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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因緣이 고이는 방
* 이석기와 종북을 말하다 본문
[이 사람]
이석기와 종북을 말하다
'주대환'
“주사파 정체 숨기고 공직 진출 …
그 가면극 모른 척한 진보 책임 크다”
한국 진보는 반미 민족주의가 핵심 28년 동안 주사파가 놀 수 있는 물
진보, 통일 위해서 반미서 벗어나야 주사파 3~4년 지나면 다 정리될 것
▲ “이번에 폭로된 것은 주사파의 맨얼굴만이 아니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연대 주대환 공동대표. 반미와 진보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진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그들도 아픈 역사의 자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통념과 전례 등에 비춰볼 때 묵과할 수 없는 친북적인 발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석기 체포동의안이 통과된 건 옳았다고 본다.”
사회민주주의연대 주대환(59) 공동대표의 말이다. 애증이 엇갈린다. 주 대표를 5일 만나 통합진보당(통진당) 이석기 의원 사건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아픈 역사’는 학생운동이 극성했던 1980년대를 가리킨다. 이 의원을 비롯한 주사파(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그룹)는 그 시대의 산물이란 것이다.
주사파가 우리 대학가에 등장하던 85년 무렵 주 대표는 국내 최대 노동운동 단체인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었다. 주사파의 등장은 그에게도 충격이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80년대 대학가 운동권의 상황을 두루 회고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주사파가 28년이 지난 2013년의 국회에까지 들어가 활동하게 된 배경으로 ‘반미 민족주의’를 지목했다.
주사파의 핵심 세력만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반미와 진보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주사파가 민주인사·진보인사로 포장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폭로된 것은 주사파의 맨얼굴만이 아니다”면서 “한국의 진보는 그 핵심을 반미 민족주의로 삼아왔다. 이는 후진국형 진보의 특징이자 주사파가 놀 수 있는 물이다. 이제 이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73년 서울대 종교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운동가로 활동한 주 대표는 민주노동당(민노당) 창당에 관여했고 2004년엔 정책위의장까지 지냈지만 2008년 주사파가 관련된 분당 사태를 맞아 탈당했다. 이후 사회민주주의연대를 창립해 유럽의 복지국가식 사회민주주의 확산에 주력하면서 새로운 진보운동을 이끌고 있다.
- 통진당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되고 강제구인 절차까지 마쳤다.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재동 연구소에서 여기(서소문 중앙일보사)까지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그들도 아픈 역사의 자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번 사건을 보면 주사파 운동이 종막에 이르렀다고 느낄 수 있다. 85년 시작됐다고 보면 28년이다. 지루하고 오래됐다. 앞으로 3~4년만 지나면 다 정리가 될 것 같다. 이것을 역사적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 역사적 맥락이란.
“주사파 운동이 왜 생겼느냐. 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우리나라 경제는 이미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했다. 여러모로 민주화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전두환 장군이 무리하게 군사독재를 7년이나 연장하려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광주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주사파는 그러한 아픈 역사가 낳은 자식이다. 그것을 제일 먼저 말하고 싶다.”
- 주대환 대표는 8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했고 90년대 이후엔 제도권에 진출해 주사파 그룹과 민노당을 같이했는데.
“민주노동당을 처음 만들 때 그 사람들이 민노당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을 안 했다. 민노당은 그들(주사파)과 전혀 무관하게 만들어졌다. 자기들이야 어떤 연유로 들어왔겠지만 우리는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다. 난 민주노동당 훨씬 이전, 80년대 중반에도 그 친구들 주장에 처음부터 동의하지 않았다. 나도 북한 방송도 많이 들어보고 했다. 몇 번만 들어보면 빤하다. 판단이 선다.
그런데 멀쩡한 친구들이 북한 방송을 듣고 추종하는 것이 처음부터 이해 안 됐다. 그런데 민주화 운동을 한 선배들이 80년대 친구들에게 ‘후배들아, 그게 아니다’고 하지를 못한 것이다. 우리의 잘못이다. 오히려 일부는 그 친구들에게 휩쓸려 가기도 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이 배출한 주사파가 한 해 수천 명씩 쏟아져 나왔다. 전성기에는 수만 명씩 됐을 것이다. 그렇게 많이 쏟아져 나왔으면 나라가 망하거나 할 것 같은데 그걸 다 소화시켜 내고 끄덕도 안한 게 대단한 거다.”
- 이석기 의원 녹취록에 나오는 북한식 용어와 표현을 어떻게 봐야 하나.
“우리가 이번에 본 것은 유사 종교집단의 집회다. 남북이 긴장 국면에 들어서는 것을 빌미 삼아 유사 종교집회를 연 것이다. 130명이나 모이는 집회를 자주 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추측건대 조직원들이 동요했을 거다. 불안해하고 마음이 흔들리고 기강이 해이해지고 하니까 불러 모아서 전쟁이 터질 수도 있다고 긴장을 조성한 것이다. 그런 상황, 즉 종말이 오면 어떻게 할 거냐 물은 거다. 자신들은 이미 국정원에 파악이 되어서 전쟁 나면 제일 먼저 죽을 수 있다고 하는 식이다.
신도들은 평소 자신의 생활이 해이하고 혁명가로서 규율을 지키지 않는 바를 고백했다. 분반 토론회에서는 ‘유사시 한 놈이라도 찔러 죽이고 죽겠다’든지, 총을 어디로 가면 구할 수 있다든지, 폭탄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조직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신앙 고백이다. 그러고 나서 또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에 미국이 절대로 못 건드린다고, 전쟁이 안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전쟁이 터질 수 있다고 해놓고 뒤에 가서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달래면서 마무리를 하는 거다.”
- 무기를 동원하고 국가 시설을 겨냥하는 얘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단순히 유사 종교집회라고 하기엔 문제가 좀 더 심각한 상황 아닌가.
“이번 사건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고 본다. 주사파가 있는 것은 다 알고 있었지 않나. 다만 자기들끼리 집회를 비밀스럽게 하다 보니까 외부 인사가 들어가 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내부자의 폭로로 그 내용이 드러난 거다. 그러자 지식인·언론인·정치인들이 몰랐었다는 듯이 굉장히 놀란 척하는데 정직하지 못한 거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28년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언론계·학계·정계 중견을 차지하고 있는 40~50대는 같은 또래이고 친구들 아닌가. 다 알고 있었으면서 놀란 척하는 거다. 나는 그들을 고발하고 싶다. 특히 지금까지 진보 지식인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해왔다. 이번에 폭로가 된 것은 주사파의 맨얼굴만이 아니다. 진보 지식인과 진보 언론의 부정직이다.”
- 북한은 모든 게 다 애국적이라고 하는 등 28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각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 친구들을 감옥으로 보낼 게 아니라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실정법상 감옥에 보낸다고 해도 정신과적인 치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수사 과정에서도 강압적인 수사를 할 게 아니라 정신과 의사가 상담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광신적 종교집단이 그렇듯이 선과 악의 프레임이 있다. 이 프레임이 깨지게 되면 자신의 생각과 판단 기준이 다 흔들린다. 그 때문에 쉽게 벗어나지를 못한다. 슬프게도 그것이 인간이다.”
-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야권의 주류 대부분은 진보는 곧 반미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석기 부류처럼 종교적 신앙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보면 진보는 곧 반미여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나는 이를 ‘반미 민족주의’라고 규정한다. 한국의 진보는 그 핵심을 반미 민족주의로 삼아왔다. 이는 후진국형 진보의 특징이자 주사파가 놀 수 있는 물이다. 이제 바로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
- 주사파가 80년대 대학 운동권을 장악한 배경은 뭐였나.
“서울의 봄이 왔다. 누구나 당연히 민주화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전두환 체제가 들어섰다. 박정희 유신체제보다 권위도 없고, 순전히 물리적인 힘으로 군사독재를 했다. 더욱이 광주시민의 피로 얼룩진 정권이었다. 어른들이 방관하는 가운데 전두환 정권을 몰아내는 민주화운동은 20대 초반 대학생들의 몫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들이 좌절감을 느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북한의 존재를 일깨웠다.
민주화운동은 힘이 약한데 북한이 우군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지고 북한이 대단한 존재로 보이게 됐다. 그것이 주사파 운동의 발생 원인이다. 주사파 운동은 처음에 일종의 사상 혁신이었다. 남한 내부만 보면 군사독재는 강하고 민주화세력은 조그만데 한반도로 넓혀서 북한을 민주화세력으로 보니까 오히려 민주화세력이 우세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야가 확 열린다는 착각을 했다. 진짜 북한이 우군인지 아닌지 따져보지도 않았다.”
- 주사파의 폐해를 언제부터 알았나.
“86년 등장 때부터 나는 이 주사파의 병폐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전에도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는 계속 북한 의존 노선이 있었다. 나는 남한의 진보운동을 분열시킬 최대의 문제는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를 들면 서유럽의 좌파 정당은 소련 공산당과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분열했다. 의존을 하고 따를 것이냐 독자적인 길로 갈 거냐.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었다.
소규모 지식인 서클에 그치기는 했지만 통혁당은 의존노선, 인혁당은 독립노선 이런 식으로 노선 차이가 있었다. 그것을 잘 그린 소설이 있다. 일본 재일교포 이회성씨가 쓴 『금단의 땅』이다. 남한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북한과의 관계를 놓고 노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그리고 있다.”
- 90년대 소련이 해체되고 탈냉전의 시대가 됐는데 한국에선 극단적 이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80년대 우리나라에 불었던 좌파의 바람은 세계사의 시간표로 보면 늦어도 너무 늦었다. 80년대 전두환 시절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청년들의 좌경화 현상이 있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서 소련이 해체됐다. 운동권의 일부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프레임을 바꾸거나 했지만 다수는 그런 것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다. 그들과 이야기할 경우가 있는데, 어떨 때 보면 알코올이 얼마나 들어갔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멀쩡한 이야기 하다가 알코올이 좀 들어가면 마음의 밑바닥에 있는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두 얼굴의 사나이도 아니고. 멀쩡하게 직장생활 잘하고 훌륭한 가장이 술자리에서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불행한 486세대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비단 이석기 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 시절 머릿속에 형성된 프레임은 잘 깨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엄청난 성찰을 해서 완전히 한번 죽었다 깨어나지 않으면 그 프레임을 깰 수가 없다.”
- 90년대 후반 이후 북한 정보가 많이 전해지면서 실상이 드러났는데도 생각을 바꾸기가 그렇게 힘들까.
“그것보다 더한 일이 있어도 믿음은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다. 하지만 대다수는 바뀌었다. 80년대 쏟아져 나온 수만 명, 수십만 명에 비하면 지금은 소수가 남았다. 이제 그 친구들이 자유롭게 활동을 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예컨대 서독에 독일 공산당이 있었다. 동독 집권당인 통일사회당의 서독 지부였다. 동독을 지지했는데 지지율이 1~2%였다. 의회 진출은 못했지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이 테러를 하면 제지를 하겠지만 말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던 거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고 본다. 그들(주사파)이 자기 정체를 속이고 국회나 지방의회 같은 공직으로 진출했다는 것이다. 누구 책임인가. 그들이 가면을 쓰고 춤을 추어도 모른 척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들의 정체를 숨겨주는 게 진보 진영의 문화가 됐다. 그들의 가면극을 방조한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이 국민을 속이고 민주인사·진보인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을 방치하고 방조한 것은 민주당뿐만이 아니다. 진보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정직하지 못함은 작년 두 번 선거에서 크게 심판받았다. 국민이 안 속은 거다.”
- 향후 주사파에 대한 대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들도 학생일 때 민주화의 길을 찾다가 주사파로 들어선 것이고 아직 그 프레임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이 됐고 70대 노인이 바로 옆에서 20대 여성이 담배 피우는 것을 뭐라고 하지 않는 시대가 됐지 않나. 관용이 있는 사회가 됐는데 주사파들을 유사 종교단체나 사상단체로는 인정해줄 수 있지 않겠나. 다만 정체를 숨기고 공직에 진출하는 것은 사회 전체가 막아야 한다.”
- 국정원의 선거개입 의혹을 야권이 정치 쟁점으로 키우는 가운데 이번 사건이 터졌다며 ‘국정원의 물타기’를 지적하는 시각도 있는데.
“물타기라는 거야 너무 뻔해서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있겠나. 그 문제와는 별개로 내란음모 이런 것은 오버다. 녹취록을 꼼꼼히 읽어봤다. 내란음모로 가는 것은 안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통념과 전례 등에 비춰볼 때 묵과할 수 없는 친북적인 발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석기 체포동의안이 통과된 건 옳았다고 본다. 구속 수사는 해야 한다.”
- 진보의 재구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반미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친미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오랜 전통이고 전략 노선이다. 독립협회 시절부터 열강인 청나라, 러시아, 일본 등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멀리 있는 미국을 끌어들이는 발상을 했다. 그런 전통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도 통일 이후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더욱이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국이 되려고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중국 옆에서 어떻게 독립을 유지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적당한 친미는 통일과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종북 연구 25년,
유동열 박사가 본 이석기
“RO 130명 내란 가능? 차고 넘치는 숫자
압수수색한 계좌에 밝히기 곤란한 거액”
▲ 유동열 박사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우리 사회에 퍼진 악성 암세포라고 진단했다. 종북세력에 대한 관대함에서 벗어나 비판 목소리를 내야 제2, 제 3의 이석기 등장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사람들은 그를 ‘종북 퇴마사’라고 부른다. 우리 사회에 암덩이처럼 퍼진 주사파·종북세력의 행태를 진단·분석하고 퇴치방안을 연구하는 게 그의 직업이다. 유동열(55)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선임연구관. 1989년 1월 경찰청 공안문제연구소 연구관으로 첫발을 들여놓은 그는 25년 동안 외길을 걸었다.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전술과 이와 연계된 국내 간첩·종북세력 연구로는 독보적 존재다.
경기도 용인 경찰대 내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비밀이나 대외비라고 빨간 도장이 찍힌 문건이 하루에도 수십 건 쌓인다. 국내 종북세력의 동향과 해외 체류 북한 공작원과 친북 인사들의 움직임 등을 담은 첩보 보고서가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관련 파일 등 따끈따끈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6일 그를 만나 이석기 사건에 대한 생각과 처방을 들어봤다.
- 내란음모 사건이 온 나라를 충격에 빠트렸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올 것이 온 것뿐이다. 친북·종북세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묵인과 관용이 이런 사태를 부른 것이다. 종북을 종북이라 비판하지 못했다. 내란음모 종북세력의 핵심에게 ‘존경하는 의원님’이라 불렀다. 뭐가 존경스럽다는 말인가.”
- ‘RO(Revolution Organization)’와 같은 조직이 등장했다. 과거 간첩·종북 사건과 비교하면 어떤 특징이 있나.
“지하에 암약하던 종북세력이 김대중·노무현정부 10년을 거치며 제도권으로 올라왔다. 그 탄력으로 국회라는 합법적 공간까지 침투한 것이다. 유럽식 의회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폭력혁명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눈에 띈다. 국가적 망신이자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 130명의 RO 조직으로 내란이 가능하냐는 주장도 일각에서 나온다.
“공산주의 전략전술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레닌은 비합법적인 소수 정예요원으로 혁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 지침은 종북·주사파에 유효하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3명의 노동자 해방동맹에서 시작해 레닌 시기 17명에서 46명으로 늘려 가며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 인구는 1억5000만 명이다. 중국도 공산주의 소조 50명이 씨앗이 됐고, 쿠바의 카스트로도 80명으로 혁명을 주도했다. 130명은 차고 넘치는 숫자다.”
- 국내 종북세력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 ① 1999년 당시 국가정보원 엄익준 2차장이 민족민주혁명당 간첩단 수사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② 97년 침투한 간첩 최정남·강연정 부부가 사용한 장비들. ③ 고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 측근 암살을 계획하다 2011년 검거된 간첩이 보관했던 볼펜형 독침과 만년필형 총, 손전등형 총. [중앙포토] / 이미지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직업적으로 ‘혁명가’라 부를 사람만 3000명 정도다. 학원·노동계와 재야에 포진돼 있다. 그중 극히 일부가 이번에 드러난 RO라 할 수 있다. 제2, 제3의 RO가 있다는 얘기다.”
- 총기 무장과 핵심 군·산업시설 테러 등이 녹취록에 등장했다. 이석기는 종북 주사파의 전형인가, 아니면 돌연변이인가.
“북한 김정은이 3~4월 대남벌초 발언을 했다. 제주도에 인공기를 꽂겠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니 5월 들어 RO 모임을 급히 소집해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왔다고 본 것이다. 과대망상이 아니라 지하혁명가들이 무장폭동을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 북한은 유화 국면으로 돌아섰다. 이석기의 판단이 잘못된 건 북한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했다는 정황 아닌가.
“판단 오류라는 건 우리 식으로 볼 때고, 걔들(RO 세력)은 혁명을 준비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북한으로부터) 지령이 왔거나 뭔가 있었을 것이다.”
- 루블화 등 돈다발이 압수수색에서 나왔다. 북한과의 연계를 밝히는 데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게 중요할 텐데.
“압수수색된 통장 계좌에 금액을 밝히기는 곤란한 거액의 돈이 있다. 과거처럼 라면 끓여 먹으면서 혁명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과거 북한 공작금과 연관되지 않은 지하조직은 없었다. 민혁당의 경우도 96년에 김영환이 40만 달러를 받았다. 후임자 격인 하영옥도 엔화 50만 엔을 받았다. 수사가 진행 중이라 곧 구체적인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 이석기의 경우 돈 관리를 어떻게 했나.
“지하조직은 사상과 조직·자금 등 3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이석기는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RO란 조직이 있었다. 그리고 돈으로 조직을 관리했다. 지역조직의 책임자에게는 직업을 줬다. 경기도·수도권의 급식소 등 책임자 자리다. 그들은 월급 중 일정 부분을 다시 RO로 돌려준다. 나머지 조직원은 국회 보좌관이나 월급 나오는 자리에 앉혀 준다.”
- 그 정도 자금이 어떻게 조달될 수 있었나.
“통진당은 2010년부터 정당 보조금 95억원을 받았다. 이 중 상당 부분이 이석기 개인회사 쪽으로 선거비용 명목으로 흘러갔다.”
- 이석기에 대한 조직원들의 충성도가 상당한 것 같다.
“이석기만을 위한 10여 명의 경호팀이 운영됐다. 이석기가 행사를 위해 출발하면 ‘수(首)께서 출발하셨나’라고 통신을 하고, 도착 의전을 하는 방식이다. 압수수색·구속 과정에서 폭력적인 저항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 북한이 이번 사태에 대해 비난 논평 등 없이 사실상 침묵하고 있다.
“과거 왕재산·일심회 사건 때는 ‘통일 애국세력 탄압이고 조작’이라고 비난했다. 지금은 관망 중인 듯하다.”
- 이석기와 통진당은 공안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일부 시국사건이 최근 들어 무죄판결이 나면서 일부 국민은 ‘혹시나 이번에도’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죄를 받는 건 당시 수사 과정에서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당시 남북 대치상황에서 국민은 간첩·공안사건은 좀 엄하게 다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수사 당국 등이 인권 문제를 소홀히 한 측면이 지금 지적받고 있는 것이다.”
- 사법부는 여전히 엄격한 범죄소명을 요구한다.
“북한 대남공작의 은밀성과 치밀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재독 송두율 교수가 북한 노동당원이라고 밝혔는데, 법원은 이를 증언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김정일과 김정은을 수사해 자백을 받아 올 수는 없지 않은가.”
- 제2, 제3의 이석기가 안 나오게 하려면.
“간첩 및 반국가 활동을 해 확정판결 받은 경우 사면복권을 제한해야 한다. 독일의 경우 72년 극단주의자에 대한 정부훈령을 통해 반국가 행위자는 공무원 임용이 불가능하게 했다.”
● 배영대 기자 / balance@joongang.co.kr / 기자의 블로그 /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이영종 기자 / yjlee@joongang.co.kr / 기자의 블로그 /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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