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으로 가는 전직 경제사령탑
기획재정부 출입기자는 경제부총리의 일정과 발언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수장이기 때문에, 경제부총리의 행동 하나와 말 한마디는 곧바로 뉴스가 됩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큽니다. 우리가 그들을 '경제 사령탑'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박재완·윤증현
그런데 최근 전직 경제 사령탑들이 잇따라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기획재정부를 이끌었던 박재완 전 장관은 삼성전자로, 그 직전 장관이었던 윤증현 전 장관은 두산인프라코어로 간다고 했습니다. 장관뿐 아니라 김석동, 임영록, 허경욱 등 전직 기재부 차관들도 대거 대기업 사외이사 후보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전직 경제 사령탑들 가운데 몇 명이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자리를 옮긴 걸까. 그리고 그들은 대기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기획재정부 역대 장·차관들 중 2000년 이후 역임자들의 이력을 직접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대상자를 추려보니 총 41명이었습니다. 이 중에 겸임이 금지된 임종룡 금융위원장, 주형환 산업부 장관 등 현직 관료와 최경환, 장병완 의원 등 국회의원을 제외한 전직 경제 사령탑은 총 32명이었습니다.
■ 2000년 이후 기획재정부 장·차관의 84%가 대기업 행
전직 경제 사령탑은 총 32명
32명 중에 대기업 사외이사로 활동했던 경우는 모두 23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재완 전 장관과 윤증현 전 장관처럼 사외이사 후보로 이름을 올린 경우까지 포함하면 29명이었습니다. 조사 대상자의 84%였습니다. 검색 결과 퇴임 후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리지 않은 사람은 변양균 스마일게이트 창투사 회장과 이헌재 어니스트앤영 상임고문, 신제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 의장, 이용걸 세명대 총장, 김동연 아주대 총장, 현오석 국립외교원 석좌교수 등 6명뿐이었는데, 대부분 사업을 하거나 학계로 진출한 경우였습니다.
23명 중 7명은 2곳 이상의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를 했고, 4곳에서 사외이사를 한 사람도 한 명 있었습니다. 이들이 간 기업은 삼성과 현대자동차, SK텔레콤과 GS, 두산과 효성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미래에셋과 메리츠증권 등 금융회사도 있었습니다. 모두 27곳이었습니다.
■ 대기업 이사회 회의록 전수조사 해보니…
그렇다면 이들은 대기업으로 가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우리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Data Analysis, Retrieval and Transfer System, 약칭: DART)에 공개된 기업들의 이사회 회의록을 모두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대부분 대기업의 이사회 회의록에는 사외이사의 보수와 출석 여부, 안건 찬반 여부가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트 사이트
검색 결과, 전직 경제사령탑 출신 사외이사 23명은 총 7백여 차례 이사회에 참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출석률은 90% 이상으로 꽤 높았습니다.
보수는 연평균 5,200만 원 정도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사회 참석 한 번에 교통비 형식으로 적게는 3백만 원에서 많게는 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이와 함께 일부 사외이사는 사무실과 차량, 건강검진 등도 제공받았습니다. 한 10대 대기업 관계자는 사외이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만큼 다른 사내 이사들과 비슷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별도의 자문을 구할 일이 많기 때문에 더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경향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 안건 찬성률 100%…"대기업 정책에 반발해 사퇴한 전례 없다"
안건 찬성률은 100%였습니다. 기업이 내놓은 안건에 반대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취재하며 만난 기업 관계자들과 일부 교수들은 안건 찬성률이 100%라는 점만 가지고 이들을 거수기로 비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기업이 이사회를 열기 전에 사외이사들의 의견을 먼저 묻고 그 의견을 반영해서 수정 안건을 올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 기업 사외이사들의 안건 찬성률이 90%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대기업 지배 구조와 사외이사 제도를 연구해온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의 김우찬 교수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김 교수는 실제로 전직 장·차관들이 사외이사로 대기업에 가서, 총수의 정책 결정에 반대해 사퇴하거나 뉴스가 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기업에 간 전직 장·차관들이 총수를 견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 KBS 조사에서 나온 이 100%란 수치는 이런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직 경제사령탑은 퇴직 후에도 영향력이 적지 않습니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고 지휘하면서 만들었던 인맥과 지식, 경험 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계에서는 고위급 경제 관료를 얼마나 사외이사로 영입했는지가 회사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형태의 전관예우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입니다.
제가 취재 과정에서 인터뷰한 기업 관계자들 역시 이러한 측면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은 정치권과 경제부처 등을 상대하는 이른바 '대관 업무'를 위해서 영향력 있는 전직 고위 관료를 찾아가 영입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애초에 영입하면서 기업의 '방패막이' 역할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 사외이사 원조 미국은 '경쟁사 CEO' 모시기, 한국은 '전직 관료' 모시기
사외이사 제도는 외부 인사를 이사회에 참석시켜 대주주의 독단 경영과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1998년 처음 도입됐습니다. 초창기에만 해도 시민단체 출신 사외이사가 꽤 있었지만 이번 조사로 알 수 있듯이 이제는 관료 출신의 힘 있는 사외이사 모시기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미국 사례 그래프
해외는 어떨까요? 사외이사 제도의 원조 격인 미국의 경우를 살펴봤습니다. 우리나라는 주요 대기업 사외이사 중에 관료 출신이 40%를 넘지만,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상위 100대 기업은 사외이사의 74%가 재계 출신이었습니다. 관료 출신은 9.9%에 그쳤습니다. 주로 경쟁사 CEO를 모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월마트의 경우 사외이사 중에 구글과 야후 CEO 출신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의 사외이사 선임구조는 기업 총수가 결정권을 쥐고 있는 형국입니다. 대기업 경영 감시라는 원래 취지에 맞게 사외이사를 선임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우리도 사외이사 선임 구조를 총수 위주에서 주주 위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공익을 대변하거나 경영을 감시할 인물을 늘려야 합니다. 기업의 방패막이가 되는 힘 있는 전직 관료 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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