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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내가 젊으니까 우습게 보여?”

Ador38 2016. 1. 28. 16:30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내가 젊으니까 우습게 보여?”

주성하기자

입력 2016-01-28 03:00:00 수정 2016-01-28 09:28:17


주성하 기자


2013년 10월 23일. 평양체육관.

이틀 일정의 북한군 중대장 및 중대정치지도원 대회 둘째 날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주석단 오른쪽으로 서류철을 낀 김정은이 등장하자 2만여 명의 참가자들은 일제히 일어나 열광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김정은 뒤로 최룡해 당시 군총정치국장, 황병서 당시 북한군 대장 등이 눈을 깔고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참가자들이 궁금했던 것은 서류철이었다. 권위를 중시하는 북한에서 지도자가 직접 서류철을 끼고 나타나는 장면은 보기 힘들다.

서류철을 책상 위에 ‘쾅’ 하고 놓은 김정은은 잠시 뒤 장내가 조용해지자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이름을 부르는 군관들은 앞으로 나오라. ○군단 ○사 ○연대 중대장 김○○….”

살기가 서린 목소리였다. 호명된 이들에게 곧 큰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기분 나쁜 예감이 체육관을 휘감았다. 금방까지 열띤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던 체육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정도의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공포에 사로잡힌 10여 명의 군관이 호명 순서대로 앞에 나섰다. 그중엔 사단 정치위원과 간부부장 등 사단급 고위 군관도 2명 포함됐다.

김정은이 서류철을 열었다. 그가 꺼내든 것은 사진 몇 장이었다.

“야! 너 이거 기념으로 가져.”

김정은은 10여 명에게 한 장 한 장 사진을 던져주듯 넘겨주었다. 당시 대회에 참가했던 참가자의 증언에 따르면 사진을 받아들고 돌아서는 군관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고 한다.

주석단 아래서 대기하던 군인들이 사진을 받아들고 내려오는 군관을 차례로 양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사단급 간부 두 명은 그 자리에서 견장을 뜯어냈다.

“저 사진 뭐지?”

궁금증에 답이라도 해주듯 김정은이 고래고래 분노를 터뜨렸다.

“저놈들은 어제 내 앞에서 잔 놈들이다. 내가 젊으니까 우습게 보여?”

전날 김정은이 참석한 회의에서 존 것이 죄였다. 보이지 않는 카메라들이 자신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수만 명이 꼼짝없이 앉아 지루한 연설을 몇 시간이나 듣다 보면 조는 사람이 없을 리 없다. 예전엔 대회에서 조는 것이 죽을죄라고 여겨지던 풍토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정은은 단단히 벼르고 졸았던 군관의 사진과 신상까지 직접 챙겨들고 나온 것이다. 고함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야, ○군단장. 저 자식이 당신 군단 소속이지. 똑바로 관리해.”

김정은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군관들이 머리를 숙이고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었다. 증언자 역시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 이후 이어진 회의에서 무슨 연설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끌려 나간 군관들이 처형됐는지 아니면 강등이나 제대로 끝났는지 이후 운명 역시 알 수 없었다.

김정은은 군기만 잡진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 당근도 하나 던지고 나갔다.

“참가자들을 일주일 평양 견학시켜!”

그제야 참가자들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중대장 이상급 군 간부들을 모아놓은 김정은은 이런 식으로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날렸다. 그리고 한 달 반 뒤 보란 듯이 고모부 장성택조차 잔인하게 처형했다.

이후 김정은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조는 사람은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었다.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그런데 큰 사고가 터졌다. 지난해 4월 열린 군 훈련일꾼 대회에서 다름 아닌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은 옆에 앉아 졸아 버린 것이다.

김정은이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노기가 잔뜩 실린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회의에 참석한 군관들은 누구나 현 부장이 곧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을 예감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며칠 뒤 현영철 부장은 잘 알려진 것처럼 숱한 부하들 앞에서 본보기로 잔인하게 처형됐다.

그가 죽은 뒤 북한엔 이런 소문이 돌았다.

“현 부장이 1호 행사에서 깜빡 졸까 봐 잠을 막는다는 각성제(필로폰)를 먹었다고 하더만. 그런데 그만 너무 먹어 자버렸대. 살자고 먹은 약 때문에 마약 중독자로 몰려 죽은 거야….”

하지만 주민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북한 중앙급 기관에서 일하다 최근 탈북한 인사는 고령의 김정은 측근에겐 각성제가 의무적으로 공급된다고 증언했다. 각성제를 복용하지 못하면 나이든 간부들이 김정은을 따라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현영철이 죽어야 했던 가장 큰 죄는 김정은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됐다는 점일 것이다. 혹 황병서처럼 김정은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였다면 운명이 또 달라지진 않았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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