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다.”
미국 자동차 회사 제너럴모터스(GM)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찰스 어윈 윌슨이 1952년 국방장관으로 발탁된 뒤 미 상원 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1908년 설립된 GM의 106년 역사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이 가장 절묘하게 들어맞을 것이다. GM은 1931년 세계 자동차 판매 대수 1위로 올라선 뒤 2007년까지 77년 동안 단 한 번도 이 자리를 다른 회사에 내주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자동차 회사도 깰 수 없는 대기록이다. 이는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던 미국의 성장사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 GM을 창업한 풍운아 윌리엄 듀런트. |
|
|
GM의 역사를 알고 나면 진정한 인수·합병(M&A) 강자는 폭스바겐이 아니라 GM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이 전 세계의 인력·자본·문물·기업들을 흡수했듯이 GM도 전 세계에서 수십 개의 자동차 회사를 빨아들이며(때론 뱉으면서) 덩치를 불렸다.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로 미국 경제가 흔들리자 GM 역시 파산 위기에 내몰릴 정도로 휘청거렸다. 결국 이때 GM은 산하 12개 브랜드 중 쉐보레(Chevrolet)·캐딜락(Cadillac)·GMC·뷰익(Buick) 등 4개 핵심 브랜드를 제외한 다른 8개 브랜드 폐지에 나섰다.
자동차 산업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구조조정이었다. 당시 전 세계 자동차 업계는 ‘GM 제국의 몰락’을 예상했다. 화려했던 GM 제국의 제후국(산하 브랜드)들이 폐허가 된 것은 맞다. 하지만 당초 계획한 4개가 아닌 7개 브랜드가 살아남았고 미국이 체력을 회복하면서 GM의 판매량도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 ‘국민 기업’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인 듯하다.
태생부터 M&A, ‘자동차 빌리’의 기업 사냥
GM은 제품, 즉 자동차를 경영의 중심에 둔 ‘카 가이(Car guy)’와 오로지 수익성에만 치중한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숫자와 데이터로 모든 것을 움직이려는 사람)’가 교대로 주도권을 쥐었고 그때마다 회사에는 상승과 추락의 광풍이 몰아쳤다.
GM은 태어날 때부터 M&A가 있었다. 설립자 윌리엄 듀런트(1861~1947년)는 ‘플린트 카트’라는 마차 제조사를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동차 회사 ‘뷰익’이 재정난을 겪자 1904년 인수하면서 이 사업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도박과도 같은 M&A 경영을 시작했다. 뷰익의 이사회 의장에 앉은 그는 우선 자본금을 7만5000달러에서 30만 달러로 늘렸다. 생산량도 대폭 확대했다. 인수 당시 연간 생산량이 28대에 불과했던 뷰익은 4년 만에 연산 8820대로, 포드에 이어 2위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GM의 모체로서의 기반을 닦았던 것이다.
듀런트는 1908년 9월 16일 뷰익을 모회사로 올즈모빌(Oldsmobile)을 인수하면서 GM을 창립했고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그는 이후 캐딜락·엘모어(Elmore)·릴라이언스 트럭(Reliance Truck)과 GMC 트럭의 모체였던 래피드(Rapid) 등 총 13개 자동차 회사와 10개 부품사를 인수하며 거대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말 그대로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였다.
듀런트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그의 자금 동원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인수 대금 마련에는 기술 특허를 적극 활용했다. 회사가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특허와 새로운 특허 출원 실적으로 주식시장에서 신주를 발행했고 이를 통해 자금을 끌어모았다. GM의 고급 브랜드인 캐딜락은 1908년 당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높은 인수 가격인 475만 달러에 사들이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승승장구하는 그를 ‘자동차 빌리’라고 불렀다.
M&A는 단기간에 기업의 외형을 키우는 데 가장 효율적이다. 동시에 단기간에 기업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른바 ‘승자의 저주’다. 듀런트의 기업 경영 사례는 여기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듀런트는 돈이 된다면 업종도 가리지 않았다. 그는 1910년 전력 회사 히니램프에 투자했다. 이 회사의 텅스텐 필라멘트 전구 특허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이 특허가 무용지물로 판명되면서 GM은 1200만 달러의 손실을 봤다. 당시 주가는 100달러에서 25달러로 추락했다. 과도한 M&A로 비틀거리던 GM은 경영난에 봉착했고 회사 설립 2년 만인 1910년 듀런트는 채권단에 회사를 넘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 1955년 GM의 쉐보레 벨에어. 1950년대 자동차 디자인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꼽힌다. |
|
|
빈손이 된 듀런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 그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유명한 자동차 레이서이자 엔지니어인 루이 쉐보레(1878~1941년)다. 듀런트는 쉐보레와 함께 1911년 11월 3일 ‘쉐보레자동차회사’를 세우고 본격적인 재기에 나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914년 내놓은 신차 ‘490’이 판매 호조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자금을 마련한 듀런트는 비밀리에 GM 주식을 사들였고 쉐보레는 1916년 GM의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다시 GM 수장 자리를 되찾은 듀런트는 쉐보레를 GM에 합병했다. 화려한 복귀였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듀런트는 회사를 키우는 데에는 소질이 있었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끌어가는 재주는 없었다. GM은 신차 판매 부진으로 다시금 경영난에 빠졌고 듀런트는 1920년 두 번째로 GM 경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는 그 자리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때까지 듀런트가 인수한 회사는 39개에 달했다.
이듬해인 1921년 ‘듀런트모터스’를 설립해 또 한 번 재기를 노렸지만 1929년 불어 닥친 대공황에 맥없이 무너졌다. 1933년 듀런트모터스는 청산됐고 ‘자동차 빌리’는 플린트에서 볼링장을 운영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루이 쉐보레 또한 안타까운 말로를 보냈다. 대중적인 차를 만들려는 듀런트와 충돌 끝에 회사를 떠난 그는 경주용 차와 비행기 엔진 등을 설계하다가 실패했다. 결국 생계를 위해 GM 쉐보레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과로사했다.
슬로어니즘, 포디즘을 누르다
듀런트가 타고난 사업가라면 알프레드 슬론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이자 이를 바탕으로 GM을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진정한 의미의 ‘카 가이’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셈이다.
그는 베어링 부품 회사인 ‘하얏트 롤러 베어링 컴퍼니’에 입사한 후 1899년 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후 1918년 듀런트의 GM이 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GM 부사장으로 직함을 바꿔 달았다. 듀런트가 물러난 후 1923년 GM 회장에 취임한 그는 1956년까지 총 34년간 GM을 경영했고 19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예회장직을 유지했다. 그는 GM 보통주 1%에 해당하는 전 재산을 사회에 자선기금으로 내놓으며 후세에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모교 MIT엔 자신의 이름을 딴 MBA 과정(슬론스쿨)도 있다. 듀런트의 삶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 디트로이트에 있는 GM 글로벌 본사. |
|
|
그는 1920년대 경기 침체를 극복하고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도 이익을 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품을 제조해 현금과 운전자본이 2배로 증가한 덕분에 GM은 1926년 100만 대에 불과했던 생산량을 1955년 400만 대 이상으로 늘렸다. 1925년 세전이익은 1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1949년에는 10억 달러로 증가했다. GM의 주가 또한 슬론의 뛰어난 경영능력을 대변했다. 슬론이 회장으로 취임하기 1년 전인 1922년 13달러에 불과했던 GM의 주가는 슬론이 경영한 지 25년 뒤인 1947년 112달러까지 상승했다.
슬론 회장은 회사의 체질을 근본부터 바꿨다. GM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역발상 전략을 쓴 것이다. 당시 경쟁사인 포드는 ‘모델T’ 등 하나의 차종 판매에 집중했다. 이에 비해 GM은 다양한 브랜드와 차종을 보유하고 있었다. 슬론은 자신의 경영 방침을 “모든 지갑과 목적에 맞는 차(a car for every purse and purpose)”라고 소개하며 대대적인 제품 전략 정비에 나섰다. 캐딜락을 고급 브랜드로 포지셔닝하고 뷰익과 올즈모빌을 중간, 폰티악(Pontiac)과 쉐보레를 저가 브랜드로 각각 나눴다. 경제지 포천은 당시 GM의 제품군을 이같이 소개하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쉐보레, 가난하지만 자존심 강한 사람들을 위한 폰티악, 삶의 여유가 있지만 신중한 사람들을 위한 올즈모빌, 야망을 가진 정치인을 위한 뷰익, 부유층 인사들을 위한 캐딜락.”
이 마케팅 전략은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천편일률적인 모델T에 싫증 난 소비자들이 GM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후 GM은 성장 가도를 달렸다. 1923년 GM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포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1931년에는 포드를 제치고 1등 자리에 올랐다. 1933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에서 4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했다.
슬론은 이와 함께 소비자들이 이미 구매한 GM의 자동차에 대해서도 싫증을 느끼도록 유도했다. 기존보다 성능과 디자인을 개선한 새로운 자동차를 계속 내놓은 것이다. 오늘날에는 일반화됐지만 당시로선 혁신적인 ‘고의적 진부화’ 전략이었다. 학계에선 이를 슬론의 이름을 따 ‘슬로어니즘(Sloanism)’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동차 업계 최초로 대량생산을 시작한 헨리 포드의 ‘포디즘(Fordism)’이 슬로어니즘에 졌다”고 평가했다.
거인 CEO의 그늘…위기는 반복된다
슬로어니즘은 미국 소비자들의 자동차 소비 패턴도 바꿨다. 1934년 미국인의 평균 자동차 보유 기간은 5년이었다. 1950년에는 이 기간이 2년까지 줄어들었다. 소비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차종은 계속 늘어만 갔다. GM은 1955년 한 해 동안 55종의 신차를 내놓았다. 이것이 1963년에는 138개까지 늘어났다. GM의 슬로어니즘은 다른 회사들에도 번졌다.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같은 기간 신차가 272개에서 429개로 급증했다.
슬론 회장은 차종 다양화와 함께 외형도 꾸준히 불렸다. 듀런트와 같은 막무가내 식은 아니었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M&A에 나섰다. 특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현지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는 것을 선호했다. 1925년 영국의 복스홀(Vauxhall) 인수를 시작으로 1929년 독일 오펠(Adam Opel AG), 1931년에는 호주의 홀덴(Holden)을 사들였다.
GM은 슬론 회장의 전설적인 경영능력에 힘입어 그의 재임 기간에 급성장했다. 하지만 그가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다. 슬론의 상명하복식 경영에 젖어 있던 경영진은 타성에 젖은 제품 다양화와 수익 달성에만 신경 썼다. 중간 간부들은 경영진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였다. 이런 기업 문화가 고착화되면서 회사는 경쟁력을 잃어갔다. ‘빈 카운터스’의 등장이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