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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커피 문화 100년[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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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커피 문화 100년[3]

Ador38 2016. 6. 9. 14:49

한국 커피 문화 100년[3]

 


@0910-이미지 021.jpg




커피와 베토벤과 막걸리의 앙상블 그리고 커피당黨

 
@0910-EBS24부작[명동백작]은성장면.jpg해방과 함께 서울 명동 언저리에 있었던 다방들이 먼저 하나 둘씩 문을 열어 해방의 감격은 다방가에서부터 흘러넘쳤다. 그 가운데서도 선두주자로 나섰던 ‘봉선화’에서는 다시 옛 정취가 되살아났다. 벽면 한쪽에는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걸려 있었고, 하루 종일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과 리스트의 [헝가리 무곡] 두 곡만 번갈아 흘러나왔으며, 점차 퇴폐적인 분위기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음악으로 못다 푼 갈증은 근처에 있던 주점 ‘은성’에서 막걸리로 달랬다. 쓴 커피와 베토벤과 막걸리의 묘한 앙상블은 혼란과 격동기의 상징적인 풍속도였다.

 
@0910-박인환.jpg‘봉선화’에 이어 ‘에덴’이란 고전 음악 다방과 ‘마돈나’가 새로 생겨났는데, 해방과 함께 친미적이고 서구적인 이름들이 다방 이름에도 쓰이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전숙희와 손소희 그리고 당시 이화여대 교수였던 유부용이 함께 경영했던 ‘마돈나’에 이어 방송 작가인 김광조 부부가 차린 ‘라아뿌룸’에는 시인 이진섭과 박인환이 단골로 찾아들었고, 부산 피난 시절 남포동의 ‘스타’ 다방에서 음독 자살한 전봉래 역시 이곳에 살다시피 했다.

 

@0910-김규동시인이그린서울소공동플라워다방모습.jpg

@0910-김수영시인.jpg이 시기의 다방들도 장삿속으로만 운영한 게 아니었다. 유치진의 ‘브라다나스’나 ‘마돈나’가 그러했고, 시인 장만영이 하던 ‘비엔나’ 역시 그러했다. ‘비엔나’의 맞은편에는 전봉래와 김수영이 단골이었던 ‘휘가로’가 있었으며, 레스토랑 스타일의 드넓은 공간으로 문인들의 집합처였던 ‘플라워’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였다. 그 밖에도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개업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역 맞은편의 고전 음악 다방 ‘돌체’가 명동으로 이사와 커피와 음악, 커피와 철학의 교류를 자유분방하게 터놓도록 자리를 마련한 것도 이 시기였다. ‘돌체’의 명성이 장안에 퍼질 무렵에 ‘모나리자’ 다방도 생겨났다. 이 ‘모나리자’는 증권가 골목에 자리한 ‘문예살롱’과 함께 문화 예술인들의 아지트로 쌍벽을 이루었다.

이와 같이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딛고 부흥을 위한 새로운 기운을 찾으려는 공간으로서 한 몫을 해낸 다방이 한편으로는 룸펜들의 무위도식처나 실업자들의 온상 역할도 하게 되어, 룸펜들은 커피 한 잔에 네댓 시간을 죽치고 앉아 보내곤 했다. 그래서 그때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정당政黨들에 빗대어 이들을 ‘커피당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마시던 쓰디쓴 커피 한 잔

 

@0910-부산피난시절.jpg‘돌체’와 ‘모나리자’ 그리고 ‘문예살롱’ 등을 넘나들면서도 억눌렸던 갈증과 해방의 자유를 미처 다 발산하지도 못한 채,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은 다방과 함께 동족상잔이라는 또 한 번의 참극을 맛보아야 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불어닥친 전쟁 회오리에 뒤덮여 공산군 치하의 서울 생활 90여 일을 보낸 9월 28일, 서울에 다시 국군의 인기척이 들려오자, ‘돌체’가 지금의 제일백화점 부근에서 먼저 재기하여 잿더미가 된 명동 거리를 따끈한 커피와 음악으로 달래주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뒤바뀌어 너나없이 부산과 대구로 피난길에 오른다.

 

부산과 대구의 다방에서 체험한 피난 생활은 뒷날 많은 문학 작품에도 등장하지만, 피난지 다방은 문화 예술인들로 하여금 묘한 향수에 젖게 하였다. 이들의 부산 피난 생활은 흔히 ‘밀다원 시대’로 불릴 만큼 ‘밀다원’은 피난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다. ‘밀다원’ 다방은 광복동 네거리에서 시청 쪽으로 자리잡은 2층 건물의 위층에 있었다.

 

문총 계열의 작가들이 부산으로 피난하여 ‘밀다원’과 ‘금강’, ‘에덴’ 다방에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던 때에, 대구에서는 종군작가단이 음악다방인 ‘르네쌍스’와 ‘향수’에 모여 전쟁의 고달픔을 달래고 있었다. 특히 이 ‘르네쌍스’는 B-29 폭격기가 요란한 소리로 하늘을 헤집는 극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한 생명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었다. 심지어 유엔군과 외국의 종군 기자들까지도 이곳을 찾아 전쟁의 참혹함을 털어놓았으며, 전쟁이 끝나고 귀국해서도 ‘르네쌍스’의 안부와 평화를 물어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라이프LIFE]지나 몇몇 일본 신문들은 ‘르네쌍스’의 ‘공로’를 찬양하는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가장 처절한 상황 속에서 오직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살아가야 한다는 또 다른 긴장감만을 가진 채, 폐허가 된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속속 문을 열고 기다리던 다방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어갔고, 어떻게 납북되었으며, 언제 마지막 얼굴을 보았는가를 얘기하며 마시는 쓴 커피는 바로 모두의 눈물이었으며, 갈데없이 종일 진을 치고 하릴 없이 내일은 또 어떻게 될까 하고 천장만 쳐다보던 다방의 군상들은 당시 지식인들의 생존 양식 그 자체였다.

 

 @0910-명동의다방들[1945-1960]지도.jpg

 

@0910-종로의다방들[1930-1960]지도.jpg


 

모든 것은 다방으로 통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뜨거운 커피와 음악이 살아나기 시작한 다방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웃음을 찾았고, 상처받은 인간성을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전후의 폐허 위로 실낱같은 희망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이처럼 전후의 다방 문화는 그때의 생활상의 단면을 드러내보인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공간이었다.

 

해방 전만 하여도 우리나라의 커피 소비는 소수 계층들이 주류였으나 본격적으로 일반에게까지 대중화한 계기는 육이오전쟁 직후로 볼 수 있다. 해방 직전 서울에서 거의 스러져가던 30여 개의 다방은 휴전 뒤 잡초 같은 기운으로 무성하게 생겨나 214개로 불어났다. 또한 다방은 정부 수립 이후로는 철저한 관허제官許制로 바뀌어 접객 영업 중 요식업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음식점이나 주점과 함께 단속 대상이었으며 영업 허가와 취소, 위생 검열, 찻값의 인상 여부도 관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던 중 1953년에 일어난 찻값 인상 파동을 계기로 다방은 요식업조합에서 뛰쳐나와 독자적인 다방조합을 결성하고 자체의 권익을 웅호하면서 발전했다. 특히 문화 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전후 환경 속에서 다방은 각종 만남의 장소로는 물론이고 전시회, 영화의 밤, 문학의 밤, 출판기념회, 독립투사추모회, 동창회, 송별회에 이르기까지 온갖 모임을 다 수용하는 다목적 종합 문화 생활 공간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0910-일본어린이들에게초콜렛을 주는 미군.jpg

 

@0910-미군에서 만든 병원 보급용 팩에는 커피와 주스, 우유 등이 포함.jpg다방 문화가 혼란기 속에서도 전성기를 누리며 일반 대중에게 정착되어가는 동안 커피의 물량 수급과 유통 경로는 갖가지 물의를 빚었다. 1960년대 말에 국내에 커피 제조업체가 탄생되기까지는 무질서한 암거래가 거미줄처럼 얽혀 난무하였다. 양키 문화와 함께 미군 부대에서 대량으로 유출된 피엑스 커피나 레이션 박스에서 흘러나온 야전용 봉지 커피가 커피의 대중화를 주도한 사실은 우리나라 커피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계속)

 

커피 연표 ③
 
1605년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둘러싸고 종교적 시비가 일어났다. 커피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커피가 ‘사탄의 음료’라고 하여 교황 클레멘트 3세를 부추겨 커피를 못 마시게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악마의 음료’를 마셔본 교황은 오히려 “이 음료는 아주 훌륭하므로 이도교만의 음료로 두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것에게 세례를 주어 진정한 기독교도의 음료로 만들어 악마의 콧대를 꺾어주도록 하라”고 말함으로써 커피를 둘러싼 악마 시비를 진정시켰다. 이 시비가 있었던 때는 아직 커피가 대중화하지 못한 때였으며, 단지 커피를 구실로 삼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대립 세력 사이의 마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610년
영국 사람인 조지 산디는 터키를 여행하고나서 커피에 관해 “뜨겁고 까맣지만 맛이 좋다”고 상세히 기록하였다.
 
1637년
영국에 커피가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1638년
이탈리아 외교관 베스링은, 카이로에는 300여 군데의 커피하우스가 있으며 대부분 커피에 설탕을 넣어 마시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640년
네덜란드의 상인 울프바인은 에티오피아의 모카항에서 커피를 선적하여 암스테르담에 뿌렸는데, 커피가 대량으로 유럽에 수입된 첫 기록이다.
 
1645년
베니스에서 커피가 시판되기 시작하였으며,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커피하우스가 등장하였다.
 
1650년
유태인 야곱이 옥스퍼드에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개설하였으며, 영국의 브론드 경이 ‘Coffee'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652년
영국의 상인 에드워드가 성 미가엘 사원 앞에다 천막 커피하우스를 개장함으로써 런던에도 다방이 등장하였다. 얼마 안 가서 런던에는 3000여 개의 다방이 생겨났다.
 
1657년
5월 19일, 영국의 [Public Advertise]지誌에는 ‘커피의 덕德’이라는 최초의 커피 광고가 실렸다. <반로미가街에서는 커피라는 음료를 팔고 있습니다. 커피는 위생적이며 의약적인 음료입니다. 커피의 효능을 말씀드리자면, 체온을 유지시키고, 소화를 도우며, 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마음과 가슴을 상쾌하게 합니다. 또한 눈병, 기침, 독감, 류머티즘, 폐병, 부스럼 등에도 특효가 있습니다. 투약 시간은 아침과 오후 세 시가 좋습니다.>
 
1660년
터키 스타일의 커피 제조법이 영국에 전해졌다. 또 중국 주재 네덜란드 외교관을 지낸 뉴 호프는 밀크 홍차에서 힌트를 얻어 밀크 커피를 처음 개발했다.
 
1669년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 소리만 아가는 파리의 상류층에 순수 터키 스타일의 커피를 소개하여 유행시켰다.
 
1670년
독일에 처음 커피가 소개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커피 거래에 면허를 내주었는데, 보스턴의 도로시 존스가 첫 면허를 받았다.
 
1671년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 대중용 커피하우스가 등장하였다. 이 무렵 커피에 대해 유해 논쟁이 일어났는데, 필립 에스듀파의 [커피, 차, 초콜릿의 유효성에 관하여]라는 책이 발간됨으로써 논쟁은 ‘커피 무해’로 일단락되었다.
 
1674년
스웨덴에 처음으로 커피가 상륙하였다. 영국에서는 커피 때문에 부부 사이에 마찰이 잦았는데, 런던의 여자들은 ‘커피 반대 청원’까지 냈다. 이 청원서에서 여자들은, 커피의 과용으로 남자들의 성욕이 감퇴된다고 경고하였다. 여기에 대해 남자들은 ‘여자들의 커피 반대 청원에 대한 남자들의 답변’을 내고, 여자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와 같이 커피 논쟁이 거세어지자 찰스 2세는 1675년에 커피하우스를 폐쇄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이 법령은 고작 몇 주 뒤에 철회되고 말았는데, 영국 역사상 가장 단명의 법령으로 기록된다.
 
1679년
런던의 상인이 독일의 함부르크에 커피하우스를 개설한 데 이어서 1689년에는 로젠버그에, 1694년에는 라이프치히에, 1696년에는 뉘렘버그에, 1712년에는 슈투트가르트에 그리고 1721년에는 베를린에도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1683년
비엔나를 침공했던 터키군이 패주하면서 남기고 간 전리품 속에서 대량의 커피콩이 발견되었다. 터키군에 있었던 콜스치즈키는 이 콩을 이용하여 비엔나 사람들에게 터키 커피를 만들어주었으며, 커피하우스를 열기도 했다.
 
1685년
프랑스 의사 슈르 모닝은 커피를 약으로 쓸 궁리를 한 끝에 ‘카페오레(Caf? au lait)’를 개발했다.
 
1690년
커피 수급을 확보하려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들의 식민지였던 자바의 바다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 아라비아산 묘목을 시험 재배하였으나 홍수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1695년
인도 사람 바바 부단이 메카 순례 길에 커피 열매를 남인도로 반출하여 말라바르 해안과 마이소르 산록에 심었다.
 
1696년
네덜란드 정부는 다시 자바에 커피 재배를 시도하였으나 또 실패하였다.
 
1699년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 소리만 아가는 루이 14세에게 중동 식 커피 예절을 소개하였다. 한편, 네덜란드 사람들은 끈질긴 시도 끝에 자바에서 커피 재배에 성공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에도 커피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1700년
George Paschius는 [성경]에서 커피에 관한 언급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사무엘기 1편(15장 18절)에 있는 아름다운 Abigail이 화해를 목적으로 데이비드에게 선사한 ‘다섯 그루의 볶은 곡식’은 바로 커피콩을 뜻하며, 사무엘기의 다른 부분(17장 28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곧, Machash의 아들인 Schoby가 데이비드와 그의 백성들에게 선사한 선물의 목록을 보면, 목걸이, 금은제 접시, 도자기, 밀, 보리, 밀가루, ‘볶은 곡식’, 크림, 양, 소젖으로 만든 치즈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볶은 곡식’이 바로 커피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위스의 목사며 작가인 Pierre Dumont은 창세기 35장 30절에 쓰여 있는, Boaz가 Ruth에게 보낸 ‘볶은 곡식’은 커피였다고 주장했다. (계속)



 

*[사진ⓒeditoree] 커피 밀

*인터넷 캡처 / (위에서부터) EBS 방송 24부작 [명동백작]의 한 장면, 시인 박인환, 시인 김수영, 김규동 시인이 그린 소공동 플라워 다방(1948년 8월), 부산 피난 시절, 명동의 다방 약도(1945~1960년), 종로의 다방 약도(1930~1960년), 일본 어린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주는 미군, 미군에서 만든 의료보급용 팩에 섞여 있는 커피와 우유 등.

*http://everyoung.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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