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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들은 환자 아닌 ‘수술용 표본’이었다, 여성병원 역사의 불편한 진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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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들은 환자 아닌 ‘수술용 표본’이었다, 여성병원 역사의 불편한 진실

Ador38 2021. 3. 27. 06:34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댓글5

 

입력 : 2021.03.26 10:27 수정 : 2021.03.26 20:37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 지음·이영래 옮김·윤정원 감수|갈라파고스|312쪽 |1만6500원

 

 

 

 

19세기 미국 산부인과 의술 발전은 흑인 여성 노예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이뤄졌다. 백신 외과 의사들은 흑인 노예 여성들에게 치료라는 명목으로 각종 실험적 의료행위를 하면서 수술법을 개발해 이를 의학 논문에 성과로 발표했다.

 

1850년 4월 어느 날, 미국 조지아주에 사는 28세 메리가 병원을 찾았다. 메리는 생리 주기가 불규칙했으며, 질 출혈 증상이 있었다.

 

그는 저명한 외과 교수인 폴 이브 박사에게 이 증상을 설명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한 걱정도 토로했다. 메리를 진찰한 이브 박사는 암 진단을 내렸다. 수술팀은 암세포가 퍼진 메리의 자궁을 들어냈다.

 

수술에 참여한 의사들은 스스로 이 수술을 미국 최초의 성공적 자궁절제 수술이라고 평가했다. 더 이상 생리불순을 겪지 않게 된 메리도 이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을까.

 

회복 후 메리는 의사에게 “수술 이후 왜 생리를 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자궁을 절제하면 불임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수술을 받았던 것이다.

 

3개월 후 메리가 사망하자, 이브 박사는 메리의 자궁을 동료이자 부인과 의사인 찰스 메이그스에게 양도했다. 자궁은 필라델피아의학박물관에 전시됐다. ‘흑인 노예 여성’인 메리는 백인 외과 의사에게 ‘환자’ 이전에 ‘실험용 표본’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19세기 미국 산부인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과 성취는 흑인 여성 노예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발판 삼아 이뤄졌다.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은 ‘산부인과의 아버지’로 불려온 백인 외과의들이 여성병원을 세우고 여성의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인종·성차별적 의학사를 담은 책이다.

 

저자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는 의학, 노예제, 여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의학사학자다. 오언스는 19세기의 의학저널, 법원 소송 사건, 의사들의 일지 등 공식적인 기록부터 노예주의 개인 일기와 노예들의 회고록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그리고 수많은 ‘메리들’의 이야기를 찾아냈다.

 

현대 미국 산부인과의 역사는 19세기 중반 시작됐다.

 

이전에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관한 영역은 여자 산파들의 일로 여겨졌다. ‘부인과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매리언 심스 같은 백인 외과 의사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면서 산부인과가 하나의 의학 분과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심스는 1855년 뉴욕에 미국 최초의 여성병원을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보다 10년 앞서 앨라배마주에 비공식적으로 미국 최초 여성병원을 세웠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병원’이 아니라 ‘여성노예병원’이다.

 

여성노예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은 치료보다는 실험에 훨씬 가까웠다. 심스는 방광질루라는 자궁질환 치료법을 찾기 위해 인근 농장을 뒤져 방광질루로 추정되는 노예 여성 예닐곱 명을 주인으로부터 ‘빌려왔다’.

 

1844년부터 1849년까지 약 5년 동안 그는 젊고 건강한 흑인 여성에게 실험적 수술을 계속했다. 방광과 질 근처의 누공(구멍)을 막기 위한 시술이 주로 이뤄졌다. 애너카라는 한 여성에게는 5년간 무려 30번의 수술이 시행됐다.

 

그 결과 심스는 1852년 ‘미국의학저널’에 방광질루 치료법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고, 3년 뒤 뉴욕에서 ‘뉴욕주여성병원’을 정식 개원할 수 있었다. “흑인 노예 여성에 대한 실험 덕분에 부인과 경력을 시작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 미국의 걸출한 부인과 외과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심스의 비윤리적인 의료행각은 당시로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자는 “19세기 초중반의 부인과 의사들은 일부 학자의 주장처럼 흑인 여성의 신체를 난도질하기를 즐긴, 특별히 잔인하거나 가학적인 의사가 아니다. 그들은 과학적 인종차별주의가 번성하던 시대에 살았던 엘리트 백인 남성이었을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당시 백인 의사들은 흑인 여성에 대해 매우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의사·과학자들은 흑인이 백인에 비해 인종적으로 열등하고 퇴화돼 있다고 주장하며 흑인과 백인 사이에 존재한다는 생물학적 차이를 찾으려 했으나, 생의학적 연구에는 오직 흑인 여성의 몸만을 이용했다.

 

“그들은 흑인 여성의 생식기가 백인 여성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인은 백인에 비해 고통을 훨씬 덜 느끼며, 흑인 여성은 성적으로 음란하다는 의학적 편견은 백인 외과 의사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실험적 의료행위를 할 수 있게 했다. 선구적인 부인과 의사로 유명한 존 피터 메타우어의 논문은 초기 의사들이 노예 여성 환자를 물건으로 여겼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1837년 병원을 세우고 백인 여성 한 명과 흑인 노예 여성 한 명에게 방광질루 수술을 실시했다. 백인 여성의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스무 살인 흑인 여성의 수술은 실패했다.

 

메타우어는 4년 동안 흑인 노예 여성에게 계속해서 실험적 수술을 했음에도 실패하고는 그 탓을 흑인 여성에게 돌렸다. 그는 1847년 미국의학저널에 실린 논문에서 “충분한 회복 시간이 있었다면, 보다 정확하게는 성교가 없었다면, 이 환자는 분명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당시 여성의학은 인종·성차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계층차별적인 면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수많은 아일랜드 여성 이민자가 미국에 들어왔다. 이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고, 비혼에, 가난했다.

 

당시 의학저널에 실린 글과 기사들에 따르면 의사들은 아일랜드 여성들에게 흑인 노예 여성과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고통에 무감하고, 성욕이 과다하며, 튼튼한 생식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흑인 노예 여성들의 출산은 노예 재생산으로 여겨져 장려된 반면, 아일랜드 여성들의 출산은 장려받지 못했다.

 

책은 여성들이 인권유린 현장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있지만은 않았다는 점도 조명한다. 농장주들은 상품 생산 스케줄과 노예 거래에 맞춰 노예 여성들의 임신을 통제하려 했으나,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이용해 계획임신을 했다.

 

법학자 도로시 로버츠의 연구 결과를 보면 노예 여성들이 추수를 마치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작업량이 줄어드는 11월, 12월, 1월에 임신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포착된다. 노예 여성들은 농한기를 이용해 계획적 임신을 하고, 흑인 산파에게 출산 전후의 치료를 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흑인 노예 여성들은 의사와 노예주들의 육체적 처벌과 앙갚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임신을 계획하고 피하며, 자신이 사랑하기로 선택한 남성과 성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의학적 지식을 물려주었다”고 말한다.

 

노예는 160년 전에 해방됐고, 백인 남성 의사들만 학계의 중심에 있던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실상은 이 시대에도 일부 유효하다.

 

저자는 “흑인 여성, 즉 여전히 가장 빈곤한 미국인 집단이자 미국의 다른 여성들보다 많은 생식질환을 겪고 있는 집단, 다른 미국 여성에 비해 미혼모 비율이 높은 이 인구학적 집단은 의학 분야에서 여전히 초신체(Superbody·책에서는 의학적으로 대상화된 신체를 표현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함)로 취급되고 있다”고 말한다.

 

과학·의학적 연구와 주장에는 수많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적 해석들이 끼어들어 있다. 수많은 의학 연구가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해서 이뤄진다. 여성의 몸은 여전히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책의 감수를 맡은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의사는 “ ‘낙태’는 여성의 몸에 나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목소리, 임신을 하면 자궁내막증이 좋아지기 때문에 어서 결혼을 해서 임신을 하라는 조언” 등을 예로 들며

 

“이런 사고들의 기저에 치료라는 대의가 수단을 정당화해 온 것은 아닌지, 여성을 ‘위한다’는 선의에 압도당해 여성의 삶이 아니라 질병만 보게 된 것이 아닌지 이제는 의료인도 여성도 함께, 그리고 다시 질문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에 있던 매리언 심스의 동상은 2018년 4월 철거됐다.

 

흑인 여성 노예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적 의료행위에 대한 비판이 점점 거세지면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동상 철거를 결정한 역사적유물심의위원회는 “그의 동상은 억압적이고 학대적인 관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위치에 계속 유지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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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261027011&code=960205&utm_source=msn&utm_medium=related_news#csidxd291497d84f4c1098e79035c39f9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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