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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追憶) - 판소리 국창 임방울 본문

♣ 세계사 & 溫故知新 - 學而時習之不亦說乎

* 추억(追憶) - 판소리 국창 임방울

Ador38 2019. 6. 28. 06:44

추억(追憶: 亡妻를 생각함)/ 장고 김종기, 명창 임방울(본명 임승근 1905∼1961)

 
 
 

추억 - 임방울 명창 소리



왕기석(소리), 한승석(고수), 김영길(아쟁). 이용구(대금), 오경자(거문고)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그리 쉽게 가럇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 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 속에 들어서도 나는 못 잊겄네
원명이 그뿐이었든가 이 십삼세에 황천객이 되었는가.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黃天客)이 되얏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 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임방울(1905∼1961 본명 임승근)이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김산호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져 2년이라는 세월을 세상과 벽을 쌓고 소리를 잊고 지냈는데,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한 그는 어느 날, 산 속으로 혼자 소리공부를 떠났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산호주는 전국의 소리터를 찾아 다니다가 마침내 병을 얻게 되고, 그 병이 깊어진 후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수소문해 찾아간 산호주를 막바지 소리공부 중이라며 임방울은 끝내 만나 주지 않았다.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마침내 세상을 뜨게 되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임방울은 무덤을 찾아가 산호주를 위해서 즉흥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이 노래이다.


오늘 음악이야기는 판소리 명창 임방울의 쑥대머리입니다.


한국 음악이 걸어온 길을 잠깐 살펴보자면 일제시대,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실과도 괘를 같이하겠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단절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대중과 같이 숨쉬고 웃고 울던 우리의 음악은 더이상 설 자리를 잃고 전통음악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설명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졌습니다.


판소리는 쉽게 설명해서 우리 조상들 대대로 이어온 우리의 대중음악입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매체가 없던 시절에는 소리꾼 한명을 둘러 쌓아서 소리꾼이 전달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함께 웃고, 울고 추임새를 통해서 교감을 형성하던게 바로 우리의 대중음악입니다.

어찌 보면 소리꾼과 관객이 함께 교감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대중음악이 판소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 우리의 대중음악이 완전 단절되는 현상을 겪게 되었을까요??

뭐 제가 여기서 답을 제시할 수도 없지만 한번쯤은 우리 대중음악의 수용자의 한명으로써 고민해봐야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임방울 명창이 활동하던 시대는 전통 판소리 시대가 지나고 1930년 창극이 유행하던 시절이라고 합니다.


임방울은 우리 현대 음악의 조용필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아마 그 시대에는 전달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저도 이분의 판소리를 듣고 판소리 작품 감상에 입문했습니다.

임방울 명창이 부르는 쑥대머리는 녹음 장비가 좋지 않은 시절에 녹음된 음악이지만 그의 노래의 탁월한 우수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명창과도 차별화되는 맑은 음성, 너무나 자연스러운 고음 창법은 많은 이들이 그를 사랑하게 만드는 정말 타고난 명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름에서도 전달되는 방울이 굴러가는 소리입니다.


그의 음반은 CD 설명서(유영대-전주우석대교수, 고전문학)에도 나오지만 [쑥대머리] 앨범이 20만장 이상이 판매되었다고 하니, 축음기 보급률을 생각해서 가늠할 때는 20세기 한국대중음악 최고의 명반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록곡]

1. 편시춘

2. 쑥대머리

3. 추억

4. 명기명창

5. 토끼화상

6. 고고천변

7. 녹수청산

8.군사설움타령

9. 옥중상봉가

10. 가난타령





판소리를 감상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판소리에서 전달하는 이야기와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쑥대머리의 내용은

춘향이가 옥중에서 온갖 고문과 회유로 머리는 마치 쑥대머리(쑥이 자라 헝크러진 머리)로 엉망이 되고 몸과 마음은 지쳐서 이도령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춘향이였으면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눈물이 쏙 나면서 이도령을 원망했을 겁니다.

저라면 닭똥 같은 눈물이 나면서 이런 빌어먹을 몽룡이 자슥아~~~ 기냥 변사또한테 가뿌린다.

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을 마음에 담고 한번 들어보시죠

마지막 내용이 모든것을 함축하네요.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운다.





출처 (Youtube : https://youtu.be/IFzFeJcVLp4 )


국창임방울선생기념비
서구문화원
날짜 2018-12-02 11:25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산4-1. 송정공원



1986년

송정공원에 국창임방울선생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부채와 북의 모양을 띠고 있다.


임방울은 광산구 도산동 출신의 판소리 명창으로 국창의 칭호를 받았다.

국창이라는 칭호는 민중들이 붙여준 최고의 찬사로 임방울 선생은 민중들이 원하는 자리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리판을 열기도 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의 시련기였기때문에 그의 소리에는 시대상과 관련된 계면조의 애절함이 반영되어 있다.


임방울(1905∼1961)은 가난한 농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임승근으로 14세때 부터 콜롬비아 빅타오케이 등 레코드 회사의 전속가수로 활약했다. 당대의 명창 이재현에게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우고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워 당시의 명창으로 이화중선과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일제시대 전후에 명맥을 이어온 판소리의 전통적 계승자로는 으뜸가는 귀중한 존재였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60년 대한민국 국악상을 받았고 1979년 <광산군민의 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호남가, 사별곡 등이 있다.

비문은 김정호가 쓰고 글씨는 경암 김상필이 썼다. 조각은 김대길이 했다.




“촉기 서린 임방울의 소리… 시·서사적 영감 총동원해 담아냈죠” “촉기 서린 임방울의 소리…

시·서사적 영감 총동원해 담아냈죠”


[조용호의 나마스테!] 명창 임방울 일대기 소설로 ‘사랑아 피를…’ 펴낸 한승원        


입력 : 2014-03-31 20:46:03      수정 : 2014-04-01 01:01:24



남해 바닷가 ‘해산토굴’ 앞은 바야흐로 선경이다.

천리향이 향기를 뿜고 빨간 동백이 시야를 희롱하는데 벚꽃과 산목련이 소복 차림으로 춤을 춘다.

가까운 산에는 연분홍 진달래까지 피어 수를 놓고 그 숲 어디선가 산비둘기가 내내 운다.
득량만은 해무에 가려 뿌옇다. ‘해산토굴’은 소설가 해산(海山) 한승원(75)이 기거하는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집필실 이름이다.


10여년 전에 왔을 때보다 꽃과 나무가 많아지고 토굴 앞에는 군에서 지어준 ‘한승원문학학교’ 건물도 생겼다.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온 지 18년째다. 이곳에서 많은 소출이 있었다. 다산과 추사와 원효를 공부하면서 그들의 일대기를 소설로 펴냈고, 동학에도 천착하여 역시 작품을 펴냈다. 거의 매 해 거르지 않고 작품을 생산해냈으니 해산토굴은 풍요로운 자궁인 셈이다.

많은 작품들을 펴내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뜨거운 사랑, 임방울에 대한 소설은 정작 올봄에서야 펴냈다. 등단 46년 만에 ‘사랑아 피를 토하라’(박하)라는 이름으로 오래 가슴에 품어왔던 사랑을 세상에 내보낸 것이다.           

임방울(1905∼1961)은 타고난 천재성과 각고의 독공(獨工)으로 일제 강점기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위무했던 전설적인 판소리 명창이다.


한서린 계면조의 서편제를 바탕으로 웅혼한 동편제까지 소화하며 일본 컬럼비아 레코드사 등에서 취입한 판소리 음반들이 100만장 넘게 팔려나가 세살배기 아이들까지도 임방울이라는 이름을 알았다고 하니, 이 즈음 아이돌 가수도 따라잡기 힘든 암울한 식민지 시절 조선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한승원이 ‘작가의 말’에 언급한 임방울과의 첫 인연은 애잔하다.

“내가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그의 소리 ‘앞산도 첩첩하고’를 접한 것은 아홉 살 되던 해, 앞산 뒷산에 진달래꽃이 불처럼 타오르던 봄날이었다. 고향 마을에 살던 한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꽃다운 아내와 사별한 다음 아내의 무덤 주변을 진달래 꽃밭으로 만들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면서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혼은 어디로 행하는가’를 부르곤 했다. 그 구슬픈 소리가 가슴을 울렸으므로 나는 보리밭 언덕에서 넋을 놓고 앉아, 그 청년이 안고 가는 진달래꽃 무더기를 쳐다보곤 했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던가’로 시작해 ‘보고 지고 보고 지고 임의 얼굴 보고 지고’로 끝나는 한바탕 통곡 같은 소리였으니 어린 마음에도 깊이 각인됐을 법하다.


이 노래 ‘앞산도 첩첩하고’는 임방울이 사랑했던 기생 산호가 죽자 하관할 때 즉흥적으로 창작해 부른 노래로, 이후 음반으로 나오면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까지 이입돼 조선 천지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소리다.


한승원은 열한 살 때는 목수에게 졸라 ‘쑥대머리’를 배워 부르고 다녔고,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자마자 상금으로 전축을 사서 임방울 음반을 죄 사들였다고 한다. 그가 등단 이래 써온 많은 작품의 바탕색에는 임방울의 소리 한이 배어 있다. 이리 깊이 품어온 임방울을 이제야 펴낸 연유는 무엇일까.


명창 임방울.


“임방울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살아 있어서 조심스러웠습니다. 세월이 흘렀어도 등장인물 한 명은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또 하나는 임방울의 소리를 신화적으로 다루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소리에는 쉬 흉내낼 수 없는 ‘촉기(觸氣)’가 있습니다.

영혼을 감지하는 안테나 같은 것이지요.

이곳에 내려와 다산, 추사, 원효 같은 인물을 그리기 위해 유학은 물론 불경, 주역 같은 방대한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을 지나와 이제야 마음에 여유가 생겨 임방울을 꺼낸 거지요. 이미 4년 전 완성한 뒤 오래 다듬었습니다. 내가 가진 시적, 서사적 영감을 총동원했어요.”

해산토굴 집필실에서 스님처럼 반듯이 좌정하고 차를 우려내면서 한승원은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폭포처럼 솟구치다가 간절한 애원성으로 넘어가는가 하면 매혹적으로 꺾어지고 흥겹게 출렁거리는 소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건 지난한 일이다.

임방울의 소리가 가진 생명과 한승원의 언어가 지닌 생명이 만나 ‘촉기’를 담아내기 위해 오랜 숙성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에 담긴 소리의 맛은 어떤가.

“목화밭의 무에 단맛이 들듯이, 담근 김치에 새곰하고 고소한 맛이 들듯이, 끓인 국에 그윽한 손맛이 들듯이… 소리에는 맛이 들어야 한다. 그냥 밋밋하게 하는 소리는 맹물처럼 밍근하고 덤덤한 맛이다.

소리의 굽이굽이에 곡진한 맛이 들어야 한다. 겉절이와 고등어 살에 간이 들듯이 소리에도 간이 들어야 한다. 꽃이 향기를 풍기듯이 소리도 향기를 품어야 한다.”(65쪽)

‘사랑아 피를 토하라’는 제목처럼 임방울의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소설의 중심 서사다. 여성 소리꾼들이나 그에게 반한 기생들이 임방울을 거쳐갔다. 일본 공연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귀국했다가 조총련 주최 측과 연결됐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받은 뒤 무대에서 쓰러진 임방울.

그의 장례는 최초의 국악인장으로 치러졌는데.....
행렬 뒤를 소복을 입은 여류 명창 200여명이 상여소리를 부르며 따르는 모습은 전무후무한 장관이었다.
기생 출신 젊은 여인의 헌신적인 병구완을 받으며 죽어가면서 옛날 일들을 회고하는 얼개로 이 소설은 전개된다.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해산토굴’에서 만난 소설가 한승원. 그가 자신의 문학학교 ‘달 긷는 집’에서 달 그림을 배경으로 판소리 한 대목을 열창하기 위해 북을 잡고 앉았다.



“나는 정말로 예술가다운 예술가는 ‘식물성 아나키스트’라고 봅니다. 파괴적이지 않은 무정부주의자, 공격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나비나 두루미 같은 아나키스트의 이미지 말입니다. 소리를 주고받다가 전율이 일면 겨드랑이에서 귀뚜라미가 울지요. 소리꾼들 사이의 사랑은 소리의 전율 그 자체가 육체적 오르가슴으로 이어지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관계였습니다.”

토굴에서 나와 여다지 해변 한승원산책로로 갔다. 한승원의 시들이 새겨진 돌들이 700여 미터에 이르는 해변길에 늘어서 있다. 주소 표기 방식이 바뀌면서 아예 이 지역 공식 주소도 ‘한승원산책길’로 정해졌다. 해무가 여전히 걷히지 않은 ‘한승원산책길 158번지’ 횟집에서 와인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해산토굴 앞마당에 석탑과 상석을 마련했는데, 자신이 죽은 뒤 그리우면 그곳에 꽃 한송이 올리라고 했다. 옛 선인들은 자기가 담겨갈 관을 옻칠해서 깨끗하게 만들어 며느리에게 곡식 담는 그릇으로 쓰게 하고, 가묘를 만들어 자기가 벌초도 하면서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한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요새 이별연습을 하는 중이오. 마누라와도 그렇지만 이 세상과도 이별연습을 해요. 언제 내가 여기 또 오겠느냐 생각하면 피는 꽃이나 나무 같은 온 세상은 물론 컴퓨터까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어요. 사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소, 죽음을 살겠다는 심산이니까….”

한승원의 눈가가 젖어들었다고 생각한 건 해무 가득한 뻘밭을 흘깃거리며 마시는 대낮의 와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소리를 청한 것은 단지 이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함은 아니었다. 서울살이할 때 문인들의 모임에서 술이 제법 들어가면 어김없이 부르곤 했다는 그의 수궁가나 적벽가 한 대목을 꼭 들어보고 싶었다.

그의 시집 제목을 따서 명명한 토굴 아래 ‘달 긷는 집’으로 올라갔다. 흥이 오른 그가 김선두 화백이 그려주었다는 달 그림 앞에 북을 잡고 앉아 적벽가의 ‘새타령’, 수궁가의 ‘토끼 화상’, 춘향전 ‘옥중가’를 연이어 불렀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온 소리답게 듣는 이의 심장을 따뜻하게 덥히는 소리였다. 해무는 가시지 않았고 천리향과 동백과 산목련 너머 숲속에서 산비둘기도 울었다. 해산토굴 주인은 “10년 후에도 보자!”고 손을 흔들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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