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6부)
1993년 김영삼 정권 때 부친 박종식을 독립유공자로 변신시킨 박지원은 15년 후 2008년 7월 31일 목포보훈지청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여 그해 9월부터 보훈연금을 받는다. 가소로운 일은 장남(長男)인 박창원 가족이 미국에 엄연히 있음에도 차남인 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 용납하기 어려운 일은 앞으로 우리 국민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다. 어찌 박지원뿐이랴. 지금 독립유공자 속에는 과거 ‘선량한 사람들을 인민재판을 하여 학살하고, 공산반란군에 합세하였으며, 인민군에 우리 젊은이들을 보내고,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자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른다. 과연 그들에게도 보훈연금을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여러분은 기탄없는 의견을 세상에 전해주어야 한다. 나라를 변화시키는 일은 국민 여론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5부)에 등장한 최여인은 영화배우였다. 그러나 그녀는 77년 별 다른 큰 말썽도 없이 스크린에서 사라졌는데, 그녀의 측근들에 의하면 “인기 있을 때 은퇴해야한다.”는 주변 어른들의 충고에 따라 라스베가스에서 꽃집을 경영하는 이모 초청으로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최씨의 어머니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가 서울에서 꽃꽂이 작가로 활동하였고,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하고 꽃집 경영을 바랬다고 한다. 그래서 라스베가스 이모 꽃가게에서 머물며 기술을 익힌 후 뉴욕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때 박지원을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박지원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가발 장사를 하고 있었으며 돈을 잘 번 젊은 사업가로, 한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최여인의 진정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자. (심하게 틀린 맞춤법 띄어쓰기는 조금 수정)
“저는 힘이 연약한 홀로 사는 한 여성입니다. 단지 평범한 여자가 되지 못하고 세상에 제 이름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이글을 진작 올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유명 연예인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1977년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N.Y. 한인회 회장이었던 박지원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1978년경) 그분과 동거를 하면서 저희는 양가 가족들의 후원 받으면서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그분은 저를 사랑했습니다. 한데 몇 년이 흐른 후 그에겐 가정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부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저는 헤어질 것을 결심한 후 다른 사람과 선을 보도록 권유를 받고 선을 봤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박지원씨는 사람을 시켜 청부 살인을 하려고 계획하고 어느 날 9시경 내가 경영하는 스타꽃집에 괴한 최모씨가 들어왔습니다. 살인 청부업자인 최모씨는 가게 문을 걸게 만든 후 총을 들이 대며 죽인다고 말하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차라리 나를 먼저 죽이고 딸을 데려 가라’고 최씨에게 애원하며 호소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니까 엄마의 호소에 최씨는 우리 모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엄마의 모습에 감동되어 저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후 그 청부 업자는 또 다시 박지원 부인의 부탁을 받고 저를 또 다시 처치해야 되는 처지가 되어 (2천불) 저의 가게로 왔으나 그때도 제 약한 처지를 깊이 알고 동정을 하게 되어서 오히려 우리 모녀를 보호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지만 저는 늘 불안 속에서 공포에 질려서 박지원 씨의 노예 마냥 끌려가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85년 말 한국에서 영화 출연교섭이 와서 저는 그와 헤어질 수 있는 기회라고 한국에 나와 삼촌 집에 거처하고 그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박지원은 자신이 꿈꾸던 정치의 길이 보이자 나를 과감히 버리고 그 길을 택하려고 저가 급히 하던 모든 작품을 중단시키고 미국으로 들어가서 뉴욕서 멀리 떨어진 서부 쪽으로 이사를 보냈습니다.
저를 설득해서 아무런 위자료 없이 헤어지지 않은 것처럼 위장해 저를 동부 쪽에서 서부로 쫓아냈습니다. 못난 저는 매일 매일 찾아줄 것을 기다리며 차 사고를 내는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그를 기다렸지만 매정하게 버림을 받고 저는 세월이 흘러 88년경에 N.Y.에 다시 가서 까페를 경영했는데 그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 후 박지원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간 탓인지, 아니면 사랑의 힘에 노예가 되었던지 최여인은 박지원과 다시 만나며 서울 친척집에 머물고 있었으나, 결국 박지원의 배신에 치를 떨고 있었다. 1996년 4월, 국회의원 총선 전 때의 일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불러내어 자동차 안에서 반 강제적으로 CAR SEX를 당한 후 “박지원이 같은 인물이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매몰진 마음으로 진정서를 써서 선거 때 뿌렸다고 전해진다.
박지원은 선거에서 낙선 한 후 정신병자같이 행동했다 한다. 최여인을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 다녀, 이에 생명의 위험을 느낀 최여인은 다시 미국으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토대로 본 박지원은 참으로 집요한 인물이면서, 참으로 비인간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을 보이는 인물이다. 결국 그는 96년 부천 소사지역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하였지만, 12년 후 지난 총선에서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이제 목포시민들은 박지원에 대한 진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박지원이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속여 왔는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목포시민들이 박지원을 국회의원으로 인정하든 아니 하든, 또 다시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그 결과를 따지지 않는다. 다만 필자(筆者) 역시 목포에서 무려 8년을 교직에 몸담고 살았고, 지금도 제자들부터 친척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아줬으면 한다. 목포 지역에 나와 같은 목소리를 지닌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amistat@paran.com
* (보정) 3부에 쓴 박지원의 사면복권은 2008년 1월1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 후 노무현이 대통령직을 마무리 할 무렵 일제히 이루어졌음을 바로 알려드립니다. 이 사면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게 후일 정치적 부담을 안기고, 대북송금을 담당한 임동원 박지원 등을 풀어준 결과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에 ‘친북자들의 발호’라는 대못을 박아놓은 결과를 낳았다 할 것이다.
다음 7부는 박지원이 권력을 이용하여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을 탄압하였는지, 그 사실을 종합해 봅니다.
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5부)
오늘로 5부를 쓰면서, 필자(筆者)는 박지원을 알리는 일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필부(匹夫)로 살아가는 이 땅에서 그래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판가름 하고자 하는 자그마한 소명 의식이었다.
국민의 심부름꾼이 되고자 출마한 사람 중에서, 더 훌륭하고 더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느냐는 문제는 국민의 책임과 의무와 권리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정확한 정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박지원에 대한 사실자료는 국민들의 책임과 의무와 권리를 돕는 일임이 분명하였다.
박지원이 그토록 숨기고자 하는 부친과 숙부와 고모의 좌익 행적은 감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바르게 알려야 했다. 그리고 국민들의 심판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호적을 고치면서 국민을 속이고 있었다. 어떻게 호적이 진도향토문화전자대전의 내용과 이렇게도 다를 수 있는가. 세상은 큰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호적에도 향토문화전자대전에도 큰아버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이 진도향토문화전자대전은 박지원의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발간연대가 그 이후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호적은 고쳤어도, 공인된 기록만큼은 고칠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공인된 기록 역시 큰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짐으로 해서 더 큰 의문을 남긴다.
공인(公人)임에 불구하고, 박지원이 이토록 사실을 감추기에 누군가는 박지원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믿는다. 이승을 하직한 손충무 선생 역시 그러하였고, 필자(筆者) 역시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주저가 있을 수 없다. 국민에게 올바른 사실을 알리는 것은, 우리가 올바른 자를 국민의 대표로 뽑아야 함에 있어 국민의 책임과 의무와 권리를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가족의 붉은 이력을 숨기고자 호적을 변형시킨, 쉽게 말하면 주민등록법을 어긴 범법자이다. 또한 박지원은 대북불법 송금으로 실형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거기에 현대로부터 150억을 받은 일은 비록 정몽헌의 죽음으로 덮어졌다 하나 아직 끝난 사건이 아니다. 정몽헌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은 그들로부터 돈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익치나 김영완이 살아있음으로, 다시 재심에 들어가야 한다.
박지원은 이 모든 범법 사실에다 인간적인 추잡함을 하나 더 더한다. 그는 이성 문제에 있어서도 바른 인간형은 아니었다. 추잡함을 더해 살해 협박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지원을 전문으로 추적한 손충무 국제저널리스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남겼다.
어디 그 분이 제공한 1996년 4월 10일 부천신문에 보도된 증언기사를 보자.
“증언에 따르면 박 대변인(박지원 당시 민주당 대변인)은 77년부터 미국에서 동거하던 최씨와 85년 말경에 헤어 졌다가 88년 국회의원 도전에 실패로 돌아간 후 다시 가끔 만났지만 89년 박 대변인이 한국으로 완전 귀국함에 따라 완전히 헤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대변인은 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최씨가 한국에 온 것을 알고는 최씨가 살던 서울 송파구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단지의 한적한 곳에 소나타 승용차를 대놓고 최씨를 불러낸 뒤 운전기사를 차 밖으로 나가게 하고 차 뒤 좌석에서 최씨를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가 나간 것은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무렵이었다. 당시 부천 소사 지역에서 출마한 박지원은 이 보도 때문이었는지 선거 중반까지 우세했던 판세가 뒤집어져 선거에서 낙마한다. 당시 언론들은 “박지원 후보가 낙선된 것은 불법 유인물과 불법 유인물을 보도한 언론 때문인 것 같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러나 누구나 사랑을 할지라도 그 사랑이 아름다운 것인가, 아니면 추한 것인가는 스스로의 노력에 달린 일이다. 사랑의 끝은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로 마감된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을 끊임없이 마련해주고, 그 행복을 더 큰 행복으로 가꾸어 주되, 초라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괴로움이 있더라도 결코 그 사람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박지원은 행복은커녕, 청부 살해까지 시도한 것으로, 최여인은 증언하고 있다.
이는 살인교사죄에 해당하는 일이다. 박지원에겐 이렇게 부친과 본인의 친북행위에 이어 불법대북송금과 150억 수수설, 이어 성폭행과 살인교사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이다. 천안함 폭침사건 때 생존 장병들 중 부상 장병들에게 던진 ‘부상자로 위장하기 위해 붕대감고 나왔다’는 희대의 폭언이 생생한 지금이다. 더 나아가 국제적 망신을 당한 일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평화의 훼방꾼으로 말하였던 그는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 북의 잔인성을 지적하지 않고, 다시 북한이 상투적으로 말하는 평화를 입에 담고 있었다.
위의 사실은 최여인이 쓴 진정서에 기록된 일들이다. 그런데 부천신문 취재팀에게 증언을 해준 최씨의 친척은 최여인이 쓴 진정서 가운데 중요한 몇 부분을 빠뜨리고 증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손충무 국제저널리스트는 말하고 있다.
다음 6부는 최여인이 쓴 진정서 일부다. 박지원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확한 판단 준거를 제공해 줄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과연 박지원이라는 사람이 야당 원내 대표를 할 만한 인물인가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는 데, 작으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amistat@paran.com
<참고>
김대중 정권의 핵심 요직을 차지하면서 나라를 수렁으로 몰고 간 박지원은 민주당 정풍파와 쇄신파들에 의해 “영원히 정계은퇴를 시켜야 할 기피 인물”로 지목 되었다. 권노갑 박지원 김홍일씨 등이 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 3명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정계 은퇴를 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김대중은 적극 감싸고 돌았다. 그러나 민주당 당원들뿐만 아니라, 야당(한나라당)의 표적 기피인물 제1호로 낙인찍혀 있는데다 자칫하면 민주당이 공중분해 될 수도 있다는 절박한 현실에 눈을 뜬 DJ는 박지원의 사표를 수리한다.
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4부)
원래 이 4부에는 박지원의 추잡한 사생활, 즉 그가 권력을 이용하여 어떤 여성편력을 했는가를 담으려 했으나, 아직 당부할 말이 많아 그 일은 다음으로 미루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부디 이 글을 읽고 개심(改心)하여 우장춘 박사를 닮기 바라는 마음뿐이다.
박지원과 우장춘은 2 가지 면에서 닮은꼴이지만 한 가지 다른 면을 보인다. 첫째는 그들의 부친이 모두 대한민국 역사의 죄인이라는 점 둘째는 그로 인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장춘과 박지원의 삶의 끝은 서로 다른 결론을 지닌다. 우장춘은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삶을 살았고, 박지원은 아버지의 죄를 이어 더 많은 죄를 쌓고 있다는 점이다.
을미사변에 일본 낭인들의 명성황후 시해라는 역사적인 죄업에 동조한 우범선은 우장춘의 아버지였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사카이 나카(酒井仲)라는 일본 여성 사이에서 1898년 우장춘이 태어났다. 그러나 우범선은 우장춘이 5살 때 암살을 당하고, 그가 죽은 후 어머니 혼자 꾸리는 살림은 극도로 궁핍하여 한때 우장춘은 고아원 생활을 했다. 이런 지독한 가난은 우장춘이 장성하기까지 계속되었다.
박지원의 아버지 박종식은 목포상고 출신으로 당시 목포에서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한 독립유공자라 하나, 뿌리 깊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진도 출신으로 여순반란사건 가담하여 반란군과 함께 활동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진도로 들어왔다가 경찰에 의해 사살 당한다. 당시 여순반란사건은 그 궁극적인 목적이 대한민국에 있지 않고 인민공화국 수립과 남한의 공산화에 있었다.
이를 위해 박종식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국군과 경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붉은 역적이었다. 박종식 사후(死後) 6.25를 지나면서 박지원 일가는 완벽한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힌다. 그리하여 박지원과 그 형제들은 연좌제에 걸려 어려운 생활을 하였고, 마침내 좌익들이 그토록 저주하던 미국으로 건너간다.
우장춘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진실의 삶을 산다. 그의 좌우명은 '밟혀도 꽃을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처럼‘이었다. 이렇게 우장춘은 자신에게 가해진 현실의 질곡을 자신을 담금질하는 계기로 승화시켰다. 그 결과 이루어낸 것이 다윈의 진화론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였다는 '종(種)의 합성(合成)' 이론이다. 이렇게 ‘씨 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우장춘은 세계 유전학계에 그 이름을 아로새기게 되었다.
박지원은 역설적으로 좌익들과 그의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던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한다. 가발회사에 취직 뉴욕지사로 건너가 근무하다가 그보다 먼저 미국으로 이민하여, 자리를 잡은 형의 도움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가발 도매상을 했다. 사업에 성공한 그는 항상 권력지향적인 처세를 하였으며 “어떤 놈이든지 나에게 금배지(국회의원)만 달아주면 거시기도 **줄 수 있다” 는 유명한 말을 하고 다닌 인물이다. 서울에서 온 정치인들을 만나면 용돈을 주고 룸살롱에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시게 만들고, 향응을 베풀었다는 처세술은 뉴욕 바닥에 일찍이 소문나 있었다.(손충무 국제저널리스트의 글에서)
우장춘은 1950년, 6.25 전쟁으로 가난과 슬픔이 극심하던 시절, 조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온다. 실로 조국의 부름에 화답한 아름다운 귀국은 작은 인간에서 위대한 위인(偉人)으로 가는 길이었다. 우장춘은 비록 한국말을 못했지만, 한국인이라는 의식은 뚜렷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지낸 50여 년 동안 한국식 성명(姓名)을 고집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출세와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 일본을 떠나 가족과 생이별을 하면서까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돌아온 우장춘. 그는 마침내 전쟁으로, 가난으로 피폐해진 이 나라 농업을 일으켜 세운다.
박지원 역시 1990년 대 초 귀국한다. 그러나 그가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 많은 붉은 호적을 고치는 일이었다. 이미 2부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조작된 호적은 부친과 숙부, 고모에 대한 빨갱이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공산반란군에서 독립유공자로 변신시켰으며, 이제는 자랑스럽게 대(代)를 이어 친북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우장춘과 박지원은 이렇게 그 결론이 다른 것이다. 우장춘은 아버지의 죄를 씻기 위해 평생을 이 나라 농업발전에 몸을 바쳤고, 박지원은 아버지의 죄를 숨기고자 호적을 고쳤으며, 아무런 속죄 없이 좌파 정당의 원내대표로 있다. 그리고 대북송금으로 상징되는 대북퍼주기와 천안함 폭침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 보인 친북 발언처럼, 그는 변함없이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활동을 꾸준히 자행하고 있다.
오늘날 우장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은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그 진솔한 자세였을 것이다. 조국을 위한 헌신으로 죄를 갚고자 한 그 마음. 이와 같은 이가 우장춘 박사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친일문학가 파인 김동환(‘국경의 밤’을 쓴 시인)의 아들 김영식 선생도 있다. 그는 경찰총경으로 있으면서 아버지 파인 김동환 총서를 발간한다. 그는 총서에 아버지가 쓴 친일문학을 고스란히 담는다. 그리고 대한민국과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심지어 그는 친일청산 작업을 하는 민족연구소에 성금을 기탁하고 있다.
박지원을 보면서 우장춘 박사와 김영식 선생을 생각한다. 두 분이 우리 민족에게 보낸 용기 있는 반성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화해의 몸짓이라 믿는다. 진정 민족의 자랑일 것이다. 반면 부친의 죄를 대(代)를 이어 연장하고 있는 박지원. 그는 우장춘처럼 조국과 민족을 위한 봉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과 권력과 이념을 지향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야당 원내대표가 되어 친북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자의 행동이 묵과되고, 심지어 보훈연금까지 받는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가 아닐까 싶다.
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amistat@paran.com
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2부)
필자(筆者)가 1992년 2월 20일 새로 주민등록을 하면서 고쳤다는 박지원의 죄 많은 호적을 얻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지원이 필자(筆者)를 고소한 과정에서 자료로 제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필자(筆者)를 괴롭히기 위해 고소한 것이 오히려 득이 된 셈이다. 지금은 이 사실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박지원의 호적쯤은 파악하고 있으나, 일반의 국민들은 그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
그리하여 이 문제에 대해 어느 변호사님과 상의한 결과, 공인(公人)에 대한 사실을 알리는 것은 공익(公益)에 해당하므로 명예훼손과는 관계가 없다는 답을 얻었다. 그리고 공인은 개인의 명예가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공인에 대한 사회적인 의혹은 스스로 해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그 좌익 행적만큼이나 미스테리 속에 사는 인물이다. 왜 그가 그토록 북한 김정일에 호의적이며 친북적인가에 대한 의문만큼 그는 수많은 비밀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박지원은 그의 조부부터 불분명한 사람이다. 2003년 그 이전부터 인터넷상에서 회자되던 조부 박낙종 설은 지만원 박사의 해명으로 해소된 듯하나, 그러나 부추연(부정부패추방시민위원회)의 추적 보고에 의하면 박지원은 1992년 2월 20일 주민등록을 다시 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민등록을 다시 하였다 함은 기존의 호적을 고쳤다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그의 호적에 등장하는 조부는 박봉진(朴鳳振)이다. 증조부는 박성근(朴成根). 그런데 진도군 향토문화대사전을 보면 전혀 다른 인물이 나온다. 박지원의 고향 진도에서 펴낸 인물 사전에는 그의 조부가 박원배(朴元培)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향토문화대사전에는 박지원의 가족사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 박종식(박지원의 父)은 1910년 12월 20일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에서 박원배(朴元培)와 곽동순(郭東順)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창녕 조씨 조순덕과의 사이에서 박창원(재미실업가), 박경원, 박지원(현 민주당 원내대표) 등 3남 1녀를 두었다. 1948년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호적엔 박봉진(朴鳳振)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조모 곽동순은 향토문화대사전과 호적에 똑 같은 이름으로 실려 있다. 조모는 같고 조부는 전혀 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향토문화대사전에 소개된 대로 박지원의 부친 박종식은 남자 형제가 3, 여자 자매가 3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호적에는 박종식을 장남으로 둘째 박종극(鍾克), 3남 박용식(鎔殖), 4남 박종기(鍾琦,) 5남 박종윤(鍾允), 그리고 성심과 성금 두 자매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5남2녀, 완전히 진도향토대사전과는 다른 엉터리 호적인 것이다.
여기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인민군에 수많은 진도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보내다가 맞아죽었다는 삼촌과 고모는 누구인가? 진도향토대사전에는 박종식의 아우는 박종극 하나로 되어있다. 따라서 맞아죽었다는 삼촌은 고군면 부위원장이었다는 박종극일 것이고, 고모라는 여자는 바로 3녀로 되어있는 자매들이 호적에는 성심, 성금 두 명만 기재되어 있으므로, 사라진 그 여자가 바로 맞아죽었다는 그 고모가 아닐까 싶다.
덤으로 3남 박용식을 보면 이럴 수가 없다. 모두다 종(鍾)자 돌림인데, 이 3남만 용(鎔)자이다. 아마도 주민등록을 다시 고치면서, 鍾과 鎔 자가 비슷하므로 혼동해서 적은 것 같다. 이는 박지원이 주민등록 개정 때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어떻게 3남3녀가 5남2녀로 변할 것이며, 더구나 이름도 이처럼 엉터리일 것인가?
한편 부추연(부정부패추방시민위원회)의 주장에 따르면, “취재기자들이 확인한 바, 박지원 집안의 호적은 상당히 복잡하게 되어있었으며 삼촌과 큰 아버지 집안의 호적은 ‘멸실 우려 복제’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한동안 호적이 없어졌거나 분실되었다가 새로 제작한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 참고
대개 항렬자는 아비와 자식 간의 친함을 위하여, 즉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위하여 오행(금수목화토)이 들어간 한자를 상생(相生)의 순서로 돌린다.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이다. 이를 토대로 박지원의 집안의 항렬자를 추적해 보면, 박지원의 부(父) 박종식(朴鍾殖)과 박종극(朴鍾克) 등 형제들의 항렬자가 모두 ‘鍾’자인 바, 거기엔 ‘쇠 金’이 들어 있는 것이며, 박지원 형제는 ‘源’ 자 돌림이니 ‘물 水’가 들어있다. 따라서 금생수(金生水)의 원칙에 따라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박종식과 그의 아비는 토생금(土生金)이어야 한다.
따라서 조부의 이름엔 흙 토(土)가 들어있는 한자를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적의 박봉진(朴鳳振)이 아니라, 향토문화대사전에 있는 박원배(朴元培)의 ‘培’자 돌림이 맞다고 할 것이다. 고로 박지원의 조부 이름은 박봉진이 아니라 박원배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筆者), 정재학은 항상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살아왔다. 나는 전교조와 싸워온 9년 동안 한번도 신분과 이름을 속인 적이 없다. 그러나 박지원은 국회의원이라는 공인으로서 당당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의 조부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직접 해명했어야 했다. 그러지 아니하고 국민이 뽑아주고, 스스로 국민을 위하여 산다는 자가 해명(解明)은커녕 비겁하게 고소로 대응해 왔다. 공인의 명예훼손이란 있을 수 없다. 벌금 300만원 내라는 남부지법 검판사들도 웃기지만, 자기 집안의 의혹 하나 해명하지 않고 있는 박지원은 다만 비겁한 자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데일리안 편집위원, 국제언론인 포럼의 편집국장이라는 신분으로서 박지원 의원에게 당당함을 요구한다. 모쪼록 이 엉터리 호적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를 바란다.
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amistat@paran.com
다음 박지원의 대북송금 활동입니다. 3부를 기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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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1부)
박지원은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내년에는 7십8만1천원의 유족연금을 받는다. 또한 그는 국가로부터 모든 병 치료에 대해 무료로 지원을 받는 등 약 17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는다. 이 혜택은 박지원의 자식 대까지 연장되는 한편, 심지어 박지원의 자식은 직장 갖기 어려운 이때에 취업에 관한 혜택(5%가산점)까지 받는다.
그러나 김영삼 시절 건국포장을 받은 박지원의 아버지 박종식은 공산주의자였다. 단순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한, 공산반란군이었다.
◇ 박지원의 부친 박종식(1910년생)은 전남 진도 사람이다. 전남 목포 공립 상업학교(김대중 대통령이 다닌 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생 시위 항쟁이 벌어져 수십명이 피검되었다는(체포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최창호 등 동교 학생들과 수차 회합하고 목포에 동월 (11월 같은달) 19일을 기해 동조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재실이 ‘피 감금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쓴 붉은 목면 대기(큰 깃발) 3개와 붉은 색종이로 된 소기(적은 깃발) 약 120여 개를 만들어 배부하고 정진규 등이 등사판으로 격문 약 1,500매를 인쇄하여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시위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19일 아침 이들은 정명 여학교 앞에 집결, 일제히 소기를 흔들고 격문을 살포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 학생을 탈환하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운동으로 그는 다른 주동학생 21명과 함께 피체되어(체포되어) 1930년 3월 20일 광주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에, 1993년 김영삼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그는 45년까지 일본 통치 시절, 일본인들에 의해 고향인 진도군 군내면과 고군면에서 목화 수매 책임자로 있었다.
◇ 1945년 해방 후 박종식은 남로당(공산당) 진도 지역 책임자가 되었고 숙부 박종극(朴鍾克)은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 위원장이 되었음.
◇ 박종식은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하여 반란군으로 있다가 반란군이 진압되자 지리산에서 도망쳐 진도로 돌아와 숨어있다, 1948년 10월 23일 경찰에 수배되어 도피 중 진도 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형사 등에 의해 총격전 끝에 사살됨.(1976년 2월 25일 진도군이 발행한 진도 군지(郡誌)에 기록되어 있으며 곽순배 형사의 친척이 되는 곽우불 진도 번영회 회장 증언)
◇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진도군에 북한 인민군이 진주했으며, 이때 박지원의 삼촌, 고모 등이 북한 인민군 편에 나서 면민들을 가혹하게 북한 의용군에 징용되도록 만들어 주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그러다가 9.28 수복 후 북한이 패전 인민군이 도망가자 박지원의 삼촌 고모도 인민군과 함께 도주하다가 주민들에게 붙잡혀 돌과 몽둥이로 맞아 죽음.(진도군 무공 수훈자 회장 최기남씨 증언)
◇ 이런 모든 사실을 숨기기 위해 호적등 관계 서류를 파기, 변조하고 1992년 2월 20일자에 호적을 다시 만들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발부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음.
한편 ‘박지원에 대한 재미 한인교포의 증언’ 유인물 3페이지 5번째 제목에는‘박지원 아버지(박종식)의 좌익(공산당)활동’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아래와 같은 스토리가 폭로되어 있다.
(가) 지방 유격대장으로 우리 경찰(한국 경찰)을 무수히 죽임. (나) 지리산 피아골 함락 이후 목포 신안으로 피신, 마지막까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름. (다) 박종식은 DJ(김대중)와 목포상고 동문. (라) 1993년 8.15 행사때 박종식은 김영삼대통령으로부터 건국포장을 받고 애국자로 둔갑함.(포장증. 제 1552호, 당시 총무처 장관 최창윤) 국가 보훈처는 지난 93년~94년에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 11권 125페이지에 박종식 씨에게 건국 포장을 주게 된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해 밝혀 놓았다.
(마) 공산당과 빨치산 활동을 하며 무수한 시민들을 죽인 반역자가 갑자기 어느날 애국지사로 둔갑, 건국포장이라는 국민훈장을 받자 애국자 가족들과 단체들은 상당히 흥분했다. 그래서 한국논단 96년 3월호에서는 “사살된 공비에게도 건국포장을 수여하느냐?”라며 문민정부를 비판하는 특집기사가 발표됐다.( 손충무 국제저널리스트의 글에서)
이러한 인물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는 일이 생긴 것이다. 공산반란군으로 군경과 싸우다 대한민국 경찰에 사살당한 인물이 애국자가 돼 훈장을 받고, 그의 자식(박지원)과 심짇어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보훈혜택을 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될 수 없는 일이다.
박지원은 친북인사로 자타가 인정하는 북한 인민공화국 후원자이다. 그는 바른사회시민회의는 26일 ‘2011년에는 자중해달라’는 당부의 뜻을 담아 ‘올해의 다물어야 할 입’으로 박지원을 선정하였다.
심지어 박지원은 “중국 시진핑 부주석이 지난해 5월 김대중 전 통령을 만났을 때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평화 훼방꾼 노릇을 하는가’라고 말했다”고 말했으나 곧 중국 외교부가 이를 공식 부인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바 있다. 이와 함께 박지원은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도 ‘보수층과 군 당국 등이 북한 소행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북한을 옹호, 국민들로부터 빨갱이라는 조롱과 질타를 받고 있다.
일제시대, 공산주의의 해악을 모를 때, 공산주의도 민족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하던 시절의 사상운동은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반군과 합세하여 인민재판을 벌이고 죽창을 휘둘러대던 자까지, 군경을 향해 총을 쏘며 살상을 하던 자까지 용서를 넘어 심지어 박지원 아버지처럼 독립유공자가 되고 손자 대까지 연금을 주어야 하느냐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연금은 우리의 세금으로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민의 동의 없이는 단 한 푼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박지원이 과연 보훈연금을 받아야 하느냐는 사실을 놓고, 이제 우리 국민들은 허심탄회하게 각자의 의견을 밝혀야 한다. 그리하여 그 결론을 분명하게 맺어야만이 대한민국은 올바르게 서게 될 것이다.
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amistat@paran.com
2부는 박지원의 호적을 분석해 봅니다. 1992년 2월20일 고쳤다는 호적의 실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박지원이 보훈연금을 받는다? (3부)
사람이 남에게 당당하려면, 그 자신부터 맑고 건강해야 한다. 그러나 박지원은 그렇지 않다. 남에게 당당할 수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먼저 누구나 아는 팩트(fact) 하나를 제시해 보자.
- 김대중은 북한 김정일과 만나기 위해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장관에게 거액의 돈을 주어 2000년 3월 싱가포르에서 북한 아태위원회위원장 겸 당비서 김용순의 특별보좌관 두 명을 만났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고 파리에서 발행되는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INTERNATIONAL HERALD TRIBUNE) 신문이 지난 2003년 1월 31일자에서 한 페이지 분량에 걸쳐 보도했다.
인터내쇼날 헤럴드트리뷴 지는 지사를 통해 “박지원씨가 싱가포르에 간 것은 김정일이 싱가포르에 개설해 놓은 해외 은행구좌에 막대한 돈을 예치시키기 위한 여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 보도했다. -
이렇게 박지원은 김대중의 지시에 따라 대북송금을 담당한다. 그리고 정상회담을 위해 보낸 대북송금은 모두 8억달러로 집약된다. 그러나 당시 김정일과 그 측근은 5억 달러(이중 5천만달러는 현물)밖에 송금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정보기관은 8억달러를 보낸 증거를 잡고 있어 약 3억 달러는 배달사고가 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후일 김정일도 이에 대한 수사를 지시함. 따라서 이에 대한 진실은 김정일과 박지원, 당시 국정원장 임동원, 김대중의 금고지기 권노갑이 알고 있을 것이다.)
정몽헌은 이들에 의해 온갖 독촉과 협박을 당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무리 현대라는 대기업이지만 5억달러면 약 7000억에 이른다. 당시는 IMF시대 궁핍함이 기업을 누르고 있을 때였다. 그 뒤로도 수없이 손을 내미는 불법대북송금의 무리함과 사기꾼들의 ‘중간에 가로채기’ 수법에 걸려 정몽헌은 자금 동원의 압박감에 시달리고 검찰이 수사를 좁혀오자 자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대북불법송금에 대해 거짓말로 일관한다. 박지원은 2003년 6월 17일 영장실질심사에서 최모 판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북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5월경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이 김대통령에게 ‘현대가 경제협력 대가로 북한에 5억 달러를 주기로 약정했다.’는 보고를 할 때 알았다,”고 진술하였다. 기존의 몰랐다는 주장을 번복한 것이다.
이에 최판사는 “피고인의 진술은 여러 가지로 납득할 수 없는 거짓말이 많아 증거를 인멸하고 도주할 우려가 있어 구속수사를 명한다.”고 말하였다.
노무현 정권 시절, 2003년 6월 16일 특검은 김대중의 비서실장이자 정권 최고 실세였던 박지원을 자진출두 형식으로 특검 수사본부에 연행하여 밤을 새며 조사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17일 박지원을 긴급체포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박지원을 긴급체포한 특검은 6월 18일 구속영장을 신청하면서 “2000년 6월 현대 계열사에 대한 산업은행의 대출과정에서 외압을 행사한 혐의와 함께 현대건설이 2000년 4-5월경 1백50억 원의 비자금을 만들어 자료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1억원 권 양도성 예금증서(CD) 150장으로 바꾸어 박지원에게 전달하면서 금강산에 카지노와 면세점 허가를 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지원 피고는 ‘꼭 성사되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수수 및 직권남용을 한 혐의가 있다고 영장 청구 이유를 밝혔다.
박지원은 국정 감사장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 측에 단돈 1달러도 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늘 아래 거짓말 하면 김대중이지만 박지원도 만만치 않으리라. 결국 박지원은 실형을 살다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특사로 풀려난다. 지금 박지원이 이명박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좌익의 핏줄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머리 검은 짐승은 도와주지 말라’고 했던가. 참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인간의 전형을 이룬다 하겠다.
* 참고
당시 김정일에게 보낸 현물 5000만 달러 속에는 김정일이 요구한 생활필수품과 사치품이 있었다. 그리고 김정일에게 먹일 비아그라도 있었다. 2000년 당시 비아그라는 세계적인 관심 품목이었다. 따라서 죽어가는 노인의 물건도 세운다는 비아그라를 김정일은 먹었을 것이고, 주위에 널려있는 기쁨조를 탐닉했을 것이다. 그 결과 너무 색을 밝히다 김정일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 아닌가 하고 필자(筆者)는 생각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 이 일을 주관한 임동원 전(前) 국정원장에겐 김정일의 생명을 단축한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푸하하하하... 이제 북한 공작원들이 임동원을 처치하려고 눈에 불을 켤 것이다.
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amistat@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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