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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월한 행정가, 그러나 청백리는 아니었던 황희

Ador38 2014. 12. 20. 16:09

탁월한 행정가, 그러나 청백리는 아니었던 황희

연합뉴스 | 2014.12.18 10:32

이성무 교수 '방촌 황희 평전'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꼽히는 황희(黃喜, 1363~1452)는 흔히 '검은 소 누렁 소'나 '너도 옳고 너도 옳다'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런 뒷이야기들 덕분에 황희를 두고 소탈한 청백리이자 지혜롭고 인자한 현인(賢人)의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각인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서 드러나는 황희는 분명히 희대의 명재상이긴 하다. 그가 처음 관직에 오른 때는 고려 말이었지만, 왕조가 바뀌고서도 다시 발탁돼 임금의 최측근으로 오랜 기간 봉직했을 만큼 신뢰받는 신하였다. 황희가 56년간 관직생활 중 무려 18년간 영의정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유능함이었다.

태종은 황희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큰 신뢰를 보냈다. 이어 세종을 보좌한 황희는 북방 4군 6진 개척을 뒤에서 지휘했고, 명(明)과 외교관계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문제들을 원만히 처리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최고위급 관리인 영의정이었음에도 회의석상에서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영의정이 먼저 의견을 꺼내면 휘하 관리들이 무작정 그에 동조하거나 더는 의견을 내지 않는 일이 많아서였다. 대신 황희는 다른 이들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마지막에 종합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이렇다 보니 그가 내는 의견에는 왕인들 딱히 반론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태종과 세종은 으레 "황희 정승 말대로 하라"며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황희는 조선왕조 초기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며 개혁의 완급을 조절하는 조정자로서 탁월한 판단력과 정무감각을 발휘한 행정가로 평가된다.

반면 '청백리'라는 이미지는 실상과 다소 다르다. 오랫동안 고위직에 있으면서 각종 비위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공직자 감찰기구인 사헌부의 수장으로 재직할 당시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으로 불리는가 하면 인사청탁, 사위의 살인사건 무마 청탁 등 혐의도 받았다. 기본적인 '수신제가'가 안 된 인물의 면모다.

요즘 같으면 '당장 파면하라'라는 여론이 빗발쳤을 터임에도 태종과 세종은 황희를 끝까지 재상으로 중용하며 그에게 의지했다. 이런 일로 내치기에는 그의 국정 수행능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최근 '방촌 황희 평전'(민음사)을 출간한 이성무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는 이렇게 논평한다.

"왕권 국가에서 국왕의 입장은 다르다. 황희의 식견과 경륜이 높고, 일마다 누구보다도 옳은 판결을 하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으로서는 세세한 잘못 따위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할 수 있었다. 왕이 기대고 의뢰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른 것이다. 정치에 있어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은 사례이리라."(453쪽)

책은 역사적 위상에 어울리지 않게 단편적 일화로만 알려진 황희의 실제 면모와 생애, 공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평가하는 데 주력했다. 탁월한 행정가이자 외교가로서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진 공적은 물론 수뢰 의혹, 친인척 비리 등 개인적 오점에 이르기까지 밝고 어두운 면을 고르게 조명한다.

세종이 황희를 두고 "지혜는 일만 가지 정무를 통괄하기에 넉넉하고, 덕은 모든 관료를 진정시키기에 넉넉하도다"라고 했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저자는 왕의 신뢰가 이 정도였던 만큼 "황희를 청렴결백한 지도자라기보다 능력 있고, 후덕한 경험 많은 명재상의 대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평한다.

540쪽. 2만5천원.

pulse@yna.co.kr

(끝)

 

 

황금 뇌물받은 황희 '유능함' 때문에 살아남았다

매일경제 | 2014.12.19 16:39

"너도 옳고, 너도 옳다." 잘잘못을 따지는 집안의 두 여종에게 "모두 맞다"고 갈등을 풀어주는 일화. 황희 하면 늘 떠올리게 되는 이야기다. 황희는 '우유부단'하면서 인자한 재상으로 기억된다.

 

황희(黃喜·1363~1452)는 한국사 최고 명재상이다. 56년의 관직 생활 중 24년간 재상을 지냈고, 그중 18년 동안 영의정 자리를 지켰다. 그와 비할 만한 경력을 가진 이는 88세를 살면서 세 왕의 치세에 걸쳐 영의정을 여섯 번 지낸 오리 이원익뿐일 것이다. 그야말로 세종이 심복처럼 의지했고 사림은 태산과 북두처럼 우러러봤다. 그렇다면 그를 명재상으로 만든 건 단지 온화한 성품 때문만이었을까.

 

이 책은 명재상 황희를 만든 건 '유능함'이라고 변호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성무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황희의 삶에 주목한 것은 한국이 우러를 만한 위인을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에서였다.

 

황희는 공민왕 12년에 태어나 문종 2년에 죽었다. 여말선초 격변기에 생을 살다간 셈이다. 대륙에서는 원이 쇠퇴하고 명이 일어나던 시기, 고려는 원의 핍박과 권문세족의 착취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었다. 공민왕 개혁이 실패하고,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하자 황희는 처음 신왕조에 협력하길 꺼려했다. 아까운 재주를 썩히지 말고 백성을 구제하라는 주위 충고에 30세인 태종 3년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젊은 시절 황희는 직언하는 신하였다. 관료 탄핵에 맞서 "전하의 총명으로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른 것도 옳다 하고 옳은 것도 그르다고 한다면 어찌 폐단이 없겠습니까?"라며 홀로 왕에게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사헌부 감찰, 사간원 우습유를 지내며 바른 소리를 하다가 함경도 경원 교수로 강등되기도 했다.

 

그런 그를 발탁한 건 태종이었다. 1405년 황희는 박석명의 천거로 승정원 지신사(훗날 도승지로 왕의 비서실장)에 올랐다. 예조·이조 판서를 거쳐 승승장구하던 그가 1416년 좌천되는 일이 일어났다. 세자가 주색에 빠져 임금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때 그를 옹호한 것이다. "세자의 나이가 어린 소치입니다"라고 두 차례 변호하면서 황희는 관직에서 내쳐지고 귀양까지 가기에 이르렀다. 남원으로 귀양가 7년 동안 있으면서 그는 문을 닫아걸고 손님도 사절했다.

 

황희를 다시 불러올린 건 세종이다. 양녕대군을 옹호했음에도 세종은 그에게 다시 관직을 맏겼다. 서울로 돌아와 직첩을 받을 때 나이는 이미 예순이었다. 87세로 물러나기까지 27년이나 세종을 보필한 셈이다. 황희의 가장 큰 공적은 4군 6진의 개척을 배후에서 지휘한 북벌이다. 김종서는 세종과 황희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6진을 개척했다. 그는 다섯 차례에 걸쳐 야인 정벌책을 세워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명나라에 보내는 전첩서의 내용에는 전과를 축소해 보고하자고 주장했다. 국익을 위해 실리 외교를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명의 사신이 오면 전담해 요리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방촌 황희 영정.

 

공(功)이 있는 만큼 과(過)도 있었다. 홍유롱의 첩을 노비로 삼기도 했고, 남원 부사에게서 뇌물을 받기도 했다. 자신과 친한 안숭의 아들 안숭신을 특채해 구설에 올랐고, 대사헌 시절 황금을 뇌물로 받아 '황금 대사헌'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청백리'로 알려진 그간의 인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럼에도 태종과 세종은 황희의 식견과 경륜을 높이 사 그의 잘못을 모두 용서했다.

 

 그는 최고위급 관리인 영의정이었음에도 회의 석상에서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영의정이 먼저 의견을 꺼내면 휘하 관리들이 무작정 그에게 동조하거나 더는 의견을 내지 않는 일이 많아서였다. 태종과 세종은 으레 "황희 정승 말대로 하라"며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한번은 세종이 부왕의 기록인 '태종실록'을 보고자 청한 적이 있었다. "자손으로서 조종의 사업을 알지 못하면 장차 무엇으로 감계(鑑戒)할 것인가?"라는 이유에서였다. 황희는 "편수한 신하는 지금도 모두 있는데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이라며 직언했다. 세종은 결국 실록을 보지 않았다.

 

이 책은 실록과 각종 기록에 근거해 편년체(編年體)로 황희의 90년 삶을 정밀하게 복원시킨다. 황희는 넉넉한 인품을 가졌으나 태종에게는 바른말을 해 서너 번이나 관직에서 쫓겨난 인물이었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원숙하고 노련해 형벌을 무겁게 매기지 않았으며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데 앞장섰다. 저자는 황희를 우유부단한 청백리가 아닌 경험 많은 '행정의 달인'이자 '외교의 고수'였다고 재평가한다.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며 개혁의 완급을 조절하는 탁월한 정무 감각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황희라는 유능한 행정가가 건국 초기 조선을 지탱한 큰 동력이었다는 뚝심 있는 증언이다.

 

[김슬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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