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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리고 싶다 이 세월의 열차에서 _ 도종환 본문

🌱 Ador 사색. 도서.

* 내리고 싶다 이 세월의 열차에서 _ 도종환

Ador38 2014. 12. 29. 13:23



Photo by BongMo Yeun (2014.11.18)



내리고 싶다 이 세월의 열차에서


      도종환



지는 저녁 해가 잘 깎아 놓은 감 한 개를 올려 놓은 것 같다. 그 뒤로 줄줄이 늘어 놓은 감껍질 같은 노을이 펼쳐져 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무는 늦가을 저녁. 못다한 일들이 많은데 또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이 세월의 열차에서 내리고 싶은 날이 있다.

온 몸이 고동색으로 변한 프라타너스 잎 한 개가 소리도 없이 길 위에 떨어진다. 처음에 하늘을 향해 잎을 내밀 때는 하늘빛을 닮으려고 애쓰는 듯 연록색이던 잎들이 이 가을 돌아가야 할 때가 가까와 지면서 점점 흙의 빛깔로 변해간다. 하늘을 향해 환호하던 푸른 육신의 전부가 흙에서 시작했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초록빛을 조금씩 황토빛으로 바꾸어가다 제 몸이 완전히 흙빛으로 변한 것을 알면 미련없이 땅으로 내린다. 흙의 빛으로 몸을 바꾼 순서대로 땅에 내리는 가로수 잎들. 그렇게 돌아갈 순서를 기다리며 조용히 세월을 짚어나가는 나무들을 보다가 시내버스에서 내려 가로수에 등을 기댄 채 나무들 사이에 나도 그렇게 말없이 서 있고 싶은 날이 있다.

돌아보면 잘못 살았다 싶은 날들. 나만을, 내가 하는 일만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것은 돌아다 보려고도 하지 않은 날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바쁘게 사는 나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이해해 주려니 생각하며 그들을 가장 소홀하게 대해 왔다.내 하는 일과 관련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겐 친절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가까운 사람들에겐 그러하지 못했다. 피곤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고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 가를 먼저 설명하려 하였다.

살면서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도 내가 얼마나 바쁜가를 먼저 이해시키려 하였다. 그들에게 짧은 몇 줄의 편지를 쓰는 일도 미루다 미루다 결국은 해를 넘기고 말았고 그들보다는 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요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그 필요가 끝나면 그들을 금방 잊어 버리는 삶을 살아 왔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외투 속에 몸을 더 깊이 감춰야 하는 계절이 오기 전에 쉬임 없이 달려가는 세월의 열차에서 잠시 내려 길가의 낙엽을 깔고 앉아 미루어 두었던 편지를 쓰고 싶은 날이 있다. ‘보고 싶은-’ 으로 시작하는 엽서라도 한 장 쓰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도시의 삼분의 이가 떠나 버린 탄광마을로 들어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탄가루 묻은 바람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 몇을 만나고 오던 날. 이 땅의 가장 높은 지대를 지나는 열차를 타고 올 때 산비탈로 내려다 보이던 회색의 지붕들, 사람 없는 빈 집의 지붕들을 내려다 보며 도망치듯 편한 곳을 찾아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뒤통수가 뜨거워 지던 날이 있었다. 열차는 지는 나뭇잎 사이를 지나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는데 나도 여기 내려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 자리를 떠나 돌아오고 말았다. 내 삶도 그렇게 늘 마음 뿐 몸을 던져 아픔을 나누는 일에는 적극적이지 못한 채 나이가 들고 말았다.

운주사 계곡에 어느 돌부처는 개울 위에 가로 누워 있었다 한다. 남들이 그 앞에 와 무릎 꿇고 경배하게만 하는 게 아니라 제 몸을 돌다리 삼아 사람들을 건너 주었다 한다. 비록 돌부처이지만 몸을 다 던져 보시하는 삶 그게 진짜 부처의 삶 아닌가. 나는 누가 허약한 내 몸을 남을 위해 내놓으라고 할까 봐 소심하게 맘졸이며 살아온 날들이 많았다. 겨우 체면치레 정도로 대신하곤 자리를 피한 적이 많았다. 계곡을 돌아나오며 돌부처 하나한테도 부끄러운 날. 차에서 내려 백 여덟 번 절하고 싶다. 이미 세속에 사는 몸인지라 나도 내 몸에 돌이끼가 끼도록 아주 오랜 날 세월의 눈비를 맞으며 돌부처처럼 지낼 수는 없겠지만 세상에 살면서 몸에 밴 욕심의 덩어리들을 비에 씻고 바람에 털어내며 천 배쯤 절하고 싶다.

살다 보면 참 맑은 눈과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과 만나는 때가 있다. 그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아침 햇살에 빛나는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다가, 몇 해 쯤 그 나무 아래에서 같이 살아 보았으면 싶기도 하다가 열차를 타고 오는 길, 현실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만 내리고 싶을 때가 있다. 헤어지는 악수를 하며 잡았던 손의 그 짧은 온기가 내내 손바닥을 맴돌고 있을 때 이 차가 가다가 멈추어 버렸으면 싶을 때가 있다.

많은 돌 중에서 눈에 뜨인 한 개를 주워 손에 들고 있다가 건네 주었던 조약돌. 물가를 돌아나오며 거기 그 자리에 내려 놓고 우리들의 짧았던 이야기도 내려놓고 돌아올 수밖에 없던 길. 인생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길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도 나도 이미 남의 사람,일찌기 어긋난 운명을 되돌릴 힘은 우리에게 없고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만 바라보며 돌아오는 길. 나뭇잎보다 더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싶은 밤이 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무엇일까. 멈출 줄 모르는 세월의 열차에서 내려 오늘은 그 생각만으로 저녁하늘과 함께 저물고 싶다. 뉘우쳐야겠다, 오늘 하루만은. 나보다 먼저 내린 가을잎 사이에 누워. (시인, 2008년 11월에)



R.Strauss, Im Abendrot (저녁노을에) _ Leontyne Price, sop


《e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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