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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스토리] "위성개발 헌신할 친구 찾는다" 老교수의 말에 피가 끓었다

Ador38 2015. 9. 2. 23:48

 

[He 스토리] "위성개발 헌신할 친구 찾는다" 老교수의 말에 피가 끓었다

입력 : 2015.09.02 03:05 | 수정 : 2015.09.02 06:28

[CEO가 말하는 내 인생의 ○○○] 박성동 쎄트렉아이 대표의 '우리별'

1989년 '우리별 1호' 위해 5명 英 유학
'기술 못배우면 도버해협에 빠져죽는다' 죽기살기로 낮엔 납땜, 밤엔 쪽잠 공부
1992년 우리나라 첫 위성 발사 성공
7년 뒤엔 100% 국내 기술로 제작한 '우리별 3호'까지 쏘아올리는 쾌거

故 최순달 교수 사진
故 최순달 교수

 

 

고등학교 때까지 내 꿈은 의사였다. 그런데 의대가 아니라 KAIST(한국과학기술원) 전자공학과로 진학한 것은 오로지 학비가 무료였기 때문이다. 나는 3형제 중 막내였다. 우리 집은 한 번에 대학생 둘의 학비를 대기 어려웠다. 둘째 형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대학생이던 큰형은 군대에 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내 꿈과 상관없이 대학에 가다 보니 학교생활은 별 재미가 없었다.

4학년 1학기를 마쳤을 즈음 운명적 기회가 왔다. 학교가 경비를 대고 영국 서리(Surrey)대에 파견돼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개발할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서리대는 당시 인공위성 기술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대학에 속했다.

나는 "무료 유학이나 가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유학 설명회에 참석했다. 그때 학생들 앞에 선 고(故) 최순달 교수님이 내 인생을 바꿨다. 단돈 25달러를 쥐고 미국으로 유학 간 최 교수님은 선진 기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연구실 쓰레기통까지 뒤졌던 분이다. 나중에 고국에 들어와 전자통신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TDX 전자교환기 개발을 이끌었다. 최 교수는 이후 KAIST로 와서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세웠다.

쓰레기통 뒤지며 개발한 우리 별 위성

학생들 앞에 선 교수님은 칠판에 'devotion(헌신)'이란 단어를 쓰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런 좋은 환경에서 공짜로 공부하는 것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너희가 공부하는 데 들어간 비용 중 일부는 시장에서 채소나 생선을 파는 할머니의 전대에서도 나왔음을 명심해라. 그것은 너희에게 이 세상을 좀 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바꾸는 데 기여해 달라는 뜻이다. 너희가 받은 혜택의 곱절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가져라. 나는 우리나라의 위성 기술 개발에 헌신할 친구들을 찾는다."

노(老)교수님의 말씀은 별생각 없이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려던 내게 뒤통수를 망치로 친 듯한 충격을 줬다.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내 피를 끓게 할 일을 찾은 것이었다. 그해 나를 포함해 5명이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개발하러 1989년 서리대로 유학 갔고, 이듬해 4명이 합류했다. 최순달 교수님은 "거기 가서 위성 제작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도버해협(영국~프랑스 간 해협)에 빠져 죽어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교수님 말씀대로 목숨을 걸었다. 9명 모두 1년 만에 석사 논문을 마치고 위성 제작에 투입됐다. 적은 인원으로 위성의 전 분야를 책임지다 보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낮에는 전파 수신기를 만드느라 납땜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밤에는 위성과 관련된 열역학 문제를 풀다가 실험실에서 쪽잠을 자기 일쑤였다.

 

 

쎄트렉아이 박성동 대표가 대전 전민동 본사에서 소형 지구 관측 위성을 가리키며 활짝 웃고 있다. 박 대표는 “한국의 인공위성 기술이 세계의 ‘별’이 되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쎄트렉아이 박성동 대표가 대전 전민동 본사에서 소형 지구 관측 위성을 가리키며 활짝 웃고 있다. 박 대표는 “한국의 인공위성 기술이 세계의 ‘별’이 되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신현종 기자

 

 

우리는 미국에서 최 교수님이 했던 일을 영국에서도 그대로 했다. 당시 실험실에서는 레이저 프린터 한 대를 여럿이 같이 썼다. 영국 연구원들은 프린터로 자료를 출력했다가 고칠 게 있으면 이미 출력한 자료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 우리는 그들이 없을 때 쓰레기통을 뒤져 참고할 만한 자료를 챙겼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우리가 부족한 부분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데 무엇이 부끄럽단 말인가.

세계 3대 소형 위성 업체로 발돋움

그 사이 한국에도 우리와 똑같이 위성 개발을 진행하는 '그림자' 연구팀이 꾸려졌다. 영국에서 우리가 배운 것을 한국에서 그대로 해보고 뭔가 막히면 다시 영국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반복됐다. 덕분에 1992년 8월 11일 우리별 1호 발사에 성공한 지 1년 만에 한국은 금방 '우리별 2호'를 발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9년에는 마침내 100% 우리 힘만으로 만든 인공위성 '우리별 3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소형 위성 분야에서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기쁨은 잠시였다. 1997년 시작된 외환 위기는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1999년 정부는 업무 효율화 차원에서 우리 센터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통합하려고 했다. 나를 포함한 서리대 유학파는 항공우주연구원에도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 있던 연구진은 그렇지 못했다.

그해 12월 나를 포함해 7명이 먼저 퇴직해 국내 최초의 인공위성 전문 기업 쎄트렉아이를 설립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말렸지만 우리는 절실했다. 우리가 만든 인공위성이 실험실에서만 존재하는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외 출장을 가장 많이 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로 내가 대표를 맡았다.

해외에서는 이미 우리별 위성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회사 설립 이후 1년 만에 말레이시아에서 첫 위성 사업을 수주했다. 그때쯤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의 동료 절반이 우리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말레이시아에 이어 싱가포르·터키·아랍에미리트(UAE)·스페인에도 잇따라 인공위성을 수출했다.

 

국내에서도 다목적 실용위성(아리랑위성)과 통신해양기상위성, 나로호 우주발사체 개발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위성이 별을 관측해 자세를 확인하는 '위성용 고속·고정밀 별 추적기'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쎄트렉아이는 자회사 두 곳과 직원 220명을 둔 회사로 성장했다.

쎄트렉아이는 영국 서리대가 세운 SSTL, 유럽연합의 에어버스와 함께 세계 3대 소형 위성 제작 업체로 통한다. 이제 내 꿈은 우리별에서 시작된 한국의 인공위성 기술이 조만간 세계의 '별'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박성동 대표는…

박성동(48) 쎄트렉아이 공동대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개발한 주역이다.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영국 서리대로 유학을 가서 우리별 위성 제작에 참여했다.

 

2000년 1월 연구센터 동료들과 인공위성 제작업체 ‘쎄트렉아이’를 창업, 회사를 세계 3대 소형 위성 제작 업체로 키웠다. 2013년 3월 대학 동기이자 함께 창업한 김병진 부사장에게 사장 자리를 넘기고 공동대표 겸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평소 “나는 주연보다 조연이 어울린다”며 주변 사람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적극적이다. 대전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창업 대사’로 선임돼 대덕연구단지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들의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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