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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정치 말씀 없었지만 '금아 선생님'은 중도 좌파" - ‘피천득 마지막 제자’ 정정호 교수 본문
"생전 정치 말씀 없었지만 '금아 선생님'은 중도 좌파"
강성만 입력 2017.05.07. 18:16 수정 2017.05.07. 20:56 댓글 292개
[한겨레] [짬] ‘피천득 마지막 제자’ 정정호 교수
‘정면교사’. 조정래 작가가 금아 피천득(1910~2007) 영결식 조사에서 고인을 일컬은 말이다. 오롯이 닮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그랬을 것이다. ‘이름을 가진 문인들이 탈을 만들고, 때가 묻고, 추하게 되어 세상의 반면교사가 될 때 (금아는) 오롯이 맑고 깨끗하여 우리의 정면교사이셨다.’ 이렇게 소원하기도 했다. “세상에 이름을 내걸고 있으면서 선생님처럼 그렇게 오래, 그렇게 깨끗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는 25일은 한국을 대표하는 수필가이자 시인, 영문학자인 금아가 세상을 뜬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3월 유족과 제자들 중심으로 ‘금아 피천득 선생 기념회’를 발족했고 오는 11일 흥사단 강당에서 문학 세미나도 연다. 유종호·임헌영·김영태·석경징 선생이 강사로 나선다. 금아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평전’도 나왔다. 저자는 서울대 사대 영어과에서 금아에게 네 과목을 배운 ‘금아의 마지막 제자’ 정정호(68) 중앙대 명예교수다. 그를 지난 3일 서울 흑석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10주기 맞아 ‘피천득 평전’ 발간
“어린이 같고 나무 같던 작은 거인” 수필에 가린 시인·번역가 ‘재조명’
기념사업회 11일 흥사단서 세미나 “문학 스승 춘원의 변절 ‘반면교사’
상하이 유학때 도산 따르며 감화”
대표작 <인연>에서 보듯, 금아의 수필은 일상의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는다. 주제 의식에 한계가 있다는 등의 비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의 수필은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우창 문학평론가는 금아 수필을 두고 “작은 것들을 존중하는 세계”, “마음의 섬세한 기미에 주의하는 세계”라고 썼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너무나 투명한 순수성으로 이뤄져 감히 어떤 불순물도 침투할 수 없다”고 평했다. 고 박완서 작가는 말년에 가장 가까운 곳에 금아 수필집을 두고 읽었다고 한다. 고 리영희 선생은 금아의 삶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중도를 지켜낸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정 교수는 스승을 두고 “어린이처럼 웃으며 나무처럼 춤추는 ‘작은 거인’이었다”고 평했다. 금아는 6살과 9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 거상인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제법 물려받은 금아는 13살 때부터 3년 동안 춘원 이광수 집에 머물며 문학과 영어를 배운 뒤 상하이로 유학을 떠났다. 춘원은 자신과 닮은꼴인 ‘고아 영재’ 금아에 관심을 보였다.
정 교수는 금아가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읜 게 그의 삶과 문학에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고 했다. 금아는 딸 서영을 끔찍이 아꼈다. 딸이 미국 유학을 떠난 뒤엔 딸의 인형에 난영이란 이름을 붙이고 정성으로 돌보았다. ‘나의 간절한 소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금아 글에서 엿보이는 ‘어린이 혹은 엄마가 되고 싶어하는 욕구’나, 거문고 솜씨가 일품인 멋스런 여인 황진이의 시를 높이 평가한 것도 ‘엄마 상실’과 관련 있다는 게 정 교수 생각이다. 금아의 어머니도 거문고와 그림에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수필에 가려 시인·번역가로서 금아의 진가가 묻힌 것도 아쉽다고 했다. “선생님은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어요. 소월을 제일 높이 평가했고 닮으려고 했어요. 갑자기 수필가로 유명해져 시인으로 인정 못 받는 것을 아쉬워하셨지요.”
금아는 어떤 스승이었을까. “여학생들을 좋아하셨어요. 남학생은 앞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했어요. 그래도 저는 꿋꿋하게 앉았어요. 여학생들은 모두 A학점이었죠. 물론 여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당시 남학생들은 ‘오도된 페미니즘’이라고 하기도 했죠.”
그의 아내는 대학 1년 후배인 이소영 번역가다. “제가 대학원에 들어간 뒤 찾아뵈었더니 선생님이 ‘공부는 자네 아내가 해야 하는데’라고 하시더군요.”
영시 강의 땐 암송을 중시했단다. “시를 외워서 적는 문제를 많이 내셨어요. 작품을 해설할 땐 ‘(표현이) 금쪽같다’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지’라고 하신 뒤 한참 뜸을 들이셨죠. 학생들이 작품에 몰입하도록 하셨어요.”
정 교수는 68학번이다. 학부 시절은 데모와 휴교 등으로 정상 수업이 어려웠다. “선생님이 정치에 대해 언급했던 기억은 없어요. 다만 데모를 열심히 하던 제자에게 ‘천당 갈 거다’라는 얘기를 했다고 해요.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에서 뭘 하면서 선생님 이름을 넣었으면 했는데 바로 거절했다고 해요. 김대중 정부 때는 청와대를 가신 적이 있죠. 서울대 사대 출신인 이희호씨와의 인연 때문일 겁니다. 제가 보기에 선생님은 중도좌파셨어요.”
그는 스승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춘원과 더불어 도산 안창호를 꼽았다. “문학은 춘원 영향을 받았고 정신과 사상은 도산 영향을 받았죠. 식민지 시절 99%가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상하이로 유학을 가서 흥사단원이 되었어요.
이 때문에 유학 뒤 조선에 돌아왔으나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취직도 못하고 허드렛일만 했어요. 친일이란 과오를 범한 이광수를 반면교사로 삼으셨죠.” 상하이 시절 도산의 비서 격으로 일하기도 했던 금아는 일본 경찰의 단속 때문에 1938년 서울에서 열린 도산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걸 생애 내내 부끄러워했다.
기념회는 학술대회 등을 통해 금아 문학을 널리 알리고, 전집도 낼 계획이다. “수필이 메이저 문학 장르가 아니라 선생님이 문학사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고 봅니다. 문단이나 학회 활동을 안 하신 것도 영향이 있겠죠.”
서울 잠실 롯데월드 3층 ‘금아 피천득 기념관’에선 노작가의 서재에 있던 할리우드 배우 잉그리드 버그먼(1915~82)의 사진 여러 장을 볼 수 있다. “젊었을 땐 노천명 시인에게 연서 100통을 보내셨다고 해요. 노년엔 고급 호텔에서 가까운 제자들에게 밥도 사고 이발도 하셨어요. ‘작은 사치’라고 하셨죠.”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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