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경 회장 집무실엔 '신독' 휘호···네 아들 병장 만기제대
[중앙일보] 입력 2019.12.17 05:00 |
1996년 서울여의도 63빌딩 별관에서 있은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右)의 손자 일선씨와 구태회 당시 LG그룹 고문의 손녀 은희씨의 결혼식에서 정 명예회장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만나 양그룹간 첫 사돈관계를 맺은 것을 자축하는 악수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14일 향년 94세로 별세한 구자경 명예회장의 4일장을 마칠 때까지 구 명예회장의 유족들은 빈소를 따로 밝히지 않았다. 빈소뿐 아니라 화장 후 장지까지 비공개했다. 소박하고 단출한 장례를 원했던 고인의 유지를 따르기 위해 가족장을 고집했다.
재계에선 구 명예회장의 장례를 두고 “호화로운 외양을 추구하기보다 내실을 추구했던 고인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말이 나왔다.
상주를 맡은 구본능 희성 회장을 비롯한 유족은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난 14일, 서울아산병원 측에 전화를 걸었다. 구 명예회장보다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난 장남 구본무 LG 3대 회장을 비롯해 구 명예회장의 부인상 등 LG가가 서울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을 빈소로 택한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LG 총수 일가가 고인의 빈소로 서울아산병원을 택한 이유로는 생전 고인과 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주 간 각별한 관계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 결정엔 10세 차 정주영-구자경 각별한 우정
21년 전인 1988년, 재계 수장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서 10년 재직을 마치고 구자경 럭키금성그룹 회장에게 자리를 넘겼다.
당시 재계에선 2년씩 다섯 차례에 걸쳐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아산의 뒤를 이어 누가 재계 수장을 맡을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아산의 생각은 분명했다. 1985년 2월 아산은 전경련 회장직 4연임을 시작하면서 아예 차기 회장을 미리 점찍었다.
“다음 회장은 구자경 회장이 하면 무탈할 겁니다”
구 명예회장이 1925년 4월생, 정주영 창업주는 1915년생으로 나이 차가 10세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 외향적인 아산과 실용주의적 성품의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은 서로 성격은 달랐지만, 솔직담백하면서 잔정이 많다는 공통점에서 서로를 아껴줬다고 한다.
아산의 6남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지난 15일 조문을 마치고 취재진에게 “생전에 고인이 부친과 가깝게 지내셨다. 현대의 서산 간척지 공사 현장에 고인이 찾아오셨을 당시 찍은 사진을 구광모 대표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생전 고인의 소신은 '바로 선 경영인'이었다. 검정 뿔테안경에 진한 경상도 사투리는 상남의 솔직하면서도 소탈한 성품을 그대로 나타낸다. 서울 여의도 집무실에는 ‘사람은 모름지기 누가 안 보고 혼자 있을 때도 항상 처신을 바로 해야 한다’는 뜻의 ‘신독’(愼獨-君子必愼其獨也의 줄임말)이라고 쓴 휘호를 걸어놨다. 이는 LG가 내세우는 '정도경영'의 밑바탕이 됐다.
1987년 5월, 서울 우면동에 위치한 금성사 중앙연구소 준공식에 참석한 구 명예회장(왼쪽). 현재 LG 전자 우면동 R&D 연구소의 원형이다. 구 명예회장은 LG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고자 연구개발을 통한 신기술 확보에 주력했다. [사진 LG]
6·29 선언 직후 여소야대 정국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어수선했던 1988년, 전경련 회장이었던 고인이 “자유경제 체제를 수호하는 정당에만 정치자금을 후원하겠다”고 발언한 이유도 정치 민주화와는 별개로 시장경제 자체가 흔들려선 안 된다는 소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소탈한 성품은 고인이 쓴 회고록에서도 드러난다. 회고록『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는 “나는 주로 구태회 숙부의 옷을 대물림해 입었다” “조부께선 학용품도 하나를 다 써야 새것 하나를 꺼내 주셨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절약 정신을 익히게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낙연 국무총리 역시 지난 15일 소셜미디어 ‘트위터’를 통해 “회장님께서 1980년대 정부청사 인근 허름한 식당에서 일행과 수행원도 없이 혼자 비빔밥을 드시던 소박한 모습을 몇 차례나 뵀다. 회장님의 그런 풍모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을 키웠다”며 고인을 회고했다.
7년 전인 2012년 당시 구자경 LG 명예회장(앞줄 왼쪽 셋째)의 미수연. 고 구본무 LG 회장(앞줄 맨 왼쪽) 등 가족들이 참석했다. 뒷줄 왼쪽에서 둘째부터 구본준 LG 고문, 구광모 LG 대표 상무,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중앙포토]
여느 대기업 회장과 달리 고인은 자식들에게도 엄격했다. 고인의 장남인 고 구본무 회장, 차남 구본능 희성 회장, 3남 구본준 LG 고문, 4남 구본식 LT 그룹 회장 등 아들 4명 모두 육군 만기 병장으로 제대했다. 이는 LG 총수 일가에서 병역 문제가 지금껏 발생하지 않은 이유로 꼽힌다.
“신제품 아이디어는 다 고객에서 나옵니다. 고객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 회고록『오직 이 길밖에 없다』
고인은 또 고객과 대중에게 겸손했다. 회사가 잘되고 있더라도 결코 대중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4세 경영인인 구광모 LG 대표가 올 초 자신의 첫 신년사에서 ‘고객’을 30차례 언급한 것도 조부의 뜻을 이어받은 덕분이라는 게 LG 관계자의 전언이다.
LG는 구 명예회장이 취임했던 1970년 매출 260억원에서 퇴임한 해인 1995년 30조원 규모로 약 1150배 커졌다.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5배 증가했다. 1988년에는 국내 최초로 서울 우면동에 기업 중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재임 기간 중 70여개의 연구소를 세웠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1995년 2월 그룹 회장직을 맏아들 고 구본무 회장에게 물려주기 직전, 새로운 LG CI가 담긴 회사 깃발을 흔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LG]
고인은 1994년 럭키금성 사명을 LG로 바꾼 뒤, 다음 해 2월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돼 아직도 재계에서 회자한다. 고인은 또 1970년 2월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락희화학(LG화학의 전신)을 기업 공개(IPO)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선구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회장직을 퇴임하기 직전인 1990년 무렵에는 '자율 책임 경영체제'를 확립해 각 계열사 전문경영인에게 재량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총수 1인 체제를 유지했던 여느 대기업과는 달랐다. 이는 LG가 2003년 국내 대기업 집단 가운데 최초로 순수 지주사를 세우고, ‘집단 지성’으로 최적의 경영 결정을 내리는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