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hoto by BM Yeun
그믐달
나도향 (羅稻香)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女王)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 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들어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恨)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이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靑孀)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 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 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 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恨)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마는,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情)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한 가장 한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나도향 (羅稻香.1902-1927, 서울 생) 본명은 경손(慶孫). 호 도향(稻香), 필명 빈(彬). 배재학당 나온 후 의사인 부친의 뜻에 따라 경성의전(京城醫專)에 입학. 문학에 뜻을 두어 몰래 일본으로 갔으나 학비를 못받아 귀국. 1922년 20세 때 현진건(玄鎭健), 홍사용(洪思容), 이상화(李相和), 박종화(朴鍾和),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으로 참여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幻戱)>를 연재하는 등 활발한 작품활동. 신문학사상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 한 사람으로, 나중에는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적 작품을 씀. 대표작으로 <벙어리 삼룡(三龍)>, <물레방아>, <뽕> 등이 있으며 25세에 폐병으로 요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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