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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因緣이 고이는 방

??? ◑◐ 전체 인구의 45%가 김씨, 최씨, 신씨 이름을 쓰는 남태평양 싸이판 옆 티니안 섬 원주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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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체 인구의 45%가 김씨, 최씨, 신씨 이름을 쓰는 남태평양 싸이판 옆 티니안 섬 원주민

Ador38 2021. 11. 7. 13:31

조회수 422,672회

202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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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구의 45%가 김씨, 최씨, 신씨 이름을 쓰는 남태평양 원주민 #티니안섬 #태평양원주민 #한국혈통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30분을 날아가면 그림에나 나올 법한 풍경을 자랑하는 섬이 하나 나옵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행지로 손꼽히는 서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섬.

 

이 섬을 처음으로 발견한 서양인은 마젤란 선단의 선원들이라고 알려져있는데요. 오랫동안 스페인이 소유했던 이 섬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면서 미국의 소유가 됐다가 독일을 거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일본의 차이가 됩니다.

 

망망대해 한 가운데 자리한 관계로 전혀 쓸모없어 보이던 이 섬은 사탕수수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보물창고로 떠오르게 됩니다. 일본의 '남양흥발'이라는 기업은 일본 본토는 물론 오키나와와 한반도로부터 수많은 노동자들을 모집해서는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합니다.

 

1930년대 배고픔에 시달리던 한국인 중 "1년 내내 따뜻하고 먹을 것이 넘치는 곳에서 돈 벌어볼 생각없느냐"는 달콤한 꾀임에 넘어가 사이판으로 가는 배를 탄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막상 배에서 내린 이들을 기다리던 것은 등이 타들어 갈 듯이 뜨거운 태양과 그 아래에서 해야했던 중노동입니다.

 

먹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어 오줌을 누면 누가 그걸 마시겠다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전설이 남아있기도 한데요. 그러던 중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다짜고짜 무모한 공습을 감행합니다. 미 해군이 주둔하던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한 것이죠.

 

그때까지 미국은 조용히 무기를 팔면서 단 한 발의 총알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일본의 이 공습은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불러옵니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죠. 유럽에서 촉발된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무모함으로 아시아까지 확장된 겁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해야했던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전투병을 모집해야했고 그 중 가장 쉽게 차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하와이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판에서 노동자로 징집한 한국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티니안을 전쟁 준비를 위한 섬으로 만들어냅니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비행장을 건설했고 미군의 폭격으로 부서지면 재건하는 작업을 반복했는데요. 1944년 6월 15일 티니안섬 바로 옆에서 발발한 사이판 전투는 태평양 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로 꼽힙니다. 이곳에서는 '슈퍼 요새'라고 불리던 B29 전투기의 일본 본토 폭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이나 일본 모두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는데요.

 

그러나 이 전투에서 3만명의 일본인 중 포로가 된 사람은 921명에 불과했고 3만명 중 2만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중에서 1,000명은 일본 정부가 전원 ‘옥쇄’하라는 명령에 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차피 전투에 패배한 마당에 살아있어봐야 일본군 사망자 숫자만 올라갈 것이니 차라리 자결하라는 의미였고, 이 옥쇄 명령이 내려진 이상 생존하는 것 자체가 중범죄에 해당합니다.

 

당시의 일본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몸을 던진 절벽의 이름 'Suicide Cliff' 한국어로 ‘자살절벽’이라고 부르고 여전히 사이판의 주요 여행코스로 남아있는데요. 그런데 이 비슷한 일이 사이판에서 5km 떨어진 티니안 섬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이 섬 역시도 사이판과 비슷한 열대 계절풍 기후에 7월에서 10월까지 매달 평균 300mm에 가까운 비가 내립니다. 지형이 평탄한 덕분에 사탕수수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죠. 1944년 티니안의 인구는 약 18,000명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은 일본인과 조선인 징용자들로 채워졌고 원주민이던 차모로족은 대부분 마리아나 제도의 다른 섬으로 추방됐습니다.

 

1944년 7월 9일 사이판 전투가 끝난 후 미국은 곧바로 사이판 바로 옆의 티니안 공격 준비에 들어갔죠. 마침내 7월 24일 미 해병 4사단은 해군 폭격의 도움을 받아 티니안섬에 착륙했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티니안섬을 점령했는데요. 8,500명의 일본군 수비대 중 313명이 살아남았는데 이 중 한국인 2,700명을 포함한 15,000여 명의 민간인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일본 정부의 명령을 받은 일본인들은 절벽을 뛰어내렸는데 이들 중에는 200여 명의 조선인 징용자도 포함됐습니다. 만약 뛰어내리지 않으면 죽인다고 협박하며 조선인들을 협박했는데 이들을 피해 2,500여 명의 조선인들은 동굴과 정글로 달아나 간신히 목숨을 건졌는데요.

 

하지만 대부분은 굶어죽는 비극을 맞이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26명의 차모로족 원주민들이 이들의 생존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조선인 징용자들과 그 후손이 바로 현재 티니안섬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전체 인구수 3,000명의 45%가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어 원주민이지만 지극히 동양적인 얼굴모습을 가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간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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