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불매운동 139일째…'공짜 내복' 10만명 받더라도, 여전히 잘하고 있다
일본 불매운동 139일째[편집자주] 지난해 여름부터 '남기자의 체헐리즘(체험+저널리즘)'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뭐든 직접 해봐야 안다며, 공감(共感)으로 서로를 잇겠다며 시작한 기획 기사입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자식 같은 기사들이 나갔습니다.
꾹꾹 담은 맘을 독자들이 알아줄 땐 설레기도 했고, 소외된 이에게 200여통이 넘는 메일이 쏟아질 땐 울었습니다. 여전히 숙제도 많습니다. 그래서 차마 못 다한 이야기들을 풀고자 합니다. 한 주는 '체헐리즘' 기사로, 또 다른 한 주는 '뒷이야기'로 찾아갑니다.
검은색 내복은 허리 고무줄이 헐거워져 있었다. 벌써 2년쯤 견디느라 늘어난 탓이다. 오랜만에 꺼냈다. 지난 겨울철에 입고 한 9개월 만인가. 허리춤에 달린 흰색 라벨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니클로 히트텍(UNIQLO HEATTECH)'. 일본 회사가 만든, 논란의 그 내복이 맞다. Made in 베트남이라 돼 있지만, 만든 장소만 그랬다. 분명 일본 제품이다. 그걸 한 손에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문을 여니 겨울 냉기가 쏟아졌다. 한편에 놓인 초록빛 봉투는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10리터짜리 쓰레기 종량제 봉투였다. 그걸 보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는 새 허벅지는 차가워졌다. 내복이 절로 생각나는 계절이었다. 하체 추위를 많이 타는지라 더 그랬다. 그 안에 검은색 내복을 욱여넣었다. 제법 깨끗해 의류 수거함에 넣을 법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 또 입길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비닐 손잡이 양 끝을 잡아당겨 단단히 묶었다. 쓰레기봉투는 현관에 하루쯤 뒀고, 다음 날 아침 나가는 길에 버렸다. 멀쩡한 내복을 왜 버렸을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유니클로 공짜 내복, 10만 장이 노린 것
보여주고 싶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지금도 매일 더 나아가고 있다는 걸. 얼마 전 유니클로가 공짜 내복 10만 장을 풀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얼마 뒤 나올 기사가 그려졌다. 당연히 매장에 사람들이 몰릴 것이고, 몇몇 곳은 바깥에 줄도 서겠지. 기사 사진 찍기 좋은 광경 아닌가. 그러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시들해졌다거나, 끝났다던가, 그런 기사도 나오겠지. 그런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게 걱정됐다. 침소봉대(針小棒大)니까, 바늘처럼 작은 일을 몽둥이처럼 크게 부풀린단 뜻이다. 여론이란 게 그렇다. 이슈가 생기고, 댓글이 몰리고, 기사가 늘고, 그게 대다수 생각처럼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리 생각할지 모른다. "이제 불매운동 시들한가봐", "다 끝나가나봐", 이렇게 말이다. 그게 유니클로의 '전략'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유니클로가 북적이는 사진 한 장이, '어, 이제 유니클로에 가나 보네'라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유니클로 가면 안 돼'라 단단히 먹은 마음에 균열을 내고, 가고 싶었던 이들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 아마도 그리 국면 전환을 꾀했으리라. 역으로 생각해보자. 유니클로가 자사 최고 히트상품 중 하나인, 1만4900원짜리 내복을 공짜로 준 적이 있었던가. 15주년 감사제라 하지만, 매년 진행했던 역대 어느 감사제에서도 그런 식의 감사 표현은 없었다. 무슨 뜻이냐면, 유니클로를 그만큼 몰아붙였단 뜻이다. 4개월간 진행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말이다. 0.2%, 파문이 인다고 바다가 출렁일까
그러니, 생각을 잘할 필요가 있다. 유니클로 공짜 내복 10만 장이 의미하는 건, 불매운동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성과'다. 7월 불매운동 시작 이후, 유니클로 종로3가점과 구로점, 월계점이 폐점했다. 새로 문을 연 곳도 있지만, 폐점과 소비자가, 개점은 운영자가 만든단 측면에서 그 의미가 다르다. 매출은 큰 폭으로 줄었고, 지난달 진행된 50% 할인 행사도 큰 효력이 없었다. 그리 보면 사실상 공짜 내복은 고육지책(자기 몸을 희생하는 계략)에 가깝다. 적어도 한국 시장에서는. 10만명이 유니클로 공짜 내복을 다 챙겼다 치자. 그래봐야 전 국민 5000만명 대비 고작 0.2%다. 나머지 99.8%가 일본 제품을 사러 간 게 아니다. 그걸 보고, 나처럼 마음을 더 다지는 이들도 있다. 보여주고 싶었다. 유니클로 앞에 공짜 내복을 받으러 줄 서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그래서 갖고 있던 유니클로 내복을 버렸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쉼 없이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불매운동 이전인 재작년에 샀고, 여전히 멀쩡해서 솔직히 좀 아깝기도 했지만. 불매운동은 이런 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는 걸, 어쨌거나 지금 시점에서 알리고 싶어서. 물에 파문이 인다고, 바다가 출렁이는 건 아니니까. 국산 내복이 더 따뜻
물론, 이런 이유만으로 내복을 쉬이 버릴 순 없다. 하체 추위를 꽤 타는 나로선, 내복 없이 겨울나기가 쉽지 않으니까. 믿는 구석이 따로 있었다. '국산 내복'이다. '기어**'란 이름의 내복이다. 결혼 전에 엄마가 사준 발열 내복인데, 산 지는 한 5년쯤 됐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젊다. 이런 건 안 입는다. 춥지 않다"고 뻐기며 잘 안 입었다. 그러다 30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뼈에 찬바람이 스며들었고, 저절로 찾아 입기 시작했다. 신세계였다. 이후 유니클로 내복을 더 사서, 기어**와 유니클로를 같이 입었었다. 이 내복을 소개하자면, 가격(1만원 정도)은 유니클로보다 싸고 성능은 더 훌륭하다(주관적인 평가니 참고 바란다). 영하 1도에서 10도까진 유니클로(1만9900원짜리 엑스트라 웜 기준)를, 영하 10도에서 20도까지 추위엔 기어**를 입어왔다. 이건 불매운동과 관계없이, 그 전부터 이렇게 입었다(아내가 증인이다). 가성비가 훌륭한 셈이다. 유니클로 내복 중 가장 따뜻하다는 '울트라 웜(2만4900원짜리)'과는 비교해보지 못했다.
착용감은 둘 다 비슷한데, 기어**가 더 쫀쫀하다. 반려견 똘이(몰티즈, 5살)가, 더 놀아달라고 다리에 찰싹 붙은 느낌과 비슷하달까. 그 위에 청바지를 입든, 면바지를 입든, 이것만 입으면 영하 추위도 거뜬하다. 그래서 진짜 추운 날이 올 때마다 손이 갔다. 활동성은 기어**나 유니클로(엑스트라 웜 기준)나 유사한 편이다. 그러니 굳이 일본 내복을 입을 필요가 있겠는가. 적어도 내겐 그랬다. 국산 내복도 이렇게 훌륭하다. 입으면 꽤 자부심도 든다. 마음도 따뜻해진다. 우리나라 기술도, 이 정도 되는구나 싶어서. 일본 제품 불매를 잘하고 있다, 여전히
내복뿐만이 아니다. 지난 7월8일부터 시작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아직 잘 이어가고 있다(7월20일자 '일본 제품'을 2주간 불매해봤다 참조). 벌써 넉 달이 넘었다. 달라진 게 있다. 굳이 '불매운동'이라 생각하지 않게 됐다. 그냥 일상이 됐고, 습관이 됐다. 처음엔 일본 제품인지 일일이 찾아보다가, 이젠 그 리스트마저 머릿속에 꽤 자리 잡았다. 괜찮은 대체재가 대부분 다 있었다. 이젠 제법 편해졌다, 애쓰지 않아도. 일본 맥주 대신, 한국 맥주와 외국 맥주(일본이 아닌)를 마시고 있다. 일본 펜 대신에 샀던 국산 펜도 잘 나온다. 슬랙스 바지는 유니클로가 아닌 국내 중소기업 걸로 샀는데, 핏도 좋고 착용감도 좋아 애용하고 있다. 편의점은 가까운 미니스톱 대신, 한 200미터만 더 가면 나오는, GS25로 가고 있다. 가끔 먹던 모리나가 카라멜 대신 오리온 걸 먹고, 모스버거 대신 맘스터치를 먹는다. 사람인지라 갈등할 때도 있다. 감기가 심해 약국에 갔더니, 화이투벤을 줬다.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일본 약이 아닌가. 몸도 아프고 귀찮아서 솔직히 그냥 먹을까도 했었다. 겨우 이겨내 다시 약국에 가서, 다른 걸로 바꿔왔다. 아내는 무인양품 양치 컵을 주문했다가, 3000원을 주고 환불한 뒤 자주(JAJU) 제품으로 다시 샀다. 그날 저녁 아내와 "잘하고 있다"며 서로 토닥였다. 유니클로 내복은 사실 입고 다녀도 아무도 모른다. 낯부끄러울 일이 없다. 그런데 모든 이가 몰라도, 내가 안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나를 생각했을 때, 꽤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것,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그래서 눈 감을 때 '아, 그래도 그건 참 잘했어'하고 떠올릴 일이 하나쯤은 더 늘어나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역경'이 우릴 키운다
일본은 지난 7월부터, 핵심 부품 3개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만만했다. 한국이 굽히고 들어올 걸 기대했을 터였다. 우린 '국산화'로 대응했다. 디스플레이가 첫발을 뗐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달 액체 불화수소를 100% 국산화했다. 삼성 디스플레이도 국산 불화수소 테스트를 마쳤다. 반도체 공정엔 고순도 불화수소가 필요해, 아직 진행 중이다. 국내 업체가 만든 불화수소 등을 대체 투입하고 있다. 갈 길이 멀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이미 믿을 수 없게 됐다. 이번에 뒤로 물러서면, 앞으로 여러 정치적 판단에 따라 수출 규제를 무기로 우리나라를 압박할 것이다. 익숙함과 편안함이 깨지고, 큰일이 닥칠 것 같았지만 잘하고 있다. 오히려 기술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는 계기로 삼게 됐다. 한 달 전부터 턱걸이를 시작했다. 매일 철봉이 있는, 인근 근린공원에 간다. 내 몸무게가 85kg, 내 몸 하나도 들기 힘들었다. 처음 간 날은 1개도 제대로 못 했다. 둘째 날도 같았다. 셋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쉬이 늘지 않으니 포기하고 싶어졌다. 턱걸이 도움 밴드를 걸어, 그 힘에 기댈까 생각도 했다. 의존하면 끝이 없다. 그냥 맨몸으로 버텨보기로 했다. 첫 주가 다 지날 때쯤 1개를 제대로 했다. 둘째 주엔 2개를 할 수 있게 됐다. 셋째 주엔 3~4개, 그리고 이번 주부터는 5개를 하고 있다. 자세도 이젠 제법 잘 잡는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다. 역경이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도 그런 고단한 시간을 잘 버티기를, 그리고 단단하고 강해지기를. 사시사철 푸를 것 같던 여름 나무가, 가을이 되니 이파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곧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을 것 같다. 예쁘다며 단풍놀이만 즐길 것인가, 아니면 낙엽을 부지런히 쓸어낼 것인가. 우린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9년 11월 22일 (17:3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