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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or 사색. 도서.

살구나무 아래에서

Ador38 2022. 7. 6. 18:47

3시간 전

© 제공: 한겨레게티이미지뱅크
© 제공: 한겨레살구나무 아래에서
 
 
[숨&결] 양창모

강원도의 왕진의사

빨간 앵두가 점점이 익어가는 시골 마을에 왕진 갔다 돌아오는 차 안. 동행한 지인은 휴지를 꺼내 들고 어르신 댁에서 따온 앵두를 먹으며 연거푸 씨를 뱉어냈다. 앵두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궁금해 물었다. “어렸을 때 학교 갔다 오면 배고플까 봐 엄마가 앵두를 따다 주셨어요.

엄마 손이 참 컸어요. 일을 많이 해서 손가락 마디가 나무옹이같이 두꺼웠죠. 앵두를 볼 때마다 한움큼씩 따오던 엄마 손이 생각나요.”

어디 앵두뿐일까. 지금 시골에는 살구나무 아래에 수북이 쌓인 살구들 천지다. 박 할머니 댁에도 그 옆 최 할머니 댁에도 아무도 따가지 않는 살구들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서 툭 떨어져 골목길마다 썩어간다. 박 할머니는 중풍으로 집 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최 할머니는 몇달 전부터 아예 침대에서 나오지를 못한다.

처음 최 할머니 댁을 찾았을 때다. 대문에 달린 문고리가 밖에서 걸쇠로 잠겨 있었다. 안 계신 줄 알고 전화를 했더니 집에 계셨다. 알고 보니 혹시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마치 빈집인 것처럼 요양보호사가 밖에서 잠가놓고 간 거였다. 할머니는 1년 전만 해도 걸어다닐 수 있었지만 지금은 침대 옆에 가져다 놓은 요강까지도 갈 수 없다.

침대에서 밥을 먹고 침대에서 볼일을 본다. 침대가 곧 집이다. 식판도 휴지통도 리모컨도 모두 침대에 있다. 6개월 전 할머니는 꼬리뼈 골절 때문에 요양병원에 두달 입원해 있었다.

“거긴 자유가 없어. 저녁 여덟시만 넘어가면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도 불 끄고 자야 해. 기저귀도 정해진 시간에만 갈아줘. 축축해도 그 시간까지 기다려야 해.” 할머니는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여도 이 침대 안에서의 자유가 훨씬 좋은 것이다.

“할머니, 마당에 살구나무가 있던데 얼마나 된 거예요?” “100년은 됐을걸.” 그렇게 얘기하는 할머니도 4년 뒤면 지금의 살구나무 나이가 된다.

“그 나무 덕을 많이 봤어. 살구나무에 달린 벌집을 따와 양봉을 했거든. 그걸 팔아서 밥벌이했어.” “이 시골 동네까지 찾아와서 꿀을 사가는 사람이 있어요?” “남들 1년에 두번 하는 걸 한번만 꿀을 땄어. 토종벌꿀 그대로 키웠거든. 그래서 믿고 사러 오는 거야.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을 속이면 안 돼.”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말벌들이 벌을 잡아먹잖아. 근데 벌들이 잡아먹힐 줄 알면서도 뭉쳐서 말벌하고 싸워. 벌집을 지키려고.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아.” 과연 사람도 그러한가. 적어도 할머니의 삶은 그러했던가 보다.

지금 시골에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삶에서 툭툭 떨어지는 이들이 있다. 논두렁에서 골목에서, 심지어 자기 집 마당에서도 사라진다. 일상의 터전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방에 갇혀버린 노인들이 집집마다 있다. 저 살구들이 다 썩어 거름이 되고 추운 겨울을 나면 내년 여름에 다시 살구가 열릴 것이다.

그즈음 할머니는 그 살구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시집올 때 마당에 서 있던 살구나무는 키가 두세배 자라 잎이 무성하고 여름이면 애기 뺨처럼 뽀얀 살구들이 자라지만, 그 세월 동안에 할머니는 이제 허리를 일으키기도 어렵게 되었다.

따가는 이도 없는 앵두와 살구가 익어가는 것을 보는 일이 참 쓸쓸하다. 내년에도 살구는 할머니를 볼 수 있을까. 가지 끝 살구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깝다 해주던 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자기답게 끝내 살지 못하고 힘없이 삶에서 툭 떨어지는 어르신 한분 한분을 안타깝다 여기며 받아 안아줄 세상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 덧없는 질문이나 하던 나는 살구나무를 올려다보며 다만 한가지를 바라본다. 할머니가 저 살구나무 그늘 아래 자신이 살던 집에서 돌아가실 수 있기를. 가족이 없어도, 가기 싫다는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살구나무가 지켜보는 집에서 마지막 숨을 내쉴 수 있기를. 그 옆에 내가 한그루 살구나무처럼 함께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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