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
- 오재욱
“내 발목 끊어간다”
“앗! 차가워! 발이 시려워서 못 걷겠어!”
아직 어둠의 고요가 채 가시지 않은 오름분화구에 중년여자의 외침이 앙칼지게 퍼진다. 산정호수 짙은 물색만큼 싸하게 메아리 친다. 그 외침에 산정호수가 파르르 떨고 메마른 가지에 걸린 낙엽 하나가 호수 위로 나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이른 아침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며 집을 나와 한라산 중턱 사라오름에 도착한 우리는 오름의 고요도 맛보기 전에 앙칼진 비명에 깜짝 놀랐다. 며칠 전 지난 태풍 차바가 몰고 온 호우로 사라오름은 만수를 자랑하고 있다. 전망대로 가는 데크 일부분이 물에 잠겨 바지를 무릎까지 올린 후 등산화를 손에 들고 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물을 것도 없이 신발과 양발을 벗고 바지를 무릎 위로 올린 후, 산정호수에 잠긴 테크로 발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우욱!”
발목을 타고 올라온 한기가 척추로 전해지며 외마디 신음소리만 난다. 언젠가 누군가와 헤어진 그날 만큼이나 시립다. 일행 중 한사람이 뒤로 달아난다. 발목이 끊어질 것 같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뎄다며 발을 뺀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너무나도 맑은 날이다. 일행을 남겨두고 전망대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닿지 않아 보였다. 비명소리만 없었다면 산정호수에 일렁이는 물결소리도 들릴 것 같은 고요만이 사라오름을 살포시 덮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당겼다 놓았을 때처럼 산정호수의 물결은 지나는 바람따라 파르르 떨고 있다.
바람이 앞서 달리면 산정호수 위를 달리면 그 뒤를 쫓아 빛은 한줌의 하얀 별들을 뿌리며 사라를 유혹한다. 사라는 부끄러운 듯 가벼운 눈주름보이며 웃는다. 바람과 빛이 만들어낸 별들은 호수 위에 흩어졌다가는 순식간에 모여들고 사라졌다 이내 나타난다. 꽃을 닮은 여인처럼 향기로운 사라에 향한 빛과 바람의 구애는 끝이 없이 계속된다.
해발 1300m 사라오름 전망대에 오르면 제주의 동쪽 오름군락들과 제주의 남쪽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라산 정상이 보인다. 파란 해안선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한라정상까지 펼쳐진 광활한 수림, 아마도 이보다 더한 시원함은 없을 것이다. 막힐 것 없는 제주자연의 시원함이 눈을 편안하게 하니 덩달아 마음까지 탁 트인다.
바다를 향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아기자기한 한라산 오름들은 산과 마을을 이어주고 자연과 사람을 이어 공존하게 한다. 여기에 서면 제주 닮음이 어떤 것인지 느껴진다. 불을 당기는 순간 향내음이 강하듯 이곳을 자주 찾는 나는 그 감흥이 처음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수림 위로 달려와 나의 온 몸을 스쳐 지나는 오름바람의 감촉이 좋고, 사각거리는 조릿대의 소리가 정겹기만 하다.
이곳에 처음 온 동행자는 "미치겠다"고만 할 뿐 말을 이어가지 못하며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떤 만남이든 조금의 아쉬움은 남아 있어야 다음 만남이 기다려지듯 우리도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사라오름 분화구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사라오름 쉼터에는 여행자들로 가득 차있고 풍선 속에 손을 넣으면 물주름이 일것 같은 파란 하늘에는 환한 태양이 빛나고 있다.
사라오름 가는길: 사라오름은 한라산 성판악코스 중간 부근 약 5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왕복 5시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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