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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20. 세계 자동차 성장사 새로 쓴 현대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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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20. 세계 자동차 성장사 새로 쓴 현대차

Ador38 2014. 12. 11. 11:06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20. 세계 자동차 성장사 새로 쓴 현대차

기아차 초단기 정상화 발판 철강·금융 발 넓혀…그룹 출범 후 13년 만에 3배 성장


“현대차그룹 현대그룹에서 분리, 독자 노선을 걷다.” 2000년 9월 1일, 현대차그룹이 출범했다. 국내외 언론은 일제히 정몽구 회장의 자동차 전문 그룹 독립 경영 체제 소식을 전했다. 현대차와 기아차·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현대강관(현 현대하이스코)·현대우주항공 등 10개 회사가 현대그룹에서 분할해 나온 것이다.

 

6개월 전인 2000년 3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차남인 정몽구 회장과 5남 정몽헌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두고 다툰 ‘왕자의 난’이 분가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3월 27일 현대그룹 사장단들의 모임인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두 명의 공동 회장 중 정몽헌 회장을 단독 회장으로 승인하는 등 더 이상 그룹 내에 두 명이 함께 있을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했을 때 정몽구 회장의 독립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와 함께 정몽구 회장의 자동차 기업 경영에 대한 자신감도 이 같은 결정에 힘을 보탰을 것이다. 현대정공의 ‘갤로퍼 신화’에 이어 1년 10개월 만에 법정 관리에서 벗어난 기아차의 실적 호전은 정몽구 회장이 직접 현장에서 이뤄낸 성과였다.

2013년 말 기준으로 현대차그룹의 총자산은 181조 원이다. 재계 서열도 분리 당시 5위에서 삼성그룹(자산 331조 원)에 이어 2위(공기업 제외)로 뛰어올랐다. 국내 최대 규모이자 글로벌 5위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나면서 계열사들도 급성장했다. 현대모비스·현대위아·현대글로비스·현대제철 등 다양한 계열사를 통해 자동차 제조 수직 계열화를 구축,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분리 당시 10개였던 그룹 계열사 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무려 212개(2012년 기준)에 달한다.

1998년 10월 현대차에 인수된 기아차는 이듬해 바로 순이익 1357억 원의 흑자(1998년 순손실 949억 원)를 기록하며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 법정 관리 당시 5조2000억 원의 자본 잠식 상태에서 벗어나 2조2600억 원의 순자산을 기록했고 인수 전 810%를 웃돌던 부채비율은 정부 가이드라인 이하 수준인 172%까지 낮아졌다. 현대차가 기아차 인수 직후 그룹 내 자동차 부문의 경영을 일원화하고 플랫폼 통합, 부품 공용화, 상품 개발 기간 단축 등 구조조정에 힘쓴 결과였다.


기아차, 인수 이듬해 흑자 전환
기아차의 체질 개선을 진두지휘했던 정몽구 회장은 크레도스·아벨라·세피아·포텐샤 등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차들을 모조리 단종시켰다. 살아남은 차는 봉고·카니발·스포티지·프라이드 정도에 불과했다. ‘될 놈만 살리고’ 엔진을 비롯한 부품 경쟁력을 높이는 등 환골탈태 과정을 거친 기아차의 판매량은 상승세를 탔다.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법정 관리에서 벗어났다. 인수 후 15개월, 법정 관리 지정 후 22개월 만의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기아차는 법정 관리 기업이 조기에 경영 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법원 역사상 가장 초단기에 법정 관리를 졸업한 것이다.

현대차는 기아차를 인수한 이후 아시아차·기아차판매·아시아차판매·대전자동차를 합병했다. 아시아차가 생산했던 차종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차량은 독자 모델인 고급 대형 버스 그랜버드뿐이다. 세아베스틸의 전신인 기아특수강은 2003년 세아그룹에 매각됐다.

기아차가 현대차에 인수되며 주인이 바뀌었지만 기아차를 창업한 김철호 회장 일가는 여전히 자동차 업계에 몸담고 있다. 서진오토모티브·에코플라스틱·아이아 등을 거느린 SECO그룹이 대표적이다. 김 회장의 사위인 배창수는 김 회장으로부터 부품사를 물려받아 서울강업사를 차렸고 1972년에 군포로 이전하면서 서진산업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79년 서진산업 사장을 역임한 박인철(김철호 회장의 외손녀사위)이 설립한 리한(구 대기산업) 또한 김 회장의 증외손자인 박지훈 대표가 이끌고 있다. 김철호 회장의 친손자는 기아차의 전신인 삼천리자전거 김석환 대표다.



현대차도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기아차 인수 전 외환 위기와 함께 적자(1998년 순손실 332억 원, 순이익률 -0.4%)를 기록한 현대차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망퇴직과 명예퇴직 형식으로 약 1만 명의 인력을 구조조정했다. 기아차 인수 후엔 현대차써비스와 현대정공 자동차 부문을 합병했다. 현대차써비스의 중장비 영업 부문은 현대중공업에 양도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와의 합작과 결별
2000년 3월 ‘왕자의 난’을 거친 후 같은 해 9월 자동차 그룹으로 독립한 정몽구 회장은 사옥도 양재동으로 이전했다. 본격적인 양재동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2000년 11월 현대모비스가 정주영 명예회장이 보유한 나머지 현대차 지분 2.7%를 매입하며 현대차의 최대 주주로 부상했다. 현재의 순환 출자 형태가 완성된 것도 이때다.

계열 분리와 함께 현대차그룹은 다임러크라이슬러와 합작 계약을 했다. 현대차는 다임러크라이슬러에 2000년,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지분 10.5%를 매각하고 파트너십을 맺었다. 매각가는 4억8400만 유로였다. 단순히 지분만 넘긴 것이 아니라 현대차의 전주 상용차 공장을 50 대 50 합작 법인으로 전환하고 트럭 관련 기술을 다임러크라이슬러로부터 이전 받기로 했다. 대우자동차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을 때도 두 회사는 공동 인수하는 방식으로 입찰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 설립하기로 한 상용차 법인이 무기한 보류되고 다임러크라이슬러가 현대차와 상의 없이 베이징자동차와 승용차 합작 생산 계약을 체결하면서 둘 간의 파트너십은 최종 파기됐다. 일각에서는 두 회사의 제휴는 애초부터 동상이몽이었다고 지적한다.

현대차는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경영권 간섭을 막고 다임러 우산 아래에서 안정적인 운영을 원했지만 다임러는 아시아 시장을 확보하고 길게는 현대차 인수·합병(M&A)까지 넘본다는 차원에서 이뤄진 제휴였기 때문에 결국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2004년 8월 현대차 지분을 7억4000만유로(9억1200만 달러)에 블록 딜로 시장에 모두 매각했다.

이후 현대차그룹은 자동차 계열사를 중심으로 세를 불렸다. 다양한 업체들을 M&A하고 필요한 부문은 신설하며 그룹을 재편했다. 먼저 자동차 업체의 핵심인 자동차 부품 업체들의 재편이 이뤄졌다. 가장 핵심은 현대모비스다. 1999년 초 굳은 표정으로 회장실에 들어선 박정인 현대정공 사장은 당시 현대정공의 운명을 결정할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있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현대정공이 현대차그룹의 부품 공급을 책임지는 모듈 사업을 개시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정몽구 회장의 최종 승인을 받은 박 사장은 현대차와 기아차의 조립 라인을 이관 받아 그 사업을 시작했다. 현대정공은 1999년 철도차량 부문을 한국철도차량으로 양도하고 2000년 현대차와 기아차의 애프터서비스사업부를 인수하며 현대모비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5년 6월 현대모비스는 한국프랜지공업으로부터 브레이크 및 조향장치 전문 회사인 카스코(구 기아정기)도 인수했다.

현대차는 2005년 7월 현대전자에서 분사한 AVN (Audio, Video, Navigation) 중심의 전장 부품 업체 현대오토넷을 예금보험공사로부터 2371억 원에 인수했다. 현대차그룹은 2006년 2월 기아차에 AVN 부품을 납품하던 본텍도 인수해 현대오토넷과 합병했으며 2009년 5월 현대모비스가 현대오토넷을 다시 인수했다.

 

본텍은 2002년 현대모비스와 합병을 시도했지만 본텍 대주주인 정의선 부회장의 지분(30%)이 논란이 돼 무산됐고 현대오토넷 인수 전에 독일 지멘스가 정 부회장 지분을 인수한 뒤 M&A가 이뤄졌다. 기아차의 핵심 부품사 기아중공업(현대위아)은 1999년 10월 기아차 매각 시 한국프랜지공업에 인수되며 위아로 사명을 변경했고 2001년 12월 현대차와 기아차에 재매각됐다.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시작된 ‘철강의 꿈’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과 현대차그룹이 차별화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철강사를 수직 계열화했다는 점이다. 자동차와 철강 두 업종을 동시에 운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은 협력 관계를 통해 철강을 공급받는다. 폭스바겐-아르셀로미탈, BMW-티센크루프그룹, 도요타-신일본제철, 혼다-JFE스틸이 그 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1978년 철근을 주로 생산하는 전기로 업체 인천제철을 인수하며 철강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광양제철소 사업권 인수에 경합했지만 최종적으로 고배를 마셨다. 이후에도 정 명예회장과 정몽구 회장은 여러 번 제철소 건립을 타진했지만 번번이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정몽구 회장은 1997년 어렵사리 경남 하동에 제철소 건립 인가를 받았지만 외환위기로 계획이 백지화됐다. 인천제철은 2000년 강원산업(현 현대제철 포항공장)과 합병하고 법정 관리를 신청한 특수강 업체 삼미특수강(현 BNG스틸)을 인수했으며 2001년 6월 INI스틸로 사명을 변경했다. 2004년 10월 INI컨소시엄은 한보철강 국제 입찰에서 인수 의향서를 제출한 미국·영국·일본 등 7개국 15개사를 제치고 인수를 결정하며 고로 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2006년 INI스틸은 현대제철로 사명을 변경했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가격 경쟁력을 갖춘 자동차용 강판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10년 1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제1고로에 첫 불씨를 넣고 있다.


금융 부문 계열사 재편도 빼놓을 수 없다. 현대차는 설립 초기 시절 악성 채무로 회사가 부도날 뻔했기 때문에 자동차와 금융의 연관성과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현대차는 1969년 첫 차 코티나 출시 후 신용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할부 방식을 도입했다가 당시 자본금 8억 원보다 3배가 넘는 연체액이 쌓여 도산 위기까지 갔다. 현대그룹은 1993년 자동차, 주택할부금융사업부를 독립, 현대오토파이낸스를 출범시켰고 1995년 현대할부금융, 1999년 현대캐피탈로 사명을 변경했다.

현대차그룹은 2001년 다이너스카드코리아를 인수해 현대카드를 설립했고 2004~2006년에 걸쳐 현대캐피탈 지분 43.3%를 GE캐피탈에 매각하며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현대카드 또한 GE소비자금융(GE머니)에 지분 43%를 매각했다. 그 덕분에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은 GE의 대외 신인도를 기반으로 자금 조달이 용이해졌고 선진 마케팅과 금융 기법을 전수받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현대캐피탈은 2007년 상용차, 건설기계 등 산업재 금융 업체인 현대커머셜을 분사했고 현대차그룹은 2008년 신흥증권(HMC투자증권), 2011년 녹십자생명(현대라이프)을 차례로 인수했다.

탄탄한 계열사를 갖춘 현대차그룹의 자동차 생산량은 급격하게 늘었다. 정 회장의 품질과 아들 정의선 부회장의 디자인 경영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글로벌 생산 기지를 세워 나갔다. 글로벌 업계에서 ‘후발 주자’라는 핸디캡을 안고 뛴 현대차그룹의 생산량은 2000년 244만 대에서 지난해 말 756만 대까지 3배 증가했다. 자동차 산업 110여 년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적인 성장사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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