 경영이자, 동시에 그만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 경영이기도 했다.
그 단적인 예를 들자면, 강병호 전(前)대우자동차 사장은 1981년도에 런던 대우지사에 해외자금 관리담당직으로 발령났으나, 발령기간인 8년동안 주말에 쉬지 못할 정도로 해외의 부실기업 입찰과 회계작업을 철저히 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그 후 대우그룹은 MSX기종이었던 '재믹스'와,국내 하이엔드급 컴퓨터계의 최강자였던 '솔로'시리즈와,중형차인 '로얄
시리즈',소형차인 '르망'외에도 많은 분야의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이며 국내기업 4대천황에 '현대'와'삼성',
'금성(현재의 LG그룹)'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포츈에 대서특필된 김우중 회장.)
그 후, 국내외로 불어오는 컴퓨터 사업과 정보산업의 필요성을 느낀 김회장은 1993년부로 '세계경영'을 주창하면서
소련의 해체로 국가부채의 규모가 엄청났던 동유럽 지역과 많은 기업들이 개척하지 못한 아프리카까지 사세를 확장해
나가면서 대우그룹을 93년 포츈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다목적 그룹' 53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후, 대우는 동유럽의 구 소련권 핵심지역 중 하나였던 폴란드에 '세종대왕 고등학교'를 설립해 폴란드 정부에 기증
하였고, 폴란드 정부와 계약을 따낼 때 마다 공부원 임용차량으로 자사의 최고급 모델이었던 '프린스'를 증정해 주는 등
공격적인 이미지 마케팅을 시작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우즈대우', 폴란드의 유일한 국산메이커인 'FSO'인수,
루마니아 현지법인 건설등의 지역기지화를 점진적으로 해나아갔다.
또한 김영삼, 김대중의 묵인 하에 김우중 회장 독자적으로 대북관계 커넥션을
유지해 북한의 남포에 대규모 공장시설인 '남포공단'설립안건을 따내는 등
국내 기업들도 두려워 한 대부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갔다.
또한 80년대 중반부터는 목포에 대우병원을 세워 지역민들을 상대로 의료
봉사를 하고, 아주대를 대우재단이 인수해 경영외적인 것에 간섭하지 않고,
묵묵히 재정지원과 필요한 물자조달만 해주는 등 따뜻한 이미지 등을
위시한 '대우가족'이라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6년도, 스페인 현지의 대우전자 생산공장 설립시점부터 대우그룹의 부채는 막대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IMF가 닥친 98년도에 결국 김우중의 '대우왕국'은 32년간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당시 대우그룹의 부채규모는 89조원이었으며, 동시에 보유하고 있던 자산은 59조원 밖에 되지않았다.
또한 (주)대우 본사만 가진 부채규모는 34조원이었으며, 이당시에 대우 인터네셔널, 대우건설과 대우자동차,
대우전자등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부문을 매각하여 27조를 빠르게 청산하였으나,
매각에서 제외된 나머지 사업부 또한 7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감당해야 됐다.그
리고 결국 99년에는 김우중 회장과 대우 사장단의 단체 퇴임을 시작으로, GM의 대우차 매각 등의 하향세를 걷다 대우
그룹의 모 회사였던 (주) 대우는 2001년 파산하였다.
20세기 대한민국을 빛낸 기업인 김우중은 개인부채 17조를 떠안고 있는 상황이며...
대우그룹 또한 계열사들이 갈갈히 찢어진 상태로 옛 영광을 지켜보고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한국 기업사에 수입순위든 분식회계든간에 커다란 한 획들 그은 그룹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20년 안에 '대우그룹'이나, '김우중'같이 성장할 기업이나, 기업가는 앞으로 나오기 힘들 것이라 예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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