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모터스(GM)가 내놓은 수많은 자동차 중 가장 대표적인 한 대를 꼽는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1959년형 캐딜락 엘도라도를 선택할 것이다. 반대로 GM 역사상 최악의 차로는 2001년에 출시된 폰티악 아즈텍이 후보 리스트 중 1순위다.
앨프리드 슬론이 영입한 전설적 자동차 디자이너 할리 얼의 작품인 엘도라도(El Dorado)는 길이 5m(5334mm)가 넘는 거대한 차체와 록히드의 P-38 전투기에서 영감을 얻은 과장된 형태의 테일 핀(꼬리날개)이 특징이었다. ‘황금의 땅’이라는 엘도라도의 뜻처럼 이 차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당시 GM과 미국의 상황을 대변해 준다. 과감한 디자인은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반면 폰티악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아즈텍은 마치 자동차 두 대를 잘라 붙인 듯 괴상한 전면부 디자인으로 업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16세기에 멸망한 아즈텍 제국처럼 폰티악 아즈텍 역시 GM을 폐허로 만들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두 차량은 카 가이(car guy:제품 전문가)와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숫자와 데이터로 모든 것을 움직이려는 사람) 중 누가 경영권을 잡느냐에 따라 제품도 극명하게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GM 제국을 완성한 슬론의 시대가 끝난 후 경영 전면에 등장한 빈 카운터스는 세계 최강 GM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결국 GM은 2009년 정부에 파산보호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빈 카운터스를 키워낸 장본인은 슬론이었다.
1960년대 전성기, 그리고 슬론의 저주
GM을 설립한 ‘빌리’ 윌리엄 듀런트에 이어 경영권을 잡은 슬론은 GM을 거대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브랜드별로 타깃 고객층을 나누고 그들이 원하는 자동차를 개발한 슬론의 제품 전략은 오늘날 전 세계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활용하고 있다. 슬론의 시장 세분화 전략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분권적 조직 관리 기법은 업계 안팎에서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슬론은 ‘현대 관리 이론의 아버지’로 불렸다. 이와 함께 할리 얼에 이어 GM 디자인 총괄 자리에 오른 빌 미첼은 폰티악 GTO, 올즈모빌 442 등 명차를 내놓으며 1960년대 GM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65년 프랑스 국영방송은 ‘GM:프랑스 1년 치 예산’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했다. 당시 GM의 매출액은 프랑스 1년 예산을 초과했다.
하지만 1923년부터 1966년 사망할 때까지 장기간(43년) 지속된 슬론의 제왕적 군림은 점차 회사의 의사결정 체계를 경직시켰다. 또한 획일화된 업무 방식은 임직원들로 하여금 도전보다 안주하도록 유도했다. 슬론은 시장 세분화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을 분권화했지만 예산 기획과 자본 배정, 핵심 경영진 인사 등은 중앙 집중식으로 경영했다. 슬론 은퇴 후에도 이 같은 기업 문화는 남아 있었다. 문제는 슬론과 같은 현명하고 강력한 리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GM 내에선 4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차는 항상 잘 팔리니 이제 이윤 확대에 집중하자’는 위험한 인식이 독버섯처럼 번져 나갔다.
빈 카운터스, GM을 벼랑 끝으로 내몰다
| GM 제국을 완성한 앨프리드 슬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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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이 열광하는 자동차를 만들던 슬론에 이어 빌 미첼도 1977년 은퇴하자 제품 개발 주도권은 디자인 부서에서 재무와 회계 부서, 법무팀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된 ‘제품기획부서’로 넘어갔다. 이들은 ‘시장분석 결과’를 강조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차의 내·외부 크기를 mm 단위까지 명시해 디자인 부서로 넘기며 “규격에 맞는 차를 디자인하라”고 지시했다. 한 가지 모양의 지붕과 도어 등 부품을 ‘원가절감’이라는 미명하에 2~3개 브랜드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멋진 디자인이 등장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의도적으로 제품의 질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논리는 이렇다. “필요 이상으로 차를 잘 만들었으니 다음 모델은 중간 수준으로 만들자. 소비자들은 여전히 차에 만족할 것이고 회사의 수익은 더 늘어날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황당한 주장이지만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GM 경영진의 귀에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들은 정말로 실행에 옮겼다. 제조비용과 투자비용을 절감하면서 일정 기간 회사의 수익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품의 경쟁력과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소탐대실이었다.
물론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다. 소비자 운동가 랠프 네이더가 1965년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Unsafe at Any Speed)’라는 책을 통해 쉐보레 코베어의 차량 결함을 지적했고 GM의 신뢰에 타격을 입혔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는 GM으로 하여금 천문학적인 비용을 탕진하게 했다. 미국 정부가 연비 기준을 강화함에 따라 차체 경량화·소형화를 위해 수조 원의 비용을 쏟아부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때 후륜구동 기반의 제품을 전륜구동으로 전환하는 등 GM의 제품 성격이 뿌리째 흔들렸다. 하지만 과거 GM이 1920년대 대공황에서도 이윤을 냈다는 것을 감안하면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의 적’이 더 큰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일본의 도요타·혼다·닛산이 미국 시장에서 급격하게 몸집을 키우자 제품 경쟁에서 밀린 GM은 소비자들로부터 ‘미국 차는 엉망이고 수입차는 좋다’는 핀잔까지 듣게 됐다. 이 말은 곧 기정사실화됐다.
GM과 폭스바겐그룹은 인수·합병(M&A)이 활발한 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브랜드 인수에 신중한 폭스바겐그룹과 달리 GM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듯한 M&A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 역시 브랜드 가치와 제품보다 숫자에 치중한 결과다.
폭스바겐그룹은 어떤 기업을 인수하면 해당 브랜드가 갖고 있던 아이덴티티(정체성)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디자인과 품질을 끌어올린다. 다시 시장에서 팔릴 수 있도록 관심과 지원을 쏟는다. 폭스바겐그룹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인수한 기업을 다시 매각한 적이 없다.
GM은 폭스바겐그룹과 확연한 온도차를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사브다. 1937년 항공기 제작사로 출발한 사브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자동차로 업종을 전환하고 1947년 첫 모델인 ‘92001’을 내놓았다. 이후 터보 엔진을 승용차에 처음 적용하는 등 높은 기술력과 안전성으로 이름을 알렸다. 1969년 트럭 제조사인 스카니아 바비스와 합병해 사브스카니아그룹으로 거듭났지만 판매 부진과 스웨덴의 임금 상승으로 경영난에 봉착했다. 결국 1990년 1월 사브는 자사의 지분 50%를 GM에 넘기면서(나머지 50%는 인베스터AB가 보유) 그룹에서 분리됐고 GM은 2000년 1월 6억400만 달러에 나머지 지분까지 모두 인수했다.
사브는 1998년 역작 ‘9-3’를 내놓으며 사브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GM이 사브 지분을 모두 인수한 2000년 이후에는 이렇다 할 신차가 나오지 못했다. 2009년 출시한 디젤 모델 ‘9-5 TiD’로 호평을 받긴 했지만 이미 GM은 스웨덴 스포츠카 브랜드 코닉세그와 매각 협상을 벌이는 등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결국 이듬해인 2010년 2월 네덜란드 자동차 회사 스파이커에 7400만 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2002년 헐값(17억7400만 달러) 논란 속에 인수한 대우자동차(현 한국GM)는 2011년 사명 변경과 함께 브랜드가 사라졌다. 이와 함께 올즈모빌·폰티악·새턴·허머 등 다수 브랜드들이 줄줄이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가히 ‘미다스 손’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할 만하다.
| 하이브리드 전기차 쉐보레 볼트로 GM의 부활을 꿈꾼 밥 루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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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은 제휴 관계도 빈번하게 맺었다가 청산했다. 이스즈·스즈키·스바루·피아트의 지분을 일부 소유하기도 했다. 현재 세계 1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도요타와 협력 관계를 갖기도 했다. 이 중 이스즈와 피아트의 디젤엔진 기술로 재미를 본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소득 없이 GM의 제휴 관계가 끝났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2012년 2월 프랑스 PSA(푸조-시토로엥)의 지분 7%를 매입하고 신형 소형차 플랫폼(차체 뼈대)을 공유하는 등 40여 개의 공동 프로젝트를 계획했지만 역시 계획이 대폭 축소됐다. 눈앞의 이익만 좇아 무분별하게 M&A 및 제휴 관계를 맺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이를 백지화하는 소모적인 행위를 반복해 온 셈이다.
한때 50%에 육박하던 GM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2000년 27%까지 추락했다. ‘도탄에 빠진’ GM을 기사회생시키기 위해 릭 왜고너 GM 회장은 2001년 구원투수를 영입했다. 카 가이 밥 루츠다.
최후의 구원투수로 나선 ‘카 가이’ 밥 루츠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야만 성공할 수 있고 뛰어난 제품을 만들겠다는 전략은 오직 제품에 대한 열정에서 나온다. 예산 절감에만 혈안이 돼 온갖 수치와 도표에 의존하다가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
밥 루츠가 그의 저서 ‘빈 카운터스(2012년, 비즈니스북스)’에서 한 말이다. 그는 전성기를 구가했던 GM(1963~1971년)을 거쳐 BMW 부회장(1971~1974년), 포드 부회장(1974~1986년), 크라이슬러 부회장(1986~1998년)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자동차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왜고너 회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GM의 제품개발 부회장 자리에 오른 그는 제품 경쟁력과 품질 향상에 주력했다. 그의 손을 거친 캐딜락 CTS와 뷰익 라크로스, 쉐보레 카마로·에퀴녹스 등은 소비자들의 호평을 이끌어 냈다. 2007년 등장한 쉐보레의 플러그 인 하이브리드 ‘볼트’는 GM의 옛 영광을 재현하는 듯했다.
하지만 카 가이 밥 루츠의 구원 등판도 GM의 저물어가는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듬해인 2008년 몰아닥친 금융 위기로 ‘영원한 제국’ GM의 운명은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