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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因緣이 고이는 방
한국 커피 문화 100년[2] 본문
한국 커피 문화 100년[2]
명동에서 시작한 다방의 역사
그런데
흔히 ‘다방茶房’이라고 하면 커피를 떠올리고 그래서 다방도 외래 문물로 생각하기 쉬운데, 다방이란 말은 우리 역사에 오래전부터 쓰이면서 내려온
말이다. 다방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시대에는 그 전부터 내려오던 ‘차 문화’가 더욱 성행하여 ‘차’는 각종 의식에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많은 ‘다인茶人’과 ‘다시茶詩’가 나온 것도 이 시기며, ‘다방’이란 기록이 나타난 것도 이때다. 곧 ‘다방’은 고려조 중종
때의 관청으로서 ‘다사茶事’와 ‘주과酒菓’ 등을 관장했다고 전해온다. 그 구체적인 활동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궁중의 연회나 의식에서 접객을
맞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의 ‘다방’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다례茶禮’라는 이름으로 외국 사신들의 접대를 맡는 국가 기관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이처럼 관청의 기구로 시작된 ‘다방’이 개화기에 접어들어 지금과 같은 성격의 다방으로 자리잡아갈 무렵, 서울 시내의 다방은
명동과 충무로, 소공동 일대를 중심으로 몰려 있었고, 종로 일대에 한두 군데 있을 뿐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드나드는 손님들도 지체
높은 관료층이거나 이른바 개화된 멋쟁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과는 아직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런가
하면 지금의 ‘신도호텔’ 옆에 있었던 ‘명치제과明治製菓’에서도 커피를 팔았는데, 친구 서넛이 1원을 가지고 가면 몇 시간이나 우쭐거리며 지낼 수
있을 만큼 특별 계층의 전유물이었다고 한다. 또 몇 해 뒤에 ‘명치제과’ 맞은편에 라이벌로 등장하게 된 ‘금강산金剛山’이라는 제과점에서도 커피를
팔았는데, 나중에는 경양식까지도 곁들여 손님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지금의 자유중국대사관이 있는 명동 입구 코스모스백화점 옆 골목에는
‘허리우드’라는 다방이 있었다. 이곳은 본디 구한말에 원세개袁世凱가 중국 군대를 끌고와 주둔해 있던 곳이어서 중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들 가운데 동순태同順泰란 갑부가 있었는데, 한때는 ‘시대일보’의 사무실로 쓰이기도 했던 그 사람의 집에 일본 사람이 이 다방을 내게 되었다.
‘허리우드’는 육이오전쟁 때 황명희라는 여자가 북에서 내려오는 문화인들을 상대로 계속 문을 열어놓고 장사하기도 했다.
3500원어치의 다방 외상 전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문을 연 다방으로는 1927년 ‘카카듀’라는 곳이
처음이었으며, 주인인 이경손은 [아리랑]의 나운규를 길러낸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이었다. 이어 1929년에는 YMCA 근처에 ‘멕시코’ 다방이
들어섰는데, 양주까지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채산採算을 목적으로 한 경영이 아니라 예술인들에게 모임 장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컸기 때문에,
‘멕시코’가 문을 닫았을 때는 자그마치 3500원圓어치나 되는 외상 전표가 상자에 가득했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듯하다. 한 잔에 10전씩이던
시절이었으니 외상 규모와 아울러 다방의 인심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특히 이때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운명’이나 ‘전원교향곡’같이 무거운
고전 음악을 들으며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보통 대여섯 시간은 족히 앉아 있었으므로, 이들을 가리켜 ‘벽화璧?’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멕시코’에
이어 극작가 유치진이 ‘브라다나스’라는 다방을 소공동에 차렸는데, 이곳은 당시 이름 있는 문화인들의 집합처이자 낮잠 터가 되기도 하였다.
영화배우 복혜숙이 인사동 부근에다 ‘비너스’라는 다방을 차려 인기를 독차지한 것도 이 무렵이었으며, 서울시청 앞의 ‘낙랑樂浪’과 러시아풍 다방인
명동의 ‘트로이카’ 역시 이 즈음에 생겨났다.
음악 다방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삼일독립운동 이후로, 일본이 제국주의의 야수성을 문화 정책이란 가면에 숨기고 유화하려던 1920년대 후반이다. 초기의 다방 가운데 특히 음악 다방으로 관심을 불러모았던 곳은 명동의 ‘에리자’ 다방이었다. 이곳은 음악평론가로 활약하던 김관이 주인이었으며, 젊은 예술인들에겐 이색적인, 꿈과 낭만의 전당이었다.
시인
이상李箱(1910~1937)은 특이한 실내 장식으로 ‘제비’와 ‘69’를 개업하여 화제가 되었고, 소공동의 ‘미모사’는 프랑스 스타일의 커피와
샹송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충무로의 ‘원’은 독일 스타일로, ‘돌체’는 고전 음악 전문으로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다방을 유난히 사랑한 이상李箱
이 가운데서도 ‘제비’는 시인 이상이 남기고 간 비화만큼이나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폐결핵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서성거리던 이상이 스물네 살이 되던 1933년 7월에 문을 연 ‘제비’는 낯선 여자와 함께
선을 보였다. 그녀는 이상이 데려온 스물한 살 난, ‘체대가 풋고추 만하나 깡그라진 계집으로 제법 맛이 매운’ 금홍錦紅이라는 창기唱技였다. 흡사
보들레르의 흑인 혼혈 정부였던 잔느 뒤발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을 풍기며 ‘제비’에 나타난 금홍은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얼굴마담’인
셈이었다.
금홍이
마담으로 앉은 다방 ‘제비’는 이상이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문인들을 비롯한 많은 예술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였으며, 손님이라고는 이들 가난한
예술가들 말고는 없었다. 뒷날 이상은 이 다방의 뒷방에서 마담 금홍과 동거한 체험을
바탕으로 그의 대표작인 [날개]를 쓰기도 했다. 물론 2년이 겨우 지난 1935년 가을, ‘때 낀 헌 버선짝만 남기고’ 금홍이 훌쩍 떠난 뒤로
썰렁하게 남은 ‘제비’도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다방에 대한 이상의 집념은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
자의식을, 당시로서는 삶을 가장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던 ‘다방’이라는 매체를 통해 풀어보려는 절규의 한 가닥이었는지도
몰랐다.
‘제비’로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른 이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집을 저당하여 인사동에 ‘쓰루鶴’라는 카페를 차렸으나 역시 한 해를 넘기지 못했다. 다시 명동에다 ‘무기麥’라는 다방을 열기로 마음먹었으나 개업도 하기 전에 양도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방에 대한 이상의 집념은 끝나지 않아, 이번엔 좀 색다른 이름의 다방인 ‘69’(식스나인)를 종로와 광교 중간쯤에 개업하였다. 그러나 봉건적인 성性 의식이 채 걷히지 않은 1930년대 중반에 남녀를 상징적으로 역대비시킨 ‘69’라는 이미지는 대중들과의 거리만 남겨둔 채, 나중에 가서야 그 뜻을 알아차린 왜경에 의해 허가가 취소되고 말았다.
태평양 전쟁으로 다방도 전시 체제
이상이
한창 자신의 재기才氣를 위해 몸살을 앓을 무렵에 종로 거리엔 ‘멕시코’ 다방과 ‘낙랑’ 다방도 있었지만, 그나마 적자를 면하기 시작한 다방은
‘동랑파라’뿐이었다 지상광고紙上廣告라는 대담하고도 기발한 방법으로 손님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동랑파라’는 후에 영화배우였던 김연실이
1940년대까지 운영하기도 했다. 다방 주인은 거개가 예술을 사랑하였고 ‘문화인’이라는 뿌듯함을 만끽하면서 다방 문을 열고 닫는 것도 함께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방 직전, 그러니까 1941년에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종전될 때까지 다방은 전시 체제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커피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940년 당시 동경 시내에만 해도 다방이 3000여 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도 전쟁
막바지에는 폐점이나 전업轉業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 수입 통로가 막히게 되자, 견디다 못한 커피 애호가들은 고구마나 백합근百合根 또는 대두大豆
따위를 볶은 뒤 사카린을 넣어 만든 즙을 마심으로써 간신히 욕구를 벌충하였다. 이러한 커피 품귀 현상은 식민지 치하인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밀어닥쳤음은 물론이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다방들도 공습과 ‘소까이’라는 전쟁의 중압감에 휩싸였다. 그나마 명맥을 지키고 있던
다방들도 한결같이 퇴폐적인 유행가 가락이 주조를 이루었으며, 하소연과 푸념이 섞인 절망의 늪으로 변해갔다. [&] (계속)
1300년
중동 지방에서 도자기 또는 철제로 된 커피 조리 기구가 사용된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이미 이 무렵에 커피콩을 말려서 끓이는 단계에서 더 발전해 볶아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1418년
알 샤데리라는 사람이 에티오피아에서 나온 커피를 아라비아에 처음 전했다. 알 샤데리는 “커피란 모든 죄를 사라지게 해주는 면죄 음료며, 이를 마시는 사람은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1454년
아덴의 이슬람교 사제장인 게마르딘은 일반인도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이때까지 이곳에서는 사제를 비롯한 특권층만 커피를 마신 듯하다.
1505년
메카 순례자들이 커피 묘목을 숨겨가지고 나가 인도에 전하기 시작하였으며, 터키에서는 커피를 전문으로 파는 다방이 생겼을 뿐 아니라 커피가 유럽으로 건너가는 건널목 구실을 했다.
1574년
독일의 여행가 레온 하드로 월프가 [시리아 여행기]에 중동 지역의 커피 음용에 관하여 자세히 적었다. 이탈리아 식물학자 프로스 베로 알피노라도 이집트를 다녀온 뒤에 커피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1585년
이탈리아 외교관 모로시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근무하면서 커피에 관한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다.
1587년
압둘가디는 아라비아에 전해져 내려오는 커피의 기원에 관한 옛 기록을 복사하였다. 이 기록은 커피의 원전原典으로 꼽히며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계속)
*[사진ⓒeditoree] 커피숍 이미지 페인팅.
*인터넷 캡처 / 위에서부터 1940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명동 거리, 1940년대의 명동 입구, 시인 이상이 직접 그린 자신의 초상화, 시인 이상, 커피 끓이는 법을 소개한 신문 기사, 음악 다방, 명동의 사보이호텔.
출처- http://blog.hani.co.kr/lim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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