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권 보장 조치 논의 김정은..김일성은 민족의 태양 동북항일연군은 국군의 뿌리..12.30 update
- 허형식의 동북항일연군과 임표의 동북야전군
자주권 보장 조치 논의.. 김정은, 전원회의서 무장력·자립경제 강조…'새로운 길' 윤곽
허형식?
근대에 영국이 전세계를 제패한 것은 식민지 인도 덕분이었다. 열강이 인도보다 큰 중국 대륙에 군침을 흘리지 아니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자유민주 국가인 열강으로서는 이 대륙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 수가 없었다.
만주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기름진 지방이다. 자유민주 국가인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것은 이곳이 장작림 군벌 정권 치하에 비한다면 자유민주 세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자 장작림 세력과 마적들이 항일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의 중국인들은 그들을 외면했다. 한국인들은 독립군을 외면했다. 그래서 항일무장세력이 공산주의 깃발을 내걸어 보았다. 그런 그들을 중국인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한국인들만 관심을 보였다.
중국인들이 한국인들보다 수십 배 많으므로 항일무장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전자가 후자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다.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남만주에서는 한국인들이 중국인들보다 많았다. 북만주에서는 후자가 전자보다 많았지만 허형식이라는 특출한 인물의 등장으로 한국인들이 항일무장투쟁 주도권을 잡게 됐다.
허형식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은 의병장 허위의 사촌 형제 아들이다. 이 집안이 허위로 인하여 풍지박살 됐다. 이에 허형식 가족이 만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그들이 소작인으로서 살아갔다.
일찍 농사를 배우지 못한 관계로 엄청나게 고생을 한 허형식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는 그 고생을 안 시키려고 그에게 일곱 살 때부터 농사일을 가르쳤다. 허형식은 집안도 가난하고 농사일을 하느라고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보다 일곱 살 때부터 지게 지고 땅을 판 관계로 인격 성장에 지장 받게 됐다.
허형식과 대비되는 사람은 김경천이다. 김경천의 일기에 어린 시절 무척 고생을 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는 갑부의 아들이었다. 한국에서 신식교육 최고의 교육을 받고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고생은 정신적인 것으로 인격 성장에 기여했다.
허형식이 성장하자 항일무장투쟁 대열에 들어갔다. 그는 군사 교육이고 학교 교육이고 못 받은 사람이었다. 이보다 인격이고 무엇이고 부족한 자신을 잘 아는 관계로 졸병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그러나 양정우, 조상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물이 됐다.
조상지는 만주항일 첫 번째 영웅이었다. 따라서 뛰어난 인물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조상지는 그들을 재간에 맞게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석가 제자들이 그를 제거시키려고 하듯이 조상지 부하들이 제거시키려고 했다. 그가 부하들에게 떠밀리듯이 하여 소련에 들어갔다. 조상지 입장에서는 소련한테 지원을 받아야만 항일무장 세력의 소멸을 막을 수가 있는 관계로 목숨을 걸고 소련에 들어가야만 했다.
조상지가 소련으로부터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 서열인 허형식은 한국인인 관계로 이조린이 조상지의 자리에 앉게 됐다. 그러나 이조린도 누란의 위기에 처한 동북항일연군을 구할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에게 실망한 그들이 허형식 아래에 모여들었다. 자신으로서도 뾰쪽한 수가 없는 그는 이판사판으로 관동군, 만주국군과 정면대결을 벌였다.
풍지광, 왕명귀, 장광적 등 특출한 인물들이 항일무장투쟁 대열에 들어갔다. 양정우, 주보중, 조상지 아래에 있을 수가 없는 그들은 허형식의 부하가 됐다. 풍지광, 왕명귀, 장광적 등은 부대장이 되자 조상지를 제거시킬 계획을 꾸미는 이조린에게 협조해주었다.
간도의 영용한 인물들인 장상룡, 박길송, 이종산, 양달룡 등은 양정우, 주보중 아래에 있을 수가 없었다. 동포인 김일성을 받들어보았으나 이 사람은 두 사람만도 못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장상룡 박길송, 이종산, 양달룡 등이 북만주로 가서 허형식의 부하가 되었다. 그들은 그의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허형식의 사망 뒤에 살아남은 장상룡은 소련으로 들어갔다.
허형식은 삼국지를 즐겨 읽었다. 조조가 유비, 손권을 없애지 못한 것은 장비가 20 기를 데리고 조조의 5000 기를 막아냈기 때문이었다. 허형식은 자신이 장비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처럼 수십 기를 거느리는데 관동군은 조조처럼 5000 기가 아니라 100만 명이고 비행기, 탱크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아래의 것은 유순호의《만주항일 파르티잔》에 있는 내용이다.
『조상지, 주보중, 최용건, 김성주… 이들은 모두 소련 땅으로 달아나고 허형식 홀로 남아 일본군과 싸웠다.
ㅡ 당시 일본군이 비행기,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동북항일연군 소탕작전을 벌였다. 백마를 탄 허형식이 북만주 평원을 무인지경 드나들듯 했다. 군청, 경찰서를 점령하고 군수, 서장을 총살시켰다. 은행을 털어 현금과 금덩이를 빼앗았다. 현금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ㅡ 당시 한반도에서 김일성장군이 백성들에게 돈을 나누어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철퇴하던 허형식 부대가 일본군 군용열차를 만나자 전복시켰다. 하얼빈 헌병대의 군사지도에 허형식이 불을 지르고 간 곳을 시뻘건 화살표로 표시했는데 그 화살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만주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기름진 지방이다(자원매장량은 첫째, 둘째를 다투고 있다). 이런 지방을 중국인과 한국인들은 기피해왔다. 그래서 서유럽보다도 넓은 만주의 인구가, 요녕성을 제외시키면, 100만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근대에 이르러, 수억 중국인들 사이에 만주로 이주하는 붐이 일어났다. 이에 만주 인구가 단박에 수천만 명에 달했다. 러시아를 무서워하는 중국인들은 이 나라에 떼어준 태평양 연안 동만주로는 이주하지 못했다. 이곳으로는 한국인들이 이주했다.
시베리아전쟁 때에 연해주의 한국인들이 일본군을 격파시켰다. 이때 일본군인들 사이에 김일성 한 사람 때문에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소문이 퍼졌다.‘김규면 비망록’에는, 일본정부가 연해주의 한국인 3십만 명을 한반도의 3천만 명보다도 두려워했다고 기록돼 있다.
시베리아전쟁 때에 김일성 한 사람을 러시아 군대 전체보다 두려워했던 일본군인들이 태평양 전쟁 때에는 조상지를 김일성의 아바타로 보았다. 이때 일본군과 소련군에서‘작디작은 만주국 크나큰 조상지’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조상지는 위에서 밝혀놓았듯이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그를 만주국보다 큰 존재로 본 이유는 허형식이나 이조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서만주의 양정우의 동북항일연군은 관동군의 대공세로 궤멸했다. 그 전에 김일성은 부하들을 데리고 소련으로 도주했다. 동만주의 주보중은 그를 뒤따라 그곳으로 들어갔다. 북만주의 항일연군은 허형식의 사망 전후해서 하바롭스크에 들어갔다. 소련 극동 사령부에서, 비행기, 탱크까지 동원한 관동군 100만 명과 싸은 허형식 부대의 존재로 인해 그들 동북항일연군을 해체시키고 자기 부대에 편입시키지 못했다.
이조린을 두려워하는 소련 극동 사령부에서 주보중에게 그들 동북항일연군을 맡겼다. 만주로 진격해 관동군을 격파시킨 소련군이 이 지역을 주보중에게 의존하여 다스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능력부족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주보중을 이조린으로 대체시켰다. 동북야전군은 이조린이 창설했다.
나영환이 동북야전군을 창설한 공적으로 원수 계급을 받았다. 이 계급을 받은 문관출신은 그 한 사람 뿐이다. 주은래고 유소기고 등소평이고 모두 원수 계급을 받지 못했다. 이에 미루어 볼 때 동북야전군을 창설한 그의 공적은 모택동이고 누구고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북과 연고가 없는 나영환으로서는 단기간에 이곳의 사람들로 대부대를 편성할 수가 없었다.
동북야전군은 만주 주민들로 편성됐으나 그 중요 직책은 모조리 연안, 산동의 공산당이 파견한 자들이 차지했다. 그래서 동북야전군이 국민당 군대에게 궤멸 당하게 됐다. 이때 동북야전군의 숨통이 안 끊어진 것은 만주에 주둔한 소련군 덕분이었다.
동북야전군은 재기불능하다고 본 모택동, 주덕, 임표, 나영환 등 공산당 수뇌부가 이 부대에서 손을 뗐다. 이에 이조린, 허형식의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 단독으로 동북야전군을 재편성하였다.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야하므로 사령관, 정치위원을 맡을 수가 없는 그들은 두 직책을 내놓았다. 이에 임표가 동북야전군 사령관과 정치위원을 겸임했다.
허형식의 동북항일연군 3로군 출신들을 주로 하여 편성한 동북야전군에는 수십 기가 비행기, 탱크까지 동원한 관동군 100만 명과 맞짱 뜨는 기백이 어려 있었다. 연안, 산동에서 파견한 자들이 동북야전군 본부와 일선의 지휘관들을 모두 맡으매 그 기백을 잃어버렸다. 그들이 물러나고 허형식의 3로군 출신들이 그 지휘관들을 맡자 잃었던 기백을 되찾았다.
소련군이 철수한 만주에서 국민당 군대와 재대결을 벌인 동북야전군이 승리하여 그들을 몰아냈다. 나아가 요심전역에서 그들을 대파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중국인민공화국에서 동북항일연군 간부였던 주보중 등은 모두 장군이 되지 못했다. 반면에 허형식의 부하였던 풍지광, 왕명귀, 장광적 등은 장군이 되었다. 허형식의 부하들로 풍지광 등 외에도 졸병이었던 사람들이 별을 달았다.
한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을 공산당 군대로 보고 있다. 그들은, 동북항일연군이 중국공산당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소련공산당, 곧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허깨비였다.
동북항일연군은 한국인, 중국인들로 편성한 부대였다. 중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렇다면 이 군대가 한국을 위한 군대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한국인들보다 훨씬 많은 북만주 항일연군에서 허형식이 실권자가 된 것이었다.
만주의 중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을 외면했다. 간도의 한국인들만 그들을 지지했다. 이에 만주국 정부가 간도의 한국인들을 북만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김경천의 일본육사 후배 윤상필은 수석으로 졸업했다. 김경천은 육사역사상 최우수 졸업생으로 평가받았지만 졸업성적은 수석이 아니었다. 일본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윤상필은 별을 달 수가 있는 데도 예편하고 만주국 관리가 됐다.
만주국의 실세가 된 윤상필이 간도의 한국인들을 하얼빈으로 이주시키고 보살펴주었다. 이에 비록 그 일을 음지에서 했지만 그들이 잘 살고 더하여 북만주를 주물럭거리게 됐다. 만주국이 붕괴하고 윤상필이 하바롭스크로 끌려가자 중국인들이 그 한국인들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자 소련군을 등에 업고 만주를 다스리는 이조린이 이들을 보호해주었다.
서평전투에서 공산당 군대를 궤멸시킨 국민당 군대가 북만주를 제외한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북만주를 기반으로 해서 재기했다. 이때 이곳의 중국인들은 그들을 혐오했으므로 그 재기의 배후에 북만주를 주물럭거렸던 한국인들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만주에서 주민들이 관동군과 만주국군 몰래 동북항일연군을 도와주었다는 증언이 많이 있다. 관동군 100만 명과 싸우는 수십 기 허형식 부대가 나타나면 주민들이‘만세!’를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북만주 중국인들은 동북항일연군을 외면했으므로 그 주민들은 한국인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인들이었다는 증언은 없다. 따라서 그 배후에 한국인들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한테 인심을 얻는 일이 급선무인 이조린이 그들에게 거슬리면서 북만주의 한국인들을 보호해주었다. 국민당은 그런 그를 특공대를 파견해 암살했다. 만주에 들어온 국민당 군대는 한국인들을 만주국 정부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죽였다. 이때 이 정부는 군대고 무엇이고 모두 국민당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1940년대에 김일성 장군이 만주에서 백마를 타고 일본군과 싸우고 있다’는 소문이 한반도 방방곡곡에 퍼졌다. 이때는 신문, 라디오도 있고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만주, 한반도를 안방, 바깥방 드나들듯 하는 시대이었으므로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고 보아야만 한다. 당시 허형식이 북만주에서 백마를 타고 관동군과 싸웠다. 이 사실이 북만주 한국인들의 입을 통해 한반도에 전해졌던 것이다.
허형식은‘이희산’이라는 익명으로 활약했다. 앞에서 말한 윤상필은, 자신을 포함한 한국인들 그리고 일본인들이 김일성으로 본 김경천과 절친했다. 홀로 관동군 100만 명과 맞짱 뜨는 일은 김경천이나 그의 아바타만이 할 수가 있다. 윤상필이 허형식을 김경천의 아바타 그러니까 김일성으로 보매 북만주 한국인들이 허형식을‘이희산’익명과 함께‘김일성’으로 불렀다. 그래서‘백마 탄 김일성’장군 소문이 한반도 방방곡곡에 퍼진 것이었다.
해방 후 허형식을‘김일성’으로 불렀다고 말하는 북만주의 한국인들은 없었다. 이것은 북한의 김일성 존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한반도에서 세 살 아이부터 여든 살 늙은이까지 알았던 김일성은 북만주의 한국인들이 허형식에게 붙여준 이름이라면 김일성 존재고 지랄이고 그 사실을 말하는 북만주의 한국인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인즉 그들은 비록 은유적이지만 그 사실을 밝혔다. 오늘날 현재 하얼빈에서,‘이육사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이조린’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주권 보장 조치 논의..민족의 태양 동북항일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