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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七步詩 (일곱 걸음에 지은 시) - 조식(曹植) 조조의 3남 본문

🌱 Ador 사색. 도서.

☆ 七步詩 (일곱 걸음에 지은 시) - 조식(曹植) 조조의 3남

Ador38 2014. 11. 24. 09:56
Read: 5432, Vote: 89, Date: 2010/04/19 14:28:10

 

제 목 七步詩 (일곱 걸음에 지은 시) - 조식(曹植)
작성자 茶香
카테고리 중국 한시 작품

 

七步詩 (일곱 걸음에 지은 시)- 조식(曹植, 192~232)



煮豆持作羹 (자두지작갱) 콩 삶아서 국 만들고

漉豉以爲汁 (녹시이위즙) 메주 걸러서 장 만든다.

萁向釜下然 (기향부하연) 콩깍지는 솥 아래에서 타고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은 솥 안에서 흐느낀다.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거늘

上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서로 지지는 것이 어찌 그리 급한가?


<해 설>

동서양 고대사를 보면 공통점이 매우 많다. 특히 궁중 비사(秘事), 권력 암투, 황제나 왕들의 애정 행각, 온갖 박해를 딛고 승리한 자가 펼치는 처절한 복수 등의 스토리는 아주 흡사하다. 한마디로 왕조의 역사는 권력투쟁에 승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 권력 투쟁 때문에 국력이 고갈되어 급작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황제, 왕,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운명은 선악(善惡)과 생사(生死)를 같이 한다. 승리한 자는 바로 선(善)이요 삶을 뜻하고, 패한 자는 악(惡)이요 죽음을 뜻한다.

어쨌거나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어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이런 뛰어난 시를 지어낸 조식이야말로 대단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의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가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또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조비 대신 조식이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시 문학과 정치는 양립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권모술수, 모략, 눈치, 암투 같은 것들과 문학이 어울릴 수는 없지 않은가.

조조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이지만, 자식이 단명(短命)한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악행을 많이 한 모양이다. 큰아들 조앙은 전쟁터에서 잃고, 둘째 조비와 셋째 조식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흔 한 살에 세상을 떴으니, 아버지 대(代)에서 저지른 업보를 그 아들 대에서 받은 듯하다.

*조식(曹植, 192~232)은 중국 삼국시대(220~280) 위(魏)나라 시인으로 위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 155~220, 재위216~220)의 아들이다. 조조는 재기가 넘치는 조식을 사랑했지만, 절도가 없다는 점에서 실망하여 217년 둘째아들인 조비(曹丕, 186~226, 재위 220~226)를 후계자로 정했다. 맏아들 조앙(曹昻, ? ~197)은 일찍 전쟁터에서 죽었다.

조비가 위나라 황제로 즉위한 이래 조식은 늘 감시를 받고, 유폐생활을 하는 등 불우하게 지내다가 41세에 죽었다. 이 시는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의하면 조조의 뒤를 이은 문제(文帝) 조비가 동생 조식을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어내지 못하면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형제간의 갈등을 호소하고 있다.(출처 : 우리가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한시)

 

다향 작년 12월에 중국 허난성에서 조조(曹操)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굴되었다. 그는 도굴의 귀재답게 자신의 무덤이 도굴될 것을 우려하여 유언으로 72개의 가묘를 만들라고 지시하여 사후 1800여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진짜 무덤이 발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에 발굴된 무덤에서는 조조의 돌베개, 자신이 쓰던 창(戈)과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조조의 나이와 키,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한다. 조조는 생전에 천하제일의 도굴꾼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역대 호화분묘를 도굴하여 엄청난 양의 황금을 훔쳐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군비(軍費)로 썼다고 한다.
04/19
다향 이처럼 도굴로 마련한 막대한 군사자금이 있었기에 위, 촉, 오 삼국 중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될 수 있지 않았나 추측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아무튼 생전의 악행으로 위나라도 오래 가지 못하고 60년만에 진(晉)나라 사마염에게 나라를 빼앗겨 멸망하고, 자신의 두 아들조차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사람이 태어나 한평생을 살면서 악행은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지나간 역사에서 보듯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악행을 일삼다간 머지않아 반드시 재앙을 받게 되는 걸 보면 착하고 바르게, 나누면서 사는 것이 인생살이의 모범정답이 아닐까 한다. 그것이 후손을 위하는 가장 바람직한 행동이 될테니까..
04/19
운영자 명시에 명해설까지 좋은 배움의 시간을 마련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배려와 포용이 아쉬운 우리 주변의 모습도 돌아보게 되네요..
04/22
하늘빛 우리 인생사의단면과 동서고금의 행동의본 감사^^
01/05
평전 좋은글 읽고갑니다. 고맙습니다.
11/11
다향 중국 삼국시대(220~280)에 위(魏.220~265), 촉(蜀. 222~263), 오(吳.222~280) 삼국이 패권을 다퉜는데, 사마염은 265년에 위(魏)나라 원제(元帝)의 선양을 받아, 뤄양[洛陽]에 도읍을 정하여 진(晉.265~420)을 세우고, 마침내 280년에 오나라까지 복속합니다. 진나라는 천하통일을 이루었으나, 오래지 않아 북방 오랑캐의 침입으로 수도를 건강(建康)으로 옮기는데, 그 이전 시대를 서진(西晉.265~316)이라 하고, 그 이후 시대를 동진(東晉. 317~420)이라 합니다. 제가 쓴 댓글 중에 60년만에 진의 사마염에게 위나라가 멸망했다고 했는데 정확히 건국 후 45년 뒤인 265년에 위나라는 멸망(선양)하기에 바로잡습니다
04/23
표원갑 上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서로 지지는 것이 어찌 그리 급한가?
위上이 아니고 서로相이 아닐런지요?
07/03
다향 인터넷에 上煎何太急 (상전하태급),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병용해서 쓰는데, 이는 판본의 차이(실린 문헌에 따라 자구가 다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시이다 보니 많은 판본으로 전해지는데, 문헌에 따라<相 또는 上>으로 각기 다르게 실려 있답니다. 원문에는 '相'으로 되어 있네요. 제가 복사해서 올리다 보니 미처 확인을 못했습니다.^^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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