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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스타코비치의 재즈/댄스/필름 앨범
쇼스타코비치는 고뇌에 찬 표정으로 줄담배를 연달아 피워대는 탄압받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우리 뇌리에 박혀 있기 십상입니다. 이러한 인상은 여러 일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의 고단했던 그의 삶의 여정 때문이기도 하고, 또 거대하고 격렬하면서도 어딘지 억눌린 듯 비틀린 유머로 가득한 그의 교향곡들이 주는 느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쇼스타코비치는 엄청난 양의 소위 ''가벼운'' 음악의 작곡자이기도 합니다. 오페레타나 발레, 영화음악 등의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덜 진지한 음악을 일컫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진지함과 희유성이라는 두 가지 면모의 쇼스타코비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 장의 음반은 瀏?歐?후자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증거입니다.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익살스럽고 위트에 찬 패러디가 있고, 때로는 씩씩한 리듬에 호쾌한 행진곡이 울려 퍼집니다. 눈부신 관현악의 향연에 빠져 들다 보면, 세 장의 음반이 끝날 무렵에는 그동안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를 이 천재 작곡가에 대한 왜곡된 일면적인 인상이 상당히 해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리카르도 샤이가 90년대에 데카 레이블로 차례로 내어 놓은 이 세 장의 음반에는, 각각 Jazz Album, Dance Album, Film Album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정통 레퍼토리 뿐만 아니라 현대음악에 있어서 특히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이 유능한 지휘자에 대해 여기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샤이의 음반들은 대부분 곡의 핵심을 꿰뚫은 명연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역동적이고 눈부신 연주만으로도 하나의 모범이 되는 음반들이 아닌가 합니다. 이 세 장의 쇼스타코비치 음반에서도 각각 콘서트헤보우, 필라델피아, 다시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기용하여 빼어난 연주를 들려 주고 있습니다. ''가벼운'' 장르의 음악이라 하여도 결코 그저그런 이류 음악이 아님은 일단 들어보면 누구라도 공감하지 싶습니다. 데카의 선명한 녹음이 대편성 관현악 감상의 쾌감을 더합니다.
The Jazz Album Dmitri Shostakovich, Jazz Suite #1, Piano concerto #1, Jazz Suite #2, Tahiti Trot. Riccardo Chailly/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1988-91년 녹음, Decca.
''재즈''라고는 하여도 이 음반에 실린 음악들은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재즈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재즈 모음곡''이라고 이름 붙은 곡들에서조차도 그러합니다. 그저 가벼운 대중적인 음악 장르 어법의 영향을 받았다는 정도일 뿐입니다. 쇼스타코비치는 폐쇄적인 소비에트 체제의 시각으로 걸러진 재즈를 접했을 뿐이기 때문이죠. 그나마 제1모음곡에서 20년대적인 퇴폐성의 그늘이 좀더 느껴지는 편이라면 제2모음곡 같은 작품에서는 오히려 빈 왈츠의 영향이 뚜렷합니다. (제2모음곡의 한 악장인 감미롭고 향수에 찬 ''왈츠2''는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재즈'' 모음곡이라는 명명이 합당하느냐는 의문을 떠나서, 오히려 이 앨범에 실린 곡들은 눈부시고 위트에 찬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관현악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만합니다. 이 음악들, 특히 그 힘찬 투티 부분들에서 저는 겨우 길들여 놓은 야수와도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왈츠''니 ''폴카''니 하는 제목들이 악장마다 붙어 있지만, 그러한 추상적인 형식이 잡아 가둘 수 없는 젊은 쇼스타코비치의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음악입니다. 보다 늦은 시기의 음악들이 포함되어 있는 나머지 두 음반들에서도 어느 정도 이런 인상이 계속됩니다.
The Dance Album Dmitri Shostakovich, Moscow-Cheryomushki : suite from the operetta, The Bolt : suite from the ballet, The Gadfly : excerpts from the film music. Riccardo Chailly/Philadelphia Orchestra, 1995년 녹음, Decca.
1995년에 녹음된 The Dance Album에는 각각 오페레타, 발레, 영화음악으로부터의 모음곡 혹은 발췌곡인 세 작품이 들어 있습니다. 초연 녹음이기도 한 코믹 오페레타 Moscow-Cheryomushki 모음곡은 그 원작이 1959년에 상연되었습니다. 익살과 패러디가 뒤섞인 이 신나는 음악은, 원숙에 경지에 오른 50대의 대가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표 정치선전 작품에서 잠시 벗어나 넥타이 풀고 가벼운 마음으로 낄낄거리며 즐기면서 곡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가지게 합니다. (참고로 이 곡은 각각 1905년의 민중봉기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다루고 있는 11번(1957) 및 12번(1961) 교향곡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발레 The Bolt 모음곡은 1930년대의 것으로, 젊은 시절의 작품답게 힘차고 호쾌한 관현악이 일품입니다. 원작의 스토리는 상당히 촌스러운 사회주의적 도덕극인 모양이지만, 서곡 첫머리에 등장하는 차이코프스키 4번 교향곡 금관 서주의 패러디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다행스럽게도!) 쇼스타코비치는 극의 내용에 진지하게 반응하기보다는 그저 음악 만들기의 즐거움에 탐닉한 듯합니다.
세번째 곡은 영화 The Gadfly(1955)에 붙였던 음악의 일부인데, 원곡의 형태를 최대한 살린 발췌 음악이라고 합니다. 차이코프스키를 생각나게 하는 상당히 낭만적이고 큰 제스처의 음악이라서 이 음반에서는 가장 쇼스타코비치스러운 맛이 덜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래서 다소 맥빠진 느낌도 들지만), 너무도 잘 알려진, 마약처럼 감미롭고 달콤한 바이올린 솔로가 붙어 있는 Romance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기용한 스튜디오 녹음입니다. 그래서인지 콘서트헤보우 Grotezaal에서 녹음된 다른 두 음반과 달리 잔향이 약간 억제되어 건조한 듯한 녹음입니다. 하지만 아주 선명합니다.
The Film Album Dmitri Shostakovich, The Counterplan 발췌, Alone 발췌, The Tale of the Silly Little Mouse, Hamlet 발췌, The Great Citizen 중의 장송행진곡, Sofia Perovskaya 중의 왈츠, Pirogov 중의 스케르쪼, The Gadfly 중의 로맨스, Pirogov 중의 피날레. Riccardo Chailly/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1998년 녹음, Decca.
이것도 기획된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세 음반의 연주시간이 59분, 73분, 78분으로 뒤로 갈수록 점점 늘어납니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음반에는 무려 78분간의 매혹적인 음악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흠, 그러니 시간으로만 본다면 더 이상의 속편은 나오기 어렵다고 봐야겠지요...^.^ 사실 쇼스타코비치는 가난한 학생이던 17살 때부터 "영화관에서 피아노를 두드려 대며 근근히 생활을 해 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영화음악 작업은 1929년에 처음 시작되어 1967년의 Sofia Perovskaya에 이르기까지 거의 평생 계속됩니다.
이 음반에서도 전체적으로 이전의 두 음반에서와 유사한 분위기의 음악이 계속됩니다. 재치있는 위트와 씩씩하고 호쾌한 행진곡풍의 춤곡이 교차되는 가운데, 감미롭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끼어들곤 하는 식이지요. 예외가 있다면 Alone에서 섬뜩한 음향으로 폭풍을 묘사하는 부분 정도입니다. Dance Album에서 이미 써먹었던 영화 Gadfly의 음악 가운데 유명한 Romance 부분만을 (물론 약간 다른 분위기의 새로운 연주이지만) 또 들려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 서정적인 멜로디의 상업성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요.
세 장의 음반을 통틀어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심각하고 집중된 정서의 표현이나 비극적 유머를 담은 뒤틀린 아이러니 같은 것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장난스럽고 상냥한 쇼스타코비치의 웃음이 연상되는,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Romance나 말년의 Sofia Perovskaya 중의 Waltz 같은 놀라우리만치 복고적이고 감미로운 곡들을 가만히 들으면서, 짙은 향수와 쓸쓸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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