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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 체험수기 공모 입선] 암과의 동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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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 체험수기 공모 입선] 암과의 동행

Ador38 2012. 9. 23. 13:46

제목 [서울아산병원 체험수기 공모 입선] 암과의 동행
필자 이정희
등록일 2009-08-17 최종 수정일 2009-08-17

2004년 8월, 우연히 거울 앞에서 기지개를 켜다가 왼쪽 겨드랑이에 망울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육안으로 보기엔 작은 뾰루지 같기도 하고, 크기는 새끼손톱 반 정도인 0.5mm 정도인 것이 손으로 만져보니 제법 딱딱했다. 그 무렵 골프 실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퇴근 후 2시간씩 연습장에 드나든 것이 무리였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며칠을 보냈다.

마침 유학중인 막내아들이 귀국해 건강검진을 받았고, 검진결과가 나오는 날 함께 결과를 보러 홍내과병원 홍기석 박사님께 들린김에 왼쪽 겨드랑이의 망울을 보여드렸다. 홍 박사님께서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정밀 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S병원에 소개장을 써 주셨다.

 

찜찜한 기분을 날려버려야겠다 싶어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검사결과 위암 4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청천벽력….

위암 4기라는 검사결과를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멍멍하여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어떤 사고도 멈춰버린 상태. 그저 다리의 후들거림과 심장의 빠른 박동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듯했다. 건강만큼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하였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 흔한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양주 한 병을 마셔도 다음날 거뜬할 정도의 체력이었는데…. 내 나이 쉰아홉. 주주총회에서 사장으로 선임된 지 9일만의 일이다.

 

겨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을 차린 뒤 우선 의사선생님께 나의 잔여 수명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선생님께선 항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통계학적으로는 10개월 정도란다. 그 순간 서있을 힘조차 없이 다리가 풀렸다. 10개월이라는 기간이 마치 사형선고마냥 내 가슴을 후비고 내 몸을 흔든다. 더 이상 말문을 잊지 못하고 그저 긴 한숨만 내 쉴 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이 고통을 제발 가족과 함께 나누는 시련만은 주지 말았으면…. 집으로 돌아와 목욕탕에서 아무도 모르게 대성통곡을 한 후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차피 한 번은 떠나야만 할 길이 아니던가. 그래, 남보다 조금 일찍 떠날 뿐이라고 생각하자.

 

용기를 내어 가족들에게 사실을 얘기했다.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심정으로 혀속에서 맴도는 말을 뱉어내며, 애써 태연한척 힘을 썼다. 그나마 아내와 아이들한텐 얘기할 수 있었지만, 장손으로서 집안의 큰 행사인 추석을 앞두고 어머님과 여동생, 친척들에겐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우선, 추석 성묘를 아무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다녀온 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검을 해보기로 하고 아산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위암 4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현대의학이 얄미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채 10개월도 안될 수 있다.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지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일단 납골당부터 마련해둬야지.

내가 떠난 뒤 남은 식구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집과 가까운 성남에 납골당을 마련하고 나니 불현듯 영정사진 생각이 떠올랐다.


장례식장에서 가끔 영정사진이 준비돼 있지 않은 경우를 뵈온 터라 행여 영정사진 때문에 훗날 가족들이 힘들까봐 미리 준비해 두자라는 마음으로 홀로 사진 찍을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처음에 들른 곳은 영정사진 한 장 가격이 무려 30만원.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동네 사진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영정사진 찍으러 왔습니다”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담담히 사진촬영에 임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사진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집 앞에 있는 곳인데도 사진 찾기가 어찌 그리 싫던지…. 결국 영정사진은 한 달여 만에 찾았다.

 

그 후 본격적인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사람은 죽는 것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순간이 아마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고통을 받아들일 테니 시간을 더 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퇴직 후 아내에게 용돈 얻어 쓰며 잔소리 듣는 게 싫어 남몰래 준비한 거금도 큰 딸에게 인계했다. 적지 않은 부동산을 어떻게 상속할 것인가도 큰 딸에게 부탁했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눈물을 쏟으면서도 아버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이를 악물고 얘기를 듣는 큰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당시 아내는 눈만 마주치면 눈물을 쏟던 터라 거의 대화가 되지 않아 큰 짐을 큰딸에게 지어준 듯하다.

그리고 나서 곧 치료가 시작되었다. 암이 겨드랑이까지 전이된 상태로 이미 수술은 늦은 상태라 화학요법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한번 시작하면 최소한 4개월 이상 소요되는 치료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여지없이 파괴하였다.

털이란 털은 거의 다 빠지고 먹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다. 차라리 빨리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주사를 5시간씩 맞고 2주간 약을 먹다보면 입안이 죄다 헐고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 처음 3,4일은 꾸역꾸역 넘길 수 있었는데 4,5일이 지나면 아예 밥을 넘기지조차 못하게 된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았다. 체력보충을 위해 장어 엑기스를 마시고 버텼더니 체중도 많이 빠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고싶은 마음에 한 번은 수백만원 하는 고가의 약을 미국에서 공수해 맞은 적도 있다. 치료를 위해 사표를 내려 했지만 회장님의 배려로 사표가 반려되어 회사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일과 치료를 병행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회장님은 집에서 쉬다보면 암에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으니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회사에 다니면서 치료할 것을 종용하신 터다. 회장님의 배려가 마음으로 전해져 이를 악물고 치료와 출근을 병행했다.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하루 평균 4시간은 일을 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벌써 2008년. 4년여 동안 다섯 차례나 약을 바꾸어가며 지금도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잔여 수명 10개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난 4년 5개월째 살고 있으며,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수 없기 때문에 고군분투중이다. 어떤 환자들에겐 한 번도 힘들어 중도 포기한다는 항암 요법을 다섯 차례나 단 한 번의 연기도 없이 견디게 해 준 강철같은 체력도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백혈구와 적혈구 수치가 떨어지면 치료를 쉬어야 하지만 아직까진 체력이 버텨주고 있다. 내 몸이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발버둥쳐가며 나를 지지해 준다.

‘그래 하는 데까지 하자.’

이제 치료와 치료사이 기간이 나에게는 오직 삶의 보람일 뿐이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며 숨을 쉬는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이 소중하다.

앞만 바라보며 달려온 나에게는 자연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조차도 거의 없었다. 어느날인가 한강변을 바라보니 그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좀 더 살고 싶다. 서울 강남에서 분당옆 시골로 보금자리를 옮긴 것도 좀 더 살고픈 나의 욕망의 산물이었으리라…. 시골생활은 아침일찍 눈을 뜨면 밭에 나가 채소를 가꾸고 퇴근하면 나무를 자르고 옮기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지금도 나의 몸 어딘가에는 암이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기느냐? 암이 이기느냐?’의 지루하고 치열한 싸움을 나는 지속하고 있다.

 

투병생활 중 처음부터 용기를 북돋워 주시고 치료를 전담해주신 강윤구 교수님. “항암치료 중 체력이 이렇게나 따라주는 환자는 본 적 없다”며 자상한 설명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김정혜 간호사님.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회장님. 그리고 가족들과 주위의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요즘은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가마솥에 밥을 해 먹으며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내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이유는 이젠 언제 어떻게 되더라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겠다. “구질구질하게 오래살기 보단 암이랑 같이 재미있게 살다가 언제든 오라면 간다~!”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이건 내겐 4년 5개월의 시간도 축복이자 기적이니까.

“암아! 제발 난동부리지 말고 얌전히 사이좋게 동행하자꾸나. 정 싫으면 어머님 임종하시는 날까지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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