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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因緣이 고이는 방
* 김규면 : 역사상 외국에서 최고 예우를 받은 한국인 본문
* 김규면 : 역사상 외국에서 최고 예우를 받은 한국인 역사상 외국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은 한국인은 누구일까요. 최고의 공적을 세운 사람은 고선지장군이었습니다. 고구려인 고선지가 당나라 장군이 되어 파미르 고원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나라에서 보통 장군의 예우를 받았을 뿐입니다. 역사상 외국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은 한국인은 독립운동가 김규면인 것 같습니다. 그는 구소련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랬으니 한국역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역사에서도 빛나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소련은 결국은 망했지만 한때는 위대로 나라로 여겨졌습니다. 이 나라가 건국했을 때 구라파 지식인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가 세워졌다!”고 찬탄했습니다. 소련은 전세계로부터 미국과 함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최고의 과학 수준,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김규면이 소련에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최고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늙은 그가 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모스크바에서 연금으로 살았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고 손녀를 대학에 보냈습니다. 소련 사회로서는 최고의 연금을 받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노보레비치 사원에 묻혔습니다. 여기는 소련의 최고 인물들, 곧 후르시초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리스 옐친 등이 묻힌 곳입니다. 소련 사회에서 김규면을 건국에 최고 공적을 세운 사람으로 여겼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규면의 일생을 살펴보면 한국의 독립운동을 했지 소련의 건국에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독립운동 공적도 별 것이 아닙니다. 김규면은 앞장 서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정 역할만 했습니다. 설령 그가 앞장서 일제와 싸워 위대한 공적을 세웠다고 해도 소련 사회에서 그것 때문에 그에게 최고 예우를 해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시베리아전쟁 : 빨치산과 정예군의 대결 * 일본은 근대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시베리아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다섯 차례 전쟁을 일으켰다. 다섯 차례 전쟁 가운데 시베리아전쟁에 대해서는 역사연구가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측 기록에 ‘시베리아출병’이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시베리아전쟁 때 일본은 사 년 동안 칠만 삼천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 육억 엔의 전비를 소모했다. 일본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전체 이십일 개 사단 중 십일 개 사단 십칠만 오천 명을 파견했다. 시베리아전쟁은 규모에 있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이상 가는 것이었다. 그런 전쟁에 대해서 일본은 자세한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 시베리아전쟁은 일본육군이 패배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승리하여 청나라, 러시아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일본이 시베리아전쟁 때는 패배하여 그곳에서 철수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전쟁에서의 패배 원인으로 통상 세 가지가 들어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추위입니다. 이것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으로 통상 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패배도, 히틀러의 패배도 추위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용맹한 코자크 기병대입니다. “그 시대에는 기병대가 전쟁의 승패를 가름했다. 소련군에게는 용맹한 기병대가 있었는데 반하여 일본군에게는 없었다.” 이 견해는 용맹한 코자크 기병대를 다른 영화를 본데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서 일본군에게 기병대가 없었던 같습니다. 당시 정예 사단에는 모두 기병대가 있었습니다. 일본군 그 사단에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단지, 기병대가 소련군에게는 주력부대였는데 일본군에게는 그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일본군 주력부대는 비행기, 탱크, 장갑차, 대포 기갑부대였습니다. 세 번째는 시베리아전쟁은 일본군과 소련 빨치산 간의 대결이었는데 광활한 지역인데다 추운 날씨로 인하여 일본군이 패배했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표면상 하자가 없는 것입니다. 시베리아전쟁 때 소련 정규군은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군과 빨치산의 대결에서 빨치산이 승리했다는 앞의 견해는 옳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소총만 가진 빨치산들이 비행기, 탱크까지 가진 정규군을 과연 이길 수 있는 것인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빨치산(민중군)이 정예군(정부군)에게 이긴 적이 없습니다. 전투에서는 승리하기도 했지만 전쟁에서는 패했습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의 경우에는 구식무기의 군대에게 전투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혹자 모택동의 구식무기의 군대가 장개석과 일본의 신식무기의 군대에게 이겼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택동군은 1945년 이전에는 일본군과 장개석군에게 연전연패했습니다. 소련군이 45년 이후에 자신들의 신식무기를 모택동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육군을 갖고 있는 소련이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모택동의 빨치산 부대를 재조직했습니다. 이에 그 부대가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이 되었습니다. 이 덕택에 모택동군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시베리아전쟁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1917년 레닌이 혁명을 일으켜 제정 러시아 군대를 해산시키고 새로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이 군대는 신식무기로 무장했지만 어디까지나 빨치산들이었습니다(소련이 정예군을 갖은 것은 스탈린 시대였다.). 그나마 우랄 산맥 서쪽에 주둔하는 군대만 그렇게 무장했습니다. 1918년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침략했을 때 우랄 산맥 서쪽 지역도 혼란스러워 이곳의 군대를 시베리아로 파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베리아전쟁 때 그곳 빨치산들이 일본 정예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빨치산이 정예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구식무기의 군대에게 패배한 적이 없다’는 견해는 시베리아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전자가 어떻게 해서 후자에게 패배한 것일까요. 시베리아 빨치산이 일본 정예군을 이긴 것은 소련인의 애국심 덕택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옳지 않은 것입니다. 소련인에게는 본래 애국심이 적습니다( 다민족국가이고 역사가 일천한 미국, 소련의 국민에게는 애국심이 적다.). 하물며 시베리아인들에게야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동유럽의 소련인은 침략자들일 뿐이었습니다. 일본군은 급수 높은 침략자들이었습니다. 이차대전 때 소련육군이 독일육군, 일본육군을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은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항상 열배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사실상 패배했습니다. 역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물자 지원 덕택이었습니다. 이차대전은 물량전이었습니다. 독일, 일본이 물량 부족으로 패배한 것입니다. 시베리아전쟁 때에도 시베리아 빨치산이 물자 덕택으로 이겼던 것일까요. 이 지역은 오늘날에도 물자가 부족한 빈곤한 곳입니다. 하물며 1920년대에야 오죽했겠습니까. 이차대전 때에는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았지만 시베리아전쟁 때에는 시베리아는 동유럽의 소련으로부터 그런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럽 소련도 외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아야만 하는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한국독립군이 시베리아전쟁의 승패를 가름했다 소련 지도에 빨치산스크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원래 지명은 수청인데 소련당국에서 그곳이 빨치산의 본거지였음을 기리어 빨치산스크로 개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본래 소련 빨치산의 본거지가 아니라 한국독립군, 곧 김경천 부대의 본거지였습니다. 시베리아의 달네레첸스크에는 한운용과 그 부하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있습니다. 소련은 본래 빨치산들이 세운 나라라 동네마다 빨치산 기념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달네레첸스크의 경우처럼 특정인을 기리는 탑은 없다고 합니다. 시베리아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전투는 블로차예프카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소련 홍군이 한국말로, “돌격! 후퇴! 하나둘!”라고 외쳐 한국독립군인 체하며 싸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러시아 백군, 일본군 연합군이 독립군이라고 하면 혼비백산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블로차예프카 전투에서 패한 백군, 일본군 삼 개 사단이 남쪽으로 퇴각합니다(오만 명 가량의 병력이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퇴각하려면 달네레첸스크 지역을 지나가야 합니다. 이 지역에는 김경천의 이백 명 독립군이 있었습니다. 오만 대군이 이백 명을 두려워하여 달네레첸스크를 지나가지 못합니다. 중국 땅으로 들어가 그 지역을 우회하여 퇴각합니다. 대군이 교섭 없이 중국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중국이 일본군, 백군에게 선전포고를 해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과 백군은, 이억 명 중국인보다 이백 명 김경천 부대를 무서워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나왔다고 합니다. “산토끼(시베리아)를 잡으려다 집토끼(한반도)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두려운 것은 한반도의 이천만 명 조선인이 아니라 연해주의 이십만 명 조선인이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조속히 철수해야 한다.” * 일제시대에 만주의 한국인은 중국인한테 박대 받았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군(좌파)이 중국 빨치산을 도와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중국인의 한국인 박대는 바뀌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 때 일본군이 만주를 지나가자 그곳의 한국인들이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 한국인들은 원래 고국에서 일본인의 박대 때문에 만주로 이주했는데, 일본인의 그것은 중국인의 그것에 비하면 양반이기 때문에 일본군을 환영한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한국인은 소련인한테 만주의 한국인보다 곱절 박대 받았다. 그것은 한국인과 중국인은 본래 사촌간인데 반하여 한국인과 소련인은 촌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먼 사이이기 때문이다. 1918년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침략하자 한국독립군이 소련 빨치산을 도와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자 소련인의 한국인 박대가 후대로 바뀌었다. 소련인이 집 없고 땅 없는 한국인을 도와주었다. 시베리아전쟁 때 한국독립군이 소련 빨치산을 도와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전자가 일 할, 후자가 구 할의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 할이 없었으면 격퇴시킬 수 없었습니다. 시베리아는 소련 영토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넓고 넓은 지역입니다. 그 큰 땅덩어리가 소련 영토가 된 것은 한국독립군 덕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독립군의 대부는 김규면이었습니다. 이에 그가 소련 사회에서 건국에 레닌, 스탈린 다음 가는 공적을 세운 사람으로 대우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 시베리아전쟁의 발발, 경과, 종결에 대해서는 ‘김경천’ ― 근간, 《조선민중의 전설적 영웅 김일성장군 (광성출판사)》의 개정판 ―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스탈린이 연해주의 한국인을 카자흐로 이주시킨 이유 스탈린이 1937년에 연해주의 이십만 한국인을 카자흐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것은 스탈린 정권의 존망이 걸린 모험이었습니다. 소련은 다민족 국가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가장 싫어하는 것은 터전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연해주 한국인을 카자흐로 이주시키는 것은 소련 영토 내 여타 민족을 동요시켜 소련 연방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스탈린이 연해주의 한국인을 카자흐로 이주시킨 이유는 한국인이 일본인의 간첩 활동을 돕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해주는 무장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었습니다. 소련에서 그들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여 일본에게 소련을 침공하는 구실을 줄까봐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스탈린이 연해주의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돕기 때문에 그곳의 한국인들을 카자흐로 옮기는 일대 모험을 단행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 같습니다. 연해주는 만에 하나의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도 방지해야 하는 소중한 땅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그곳을 불모의 땅으로 여겼습니다. 이 덕택에 제정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한 것입니다. 당시는 자본주의 제국시대라 러시아에게 부동항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연해주 부동항을 거점으로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수가 있었습니다. 연해주가 소련에게 아주 소중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자본주의 제국시대가 끝나버렸습니다. 연해주 부동항은 소련에게 별 필요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혹자는 시베리아의 부존자원 때문에 스탈린이 연해주를 소중히 여겼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이 자원을 일본으로부터 지키지 위하여 연해주의 한국인을 카자흐로 옮겼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베리아 자원은 구소련 체제의 유지, 발전에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개방된 오늘날에도 한국, 일본, 미국의 자본가들이 시베리아로 들어가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공산체제에서나 자본체제에서나 세계 자본가들에게 별다른 매력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연해주가 일본군의 동유럽 소련으로의 진출을 저지시키는 요충지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벌써 만주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만주로부터 모스크바로 곧장 진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일소전쟁이 일어나면, 만주, 한반도, 일본본토 삼면으로 포위되어 있는 연해주는 구제불능으로 소련인만 살고 있다고 해도 미련 없이 버려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당시 스탈린은 동유럽 소련 땅을 다스리는 것도 벅찼습니다. 구석진 곳에 있는 조그만 땅덩어리인 연해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자신이 실각당하는 모험을 감수하면서 연해주의 이십만 한국인을 카자흐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 이유는 아래와 같이 설명해야만 설득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시베리아전쟁 때 소련이 연해주의 한국인 덕택에 승리했다. 이에 일본이 그곳의 이십만 한국인을 한반도의 이천만 한국인보다 두려워했다. 삼일운동으로 미루어볼 때 한국인의 독립정신이 강하다. 시베리아전쟁으로 미루어볼 때 연해주의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나면 모스크바로서는 당할 길이 없다. 당시 스탈린이 동유럽 소련 땅에 정예군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 군대를 극동에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스탈린으로서는 한국인이 연해주에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만약 연해주에 독립국가가 세워지면 여타 지역, 여타 민족도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다. 연해주 한국인 독립국가는 소련 연방의 와해를 의미했다. 스탈린으로서는 자신 정권 존망을 걸고라도 연해주의 한국인을 중앙아시아로 옮겨야만 했다.” * 스탈린이 김경천이 무서워 연해주 한국인 이주를 단행했다 일본, 소련이 연해주의 한국인을 무서워했습니다. 그곳의 한국인이 특별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랬던 것일까요. 못난 사람들이 고국에서 밀려나 만주로 갔습니다. 더 못난 사람들은 연해주로 갔습니다. 연해주 한국인들은 평균적으로 볼 때 열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지도자들도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박일리야, 한창걸 등은 세계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인물은 만주에도 있었습니다. 연해주 한국인 사회가 한반도와 만주의 그 사회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연해주에 김경천이 있다는 한 가지 사실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연해주에 김경천이 있기에 일본, 소련이 그처럼 그곳의 한국인들을 두려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 말의 논지는 시베리아전쟁 때 한국독립군이 일 할의 역할을 했는데 그 전쟁의 승패를 가름했다는 논지와 같은 것이다.). 혹자는, 만약 김경천이 그런 위치에 있었다면 스탈린이 어째서 그를 죽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스탈린이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김경천을 죽일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소련인에게도 영웅이었습니다. 스탈린이 김경천에게 소련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면 두 번이나 훈장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래놓고는 그를 이유 없이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시사했듯이 죽인다고 연해주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었습니다. 김경천이 시베리아 영웅이 된 것은 한운용 공적 위에 올라 선 덕택이었습니다. 한운용이 죽자 김경천 나타났습니다. 김경천의 죽으면 제이의 한운용, 제이의 김경천이 나타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연해주 한국인 지도자 가운데에는 김경천 외에도 세계적 인물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스탈린이 김규면, 홍범도 같은 지도자는 포섭에 성공했지만 한창걸, 박일리야 같은 지도자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달네레첸스크에는 한운용, 김경천 부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부대, 곧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소련군 소속의 연대가 있었습니다. 이 연대는 정예 중 정예였다고 합니다. 일본군 몇 개 사단에 해당하는 전력을 갖고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스탈린이 김경천 및 한창걸, 박일리야 등을 이유 없이 죽일 경우 그 연대가 들고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연대를 당할 수 있는 소련군은 동유럽에 주둔하는 정예군 밖에 없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연해주 한국인의 카자흐 이주는 한국인의 허락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미루어 짐작건대 스탈린이 카자흐로 가면 연해주보다 넓고 기름진 땅이 있고 소련 정부에서 수년간 의식주를 해결해 주겠다고 연해주 한국인들을 꾀었습니다. 실제로 이주한 한국인에게 넓은 땅이 주어졌고 의식주 배급이 베풀어졌습니다. 당시 스탈린을 추종하는 한국인 지도자들이 사전 답사를 했고 이주에 앞장섰던 것 같습니다. * 김경천, 한창걸, 박일리야 등은 이주 때 투옥되었다. 결국 처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 1937년 스탈린이 생사존망을 걸고 자국인 이천만 명을 처형하는 대숙청을 단행했다. 한국인의 카자흐 이주는 그 숙청의 일환으로 감행한 것이다. *** 한국인의 카자흐 이주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스탈린은 소위 강성(强性), 적성(敵性) 여타 소수 민족들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이 지역은 시베리아보다 기름진데다가 유사시에 동유럽에 주둔하는 정예 소련군을 파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스탈린이 한국독립군 기록을 말살시켰다 스탈린이 1940년대에 자본주의 국가의 첩자로부터 시회주의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철의 장막’을 쳤습니다. 이에 학자들이 시베리아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한국독립군의 활약상에 대해서 연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혹 자는 소련 내지 일본의 학자는 연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련에 왕래하며 시베리아 빨치산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빨치산스크는 원래 지명이 수청인데 소련당국에서 그곳이 빨치산들의 본거지였음을 기리어 빨치산스크로 개명했다. 이곳은 한국인 빨치산 한창걸의 본거지였다.” 그런데 수청은 본디 김경천이 맹활약한 곳이었습니다. 그가 연대장급일 때 한창걸은 중대장급이었습니다. 전자가 태양빛이라면 후자는 반딧불 빛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빨치산 연구가인 일본인이 김경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한국인 무장독립운동 진상이 소련어, 일본어로도 기록되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련어로는 원래 기록되었는데 스탈린의 대숙청 때 소실되었거나 극비문서로 분류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스탈린이 1940년대에 친 ‘철의 장막’이 1990년대에 걷혔습니다. 러시아와 한국의 국교 수립으로 시베리아 한국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의 독립운동 전모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내에 들어온 재소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으로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남긴 시베리아 한국독립운동가들은 태반 친소 한국인이었습니다. 반소 한국인은 처형되고 그들의 기록은 말살되었습니다. * 시베리아전쟁 때 둘째가라면 서러울 큰 공적을 세운 김경천의 경우, 재소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에서 한결같이 그에 관한 말을 아끼고 있는데 그들로서는 소련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재소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에서 김경천을 찬미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가 없다. 뚜렷한 그의 공적에 대해서도 지나가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기록에서 김경천 이야기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가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그 이야기를 모아 놓으면 그의 활약상 윤곽이 드러난다. *** 한국, 일본에서 뿐만이 아니라 소련에서도 김경천을 불온시했다. 이에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어느 나라에도 없게 되었다. 만약 그의 일기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는 영영 수수께끼의 인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 2005년 김경천의 일기가 나타났다. 이 내용은 앞의 책 ‘김경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음 장의 내용은 그 책에서 한두 가지를 뽑아내 풀어쓴 것이다. * 조선총독, 일본천황이 김경천을 이천만 조선인 가운데 최고 인물로 여겼다 재소 독립운동가들의 기록 가운데, ‘김경천이 일본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름이 나면 흔히 나오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김경천이 육사 졸업 후에 동경 제일사단에 배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단은 한국 군사정부 시절의 경복궁에 주둔하는 부대 같은 부대로 일본 엘리트 장교들이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육사출신 한국인 가운데 최고의 졸업 성적을 거둔 사람은 홍사익이었습니다. (박정희가 일본육사를 삼등으로 졸업했다고 알려졌는데 실인즉 편입생 중에서 삼 등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홍사익은 졸업 후에 비록 동경 부근에 주둔한 사단에 배속되었으나 제일사단에는 근무해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성적이 김경천만 못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테라우치 조선 총독이 한국인 생도 김경천을 불러 임관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육사를 졸업하면 원래 복무 의무가 있는데 김경천의 경우에는 한국정부가 파견한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육사에 들어간 관계로 그 의무가 없었던 것 같다.) 현역 육군해군 대장, 총리대신 동격, 조선국왕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러한 것입니다. 김경천이 자신의 일기에서, ‘한국인 이천만 가운데 정치, 군사 제 분야에서 나만큼 공부한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허언이 섞여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경천이 탈영하자 일제가 최고 현상금을 걸어놓고 수배했습니다. 시베리아서 독립군을 이끌자 각 부대에 그 부대를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습니다. 김성주가 김일성을 자처하고 나타나자 일제가 김경천일 줄 알고 전전긍긍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나만큼 공부한 사람이 없다’ 곧, ‘김경천이 이천만 조선인 가운데 최고 인물이다’라는 것은 실인즉 일제의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윤치호는 본디 미국에서 장기간 공부하여 구미 선진 사상에 밝은 사람으로 비록 오늘날에는 일급 친일파로 비난받고 있지만 일제시대에는 최고로 선진 사상을 갖고 있는 한국인으로 국내외로부터 존경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기를 검토해보면 그가 그 사상을 수박겉핥기 했을 뿐으로 꽉 막힌 십구 세기 한국인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는 사실은 그 시대 사람으로서는 최고로 구미 선진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알짜 그 사상을 갖고 있는 이십 세기 사람의 시각에서 십구 세기 사람이 쓴 일기를 검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경천도 윤치호와 마찬가지로 십구 세기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김경천의 일기를 검토해보면 그가 구미 선진 사상을 갖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십 세기 사람의 시각에서 십구 세기 사람이 쓴 일기를 검토했는데도 그러합니다. 김경천은 초인이 아닐진대 어떻게 해서 알짜 구미 선진 사상을 갖게 되었던 것일까요.
김경천은 십육 세에 일본에 건너가 오로지 일본인 가운데 산 관계로 한국어를 태반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반일본인이 되어버렸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경천은 일본에서 줄곧 일본 최고 학부인 육사와 엘리트 장교들이 근무하는 동경제일사단에서 생활했으므로 고급 지성의 일본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일기에 나타나는 김경천의 사상은 근대 일본 지성인의 사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일기는 근대 일본 지성인의 사상을 밝혀주는 세계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일제시대 김일성장군 전설 관계 기록에 의하면 ‘김장군이 일본육사를 나온 연고로 일본군대 사정을 잘 알아서 일제가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일본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으므로 그 말을 전설 이야기라고 넘겨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김경천은 일제의 문화, 군사 모두를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으니 일제로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역사상 최고 위인 “1970년대 그러니까‘공산당’의 ‘공’자만 말해도, ‘김일성’의 ‘김’자만 말해도 공안당국에 잡혀가는 무시무시한 냉전 반공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친지분의 어머니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평생 집안에서 살아온 칠순 노인이었답니다. 친지분이 어머니께 살아계실 때 나들이 한 번 시켜드리려고 아산 이순신장군 현충사로 모시고 갔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성웅화’ 작업으로 그러니까 ‘이순신은 예수, 석가, 알렉산드로스, 나폴레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인’이라고 선전하기 위하여 엄청난 예산을 들여 그 현충사를 꾸며놓았습니다. 평생 집안에서 살아온 칠순 노모가 그런 현충사를 둘러보았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노모가 이순상 상을 보고 감탄하는데 아들에게, ‘저분이 바로 김일성장군이냐?’고 묻더랍니다.” 한국인으로서 이순신장군은 몰라도 김일성장군은 모르는 사람은 없었음을 위의 에피소드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1930 ― 1950 년대에 김일성은 민간에서 역사상 최고의 위인으로 통했습니다. 1960년대 중고등학교 교과목에 반공(反共)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북한의 김일성은 가짜 김일성장군이다. 진짜 김일성장군은 김경천장군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정부에서 김경천은 안중근, 안창호, 이승만, 김구를 넘어서고 이순신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가르친 셈입니다. 본인의 기억에 의하면, ‘김경천이 진짜 김일성’이라는 그때의 가르침은 일제시대에 풍미한 김일성 전설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때라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김경천에 대해서 어물쩍 넘어가버렸습니다. 학과목에서 이승만,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는 수십 페이지 분량으로 다루면서 김경천에 대해서는 한두 줄 밖에 다루지 않았습니다. 학과목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해서 학생들이 김경천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버렸습니다. 한 소시민이 옛날 시절을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중학교 일학년 때 급우들이 선생님에게, ‘북한의 김일성이 가짜라면 진짜 김일성이 김구처럼 학과목에서 다루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질문하여 선생님을 쩔쩔매게 했습니다.…” 본인은 의문만 가졌지 감히 그런 질문을 못했는데 그 학생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회고에 김경천에 관한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소시민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혹자는 지역과 학교에 따라 진짜 김일성을 논하면서 김경천을 언급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는데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960년대에는 텔레비전이 드문 때라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였습니다. MBC 라디오 드라마 ‘광복 이십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책으로 나오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광복 이십년’은 1945년부터 60년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해방정국 편에서 김일성의 등장을 다루는데 그는 가짜이고 김경천이 진짜라며 그의 경력을 이승만, 김구의 경우처럼 반 페이지 분량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광복 이십년’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데에서도 김경천을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독립운동에 관련한 기사에 그의 이야기를 한두 줄 넣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두 줄이라 소시민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광복 이십년’의 경우에도 김경천 이야기가 열 권의 책 가운데 반 페이지에 불과하므로 소시민의 주의를 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인터넷의 회고에 김경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주의를 끌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인의 경우에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김경천이 큰 주의를 끌었습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진짜 김일성장군 탐구에 나섰습니다. 당시 학과목에서 청산리 대첩을 크게 다루었습니다. 김좌진이 일본군 오만 대군을 격파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스스로 그가 김일성장군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어떤 책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으로서는 김좌진이 김일성이라는 생각을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은 본래 독서광이라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김경천에 관한 기사를 한두 줄 이지만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앞뒤 끊어지는 파편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책에서, ‘일본군 수뇌진이 각 부대에 김경천 부대를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고 하기에, 독립운동사를 샅샅이 살펴보았는데 김경천의 활약상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본인은 스스로 김경천이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활약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냉전반공시대라 연해주 독립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은연중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도, 다루는 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일본근대사를 조사해보았는데 연해주 무장독립운동에 관련 될만한 내용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 1차 시베리아전쟁은 일본군과 소련 빨치산이 시베리아에서 싸운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일본 역사서에서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2차 시베리아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러시아 백군과 소련 홍군이 연해주에서 싸웠지만 실상 일본군과 한국독립군이 싸운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서에서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본인으로서는 일본 근대역사서에도 이 나라의 연해주 출병이 나오지 않으니 그곳의 한국인 무장독립운동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본인도 여타 사람들처럼 김경천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습니다. 본인이 다시 김경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명영의《김일성열전》을 읽고나서이었습니다. 이 책은 김성주는 가짜 김일성이라는 내용이 사분의 삼이고 김경천이 진짜 김일성이라는 내용이 사분의 일입니다. 사분의 삼은 냉전반공 논리 아래 쓰인 옳지 않은 것이고 사분의 일은 실증적 자료에 의거한 옳은 것입니다.《김일성열전》은 내용 태반이 옳지 않은 것이라 좌파학자는 물론이고 순수학자한테도 배척당했습니다. 《김일성열전》은 냉전반공 시대에 출판된 책입니다. 어떤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의 출판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칸트나 헤겔의 명저도 《김일성열전》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주기 때문에 불후의 명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이《김일성열전》의 경우에는 그 배경을 고려해주지 않고 혹평만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프로에서 박정희, 이후락이 김성주는 가짜 김일성이라는 냉전반공 논리를 펼치기 위하여 이명영을 일본에 파견하여 자료를 수집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인 것이 일본의 자료, 사람을 냉전반공 논리를 펼치는 데에 이용하려 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은 문화 선진국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한국에서와 달리 냉전반공 논리가 먹혀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일본의 자료, 사람을 이용하여 김성주 가짜 김일성 논리를 만들려다가 진짜 김일성 논리를 만들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박정희, 이후락이 이명영을 일본에 파견한 것은, “김성주가 가짜 김일성이라는 결정적 자료가 비록 한국에는 없지만 일본에는 분명히 있다. 일본 지식인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이 이명영을 파견한 사실은 실인즉 김성주가 진짜 김일성이라는 프로에 사용해서는 안 되고 가짜 김일성이라는 프로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 이명영은 일제시대부터 평생 김일성 장군에 대해서 연구했다. 이 집대성이《김일성열전》이다. 이 책에서 김경천 이야기가 사분의 일이지만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쓰인 것으로 실상은 본론이다. 그러므로 《김일성열전》은 불후의 명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명저가 된 것은 박정희, 이후락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덕택에 이명영이 한국, 일본, 중국의 온갖 자료를 이용하고 온갖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김일성 누구인지 찾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서대숙, 와다하루끼, 이재화, 이종석 등은 친북한 입장에서 김일성장군을 연구했습니다. 네 사람은 김성주 밖에는 김일성장군이 될만한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대숙, 와다하루끼는 만주 지역을 수십 차례 왕래하며 김일성장군이 될만한 사람을 찾았는데 김성주 외에는 그런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전설상 김일성장군은 1930년대부터 만주에서 활동했는데 그때 그곳에서 활동한 무장독립운동가 가운데 ‘김일성’ 별호를 사용한 사람은 실제로 김성주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성주의 전과(戰果)를 200% 올려도 그가 김일성장군이 될 소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서대숙과 와다하루끼가 김성주의 항일무장투쟁을 집대성한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김성주의 투쟁을 미화시켰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투쟁이 별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납니다. 조선민중이 김성주의 최고 승첩으로 여기는 보천보 전투는 일본경찰 네 명이 지키는 파출소를 습격한 것이었습니다. 보천보 전투 전후해서 한반도에 김일성장군 전설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김성주가 그 전설 발생에 일정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은 곧 끝났습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김성주는 숨어서 꼼짝달싹 안했습니다. 그러자 김일성장군 불길이 사그라졌습니다. 이 불길이 다시 일어난 것은 1940년부터였습니다. 김성주가 소련 땅으로 도피한 뒤부터였습니다. 1940년대 전반기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일제를 무찔러 공포 속에 몰아넣은 김일성장군 전설’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 전설이 한반도 방방곡곡에 퍼졌습니다. 여기에서 만약 올바른 김일성장군 연구가라면 김성주는 본디 김장군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전설영웅은 원래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법입니다. 1920년대에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는데 1940년대에 만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전설영웅 연구가라는 서대숙, 와다하루끼가 그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 연구가로서 자격 미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한 그 연구가라면 1930년 이후에 ‘김일성’ 이름을 사용한 무장독립운동가가 김성주 밖에는 없다는 이유로 그에게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30년대 이전, 시베리아로 연구 범위를 확대시켰을 것입니다. 진짜 김일성장군이 누구인지 찾는 일은 사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제시대에 김장군이 일본 대군을 무찔러 일제를 공포 속에 빠뜨렸다는 소문이 한반도 방방곡곡에 퍼졌습니다.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십 세기에 허구의 사실이 그렇게 소문날 수가 있겠습니까. 일본군 대군을 무찔러 일제를 공포 속에 빠뜨린 무장독립운동가가 실제로 있었기에 앞의 그 소문이 난 것입니다. 진짜 김일성장군을 찾으려면 그런 무장독립운동가를 찾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빨치산 중대병력이 정예군 사단 병력을 격퇴시키다 위대한 무장독립운동가로 우파에서는 김좌진을, 좌파에서는 김성주를 들고 있습니다. 혹자는 두 사람에 더하여 홍범도, 이청천, 이범석, 양세봉, 허형식, 이홍광, 김책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아홉 사람은, 일제가 시베리아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정면에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영웅일 수가 없는 것이 일본 대군이 몰려오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빨치산 중대 병력으로 정예군 사단 병력을 가로막고 맞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이라면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국인 무장독립운동가 가운데에도 빨치산 중대 병력으로 정예군 사단 병력을 가로막고 싸운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 김경천이 일제가 시베리아전쟁을 일으키자 청년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이곳 이국땅에서 총을 들고 일어난 것은 우리의 철천지원수 일본군을 격파해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본군이 한국처럼 극동지역을 강점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의 적은 오직 하나 사무라이들입니다. 십만의 사무라이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홀로는 그들과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러시아 형제들과 합세해 사무라이들과 싸워야 합니다. 한국인, 러시아인이 합심하면 십만의 사무라이들을 격파시킬 수가 있습니다. 조국 해방을 이룩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빨치산 중대 병력을 이끌고 정예군 사단 병력을 가로막고 싸웠다. 백마를 타고 앞장 서 싸워 일본군으로 하여금 시베리아에서 물러나게 만든 것은 전설이었다. 백마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제를 무찔러 공포 속에 몰아넣은 김일성장군 전설이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명영이 1970년대에 일본의 기밀문서와 1920년대의 국내신문 보도 내용을 자료로 김경천의 수백 명 독립군이 수천 명 백군, 일본군 연합군을 격퇴시켰음을, 곧 일본 대군을 무찔러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은 사람은 바로 김경천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김일성장군 연구가들의 주의도 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경우에는 알고도 모른체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시는 냉전반공시대, 곧 공산진영과 자본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대였습니다. 자본진영이 밀리고 있었습니다. (지식인들이 자본진영 종주국 미국의 멸망은 예상하기도 했지만 공산진영 종주국 소련의 멸망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소련에 대해서 털끝만큼의 미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련을 이 세상의 악이 모두 집합한 소굴이라고 말해야했습니다. 김경천의 경우, 붉은 깃발 아래에서 일제와 싸웠습니다. 소련 건국에 이바지했습니다. 그랬으니 어떻게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명영이 김경천을 다룬 것만 해도 박정희, 이후락 뒷심 덕택이었습니다. 기록에 의거하면 김경천은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라 (자본진영 편) 백군과 싸웠습니다. 잘못된 것이지만 그렇게 되어 있으니 김일성장군 연구가들도 김경천에 대해서 어물쩍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 자본진영 사람들이 구소련의 붕괴로 공산주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습니다. 시베리아 전쟁과 이 전쟁에서의 김경천의 활약 진상에 대해서 말하는데 제약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태반 세상이 바뀐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베리아 전쟁과 이 전쟁에서의 김경천의 활약 진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여전히 꺼려하고 있습니다. 시베리아전쟁 진상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러할 수 있지만 일본 대군을 무찔러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은 무장독립운동가는 김경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는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의 기록 속에도 있으므로 꺼려할 이유가 있을 수 없는데 그러하고 있습니다. 수십년간 따랐던 사회통념은 잘못된 것임이 밝혀져도 깨뜨리는데 수십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 시베리아전쟁 현장에 있었던 이범석, 김홍일, 이청천이 해방후 귀국했는데 김경천의 그 전쟁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일체 입을 다물었다. (이에 대해서 이명영이 개탄했다.) 그 전쟁 때 지대장 신분이고 구석진 곳에 있었던 세 사람으로서는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없었겠지만 명색이 그 현장에 있었던 독립운동가들이므로 시베리아전쟁 직후 국내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김경천에 대해서 언급해야만 할 것인데 그러지 않은 것은 위에서 밝힌 이유 때문일 것이다. ** 이범석, 김홍일은 후일 집필한 회고록에서도 김경천의 시베리아 전쟁에서의 역할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청천은 회고록을 아예 집필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집필하라고 하면, “나만 잘났다고 하게 된다. 사실을 외면하게 된다.”며 거부했다. 그것은 냉전시대 배경과 아울러 인간적 고뇌 때문이었을 것이다(이청천은 이범석, 김홍일의 회고록 가운데에 거짓말 내지 터무니없이 잘못된 내용이 다수 있다고 차마 밝힐 수가 없었다.). 이청천은 일본육사 시절부터 김경천과 행동을 같이 했다. 독립운동 시절에는 이청천은 만주에, 김경천은 연해주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나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청천이 회고록을 집필하지 않은 것은 김경천 연구가에게 실로 애석한 일이었다. *** 김경천과 함께 만주와 소련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에 귀국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고 한다. “소련군 극동지구 총사령관이 김경천의 군사적 재능을 존경했다. 김경천이 모스크바 공산당에 의해 극동지역의 한국인, 소련인을 망라한 유격부대를 모두 지휘하는 관구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김경천은 나중에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정부에서 김경천을, ‘북한 김일성 가짜론’의 논거로 사용한 다음 폐기시켜버렸는데 그것은 앞의 증언에서, “김경천이 스탈린의 왼팔이 되었을 수가 있다. 그리고 김경천의 죄과가 북한의 김일성의 것보다 클 수가 있다”는 추정 견해가 나왔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급진좌파 학자 이찬행, 이재화가 1980년대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짜 김일성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만약 진짜 김일성장군이 따로 있다면 정부 내지 학계에서 그 사람을 ― 그에 대한 기록이 어떠하던지 간에 ― 크게 다루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김성주가 진짜 김일성이라는 반증이다.” “우파 측에서 김창희, 김광서가 진짜 김일성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은 큰 전투에서 승리한 적이 없다. 조선민중의 존경을 불러일으킬만한 큰 공적을 세운 적이 없다. 보천보 전투 전후해서 김일성장군 전설이 일어났으므로 김성주만이 김일성이 될 수가 있다.” 두 사람이《김일성열전》의 <김광서> 편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 종주국 구소련을 도와준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는 ― 글을 읽다가 그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눈을 감아버리는 ― 한국사회의 통념에 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못된 통념을 깨뜨려 사회를 개조시킨다는 극좌 학자 이찬행, 이재화가 소시민들과 똑같이 그 통념에 따랐습니다. 오늘날, 재소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국내에 들어와 시베리아 무장독립운동의 진상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미국정부의 기밀문서(1945 ― 1951 문서)가 공개돼 김성주가 일본육사출신 김일성(김경천)의 이름을 차용했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와다하루끼, 이종석, 이찬행, 이재화가 여전히 김성주가 진짜 김일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어쩐지 침묵하고 있으니 알 수 없습니다. 와다하루끼, 이종석은 좌파 학자이기 이전에 친북한 학자이므로, 이찬행, 이재화는 친북한 학자이기 이전에 소시민 성향의 사람, 곧 우파 정부, 학계에서 어떻다고 크게 떠들어대야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 오늘날 좌파학자인 한홍구가 진짜 김일성은 김성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논거로 《김일성열전》의 잘못된 내용인 사분의 삼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냉전반공시대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잘못된 그 시대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김좌진의 청산리 승첩은 허구였다 1960년대에 카자흐의 한국어 신문 주필 손세일이 ‘홍범도’ 연재소설을 그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청산리 전투 내용은 고국의 라디오 드라마 방송 내용을 그대로 게재했습니다. 정부에서 상해임정시절부터 줄곧 김좌진의 청산리 승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1960년대에 문무겸비의 위대한 장군인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을 다룬 라디오 드라마가 단파 방송을 통해 카자흐로 들어갔습니다.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 내용이 카자흐 신문에 게재되자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그 전투 현장에 있었던 독립군 부대장, 부대원들이 나타나 항의했습니다. 이에 손세일이 청산리전투 내용을 대폭 수정하여 발표했습니다. 그로서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말하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의 것은 청산리 전투 현장에 있었던 독립군 부대장, 부대원들의 증언에 의거해 그 전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일제시대 독립군은 태반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봉오동 승첩에 빛나는 홍범도 부대원은 그런 사냥꾼들이었다. 북한에서 게릴라 영웅으로 칭송받는 김성주 부대원은 집 없는 아이들이었다. 여타 독립군들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신흥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북로군정서는 신흥학교 학생 칠백 명을 골간으로 구성한 부대였다. 그들은 독립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총재 서일, 사령관 김좌진, 부대장 김규식, 이범석이었다. 서일이 원래 사령관으로 이청천을 골랐는데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할 수없이 김좌진을 임명했다. 김좌진은 원래 군사실무 경험이 없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서 야영하다 일본군에게 공격을 받아 오백여 명이 전사 내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것은 군정서 사령관에게 전술적 상식이 있었으면, 초보적 군사지식이라도 있었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때 홍범도의 부대가 당도하지 않았으면 칠백 명 모두가 전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김좌진은 일본군에게 공격당하자 군모와 군도를 내던지고 맨 먼저 산 아래로 달아났다. ‘그가 산을 뛰어넘었다’는 소문은 그로부터 생긴 것이었다. 김좌진 부대를 궤멸시킨 일본군 사단이 홍범도 부대를 가운데 놓고 양편에서 공격했다. 이 부대가 슬쩍 빠져나가자 일본군 같은 복장을 한 관계로 양편 사단이 서로 홍범도 부대로 오인하고 싸웠다. 어찌나 치열하게 싸웠던지 육박전까지 벌였다. 그랬으니 임정에서 발표한 사상자 일천이백 명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겠는가. 일제시대 독립군으로서 유일하게 부대다운 부대인 북로군정서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해보고 와해되었다. 신흥학교에서 만난을 무릅쓰고 양성한 건아들을, 장차 독립군의 기간이 될 사람들을 허망하게 잃어버리매 서일 총재가 통분해 땅을 치며 통곡했다. 북쪽 러시아 땅에서 만주, 연해주의 독립군들이 모여 부대를 재편성할 때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청산리 전투 때 무능함이 드러난 관계로 소외되어버리자 슬그머니 부대를 빠져나가 만주로 돌아가 버렸다. 상해 임정에서 김좌진의 사백여 명 부대가 일본군 사단과 전투를 벌여 일천이백여 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의하면 김좌진이 일본군 대군을 격파했는데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일본군 대군을 격파해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은 김일성장군은 김좌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조선민중이 청산리 전투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전투 때 일본군 사단이 서로 싸워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김좌진, 청산리 전투는 김일성장군 전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 전투였습니다. *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이 개 사단이 서로 싸워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의 간도 한국인 수천 명 학살은 그 화풀이였다. 청산리 전투는 임정에 최고의 선전 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조선민중에게는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은 많은 전투였다. 당시 이광수 등 국내 지식인들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고국에서 살 길이 없어 간도로 간 불쌍한 동포들이 청산리 독립군 때문에 떼죽음 당했다!” ** 상해 임정에서 김좌진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대군을 격파했다는 발표는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홍범도 부대가 슬쩍 빠져나가자 일본군 두 사단이 서로 싸워 죽었는데 손자병병, 제갈량 병법은 원래 그런 것이다. 청산리 전투 때 한국독립군의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비록 일본군이 홍범도 때문에 자기편끼리 싸웠지만 그의 부대가 일본군과 비슷한 복장을 한 것, 김좌진 부대를 구한 것 모두가 우연이었다. 동서고금 대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령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하는 일 없이 있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역사서에 그들이 전투를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김좌진이 청산리에서 일본군 대군을 격파했다는 임정의 발표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시베리아전쟁 * 이 장의 내용은 ‘김경천’(《조선민중의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 광성, 유길만》의 개정판)에 수록되어 있는 시베리아 전쟁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1917년, 레닌이 제정 러시아 정부를 무너뜨리고 공산국가, 곧 적위파 정부를 세웠습니다. 구러시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본국가, 곧 백위파 정부를 세웠습니다. 이에 홍백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백군을 돕자 러시아 백성들이 자진해서 홍군을 도왔습니다. (그것은 백위파가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인 매국노 집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백군이, 백성들이 돌아선 데다 연합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 관계로 홍군에게 밀렸습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일차대전으로 국내 사정이 어려워, 러시아 파견 부대를 철수시켰습니다. 미국은 국내 사정이 괜찮은데도, 적위파 정부를 보전시켜 일본 견제 세력으로 이용하려는 심산으로 부대를 철수시켰습니다. 홍백전쟁에서 백위파 군대가 적위파 군대에게 패했습니다. *백위파 군대란 원래 여러 세력의 잡다한 군대로 큰 전투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또한, 동유럽 소련 땅은 비록 영토의 오분의 일을 차지하지만 경제의 태반을 차지하는 관계로 그 지역을 차지한 편, 곧 적위파가 차지하지 못한 편, 곧 백위파에게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백위파 군대는 일본군에 기대어 자마이칼주와 연해주에서만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일본군은 연합군이 러시아 땅에서 철수할 때 동시베리아가 적화되면 공산주의 물결이 일본 본토로 들어오게 된다는 구실 아래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레닌이 일본으로 하여금 시베리아에서 철병하게하려고 동남시베리아에 자본국가 극동공화국을 세웠습니다. 이에 일본군이 자마이칼주에서 철수하자 그곳의 백위파 정부가 무너졌습니다. 1921년 2월, 러시아에서 농민 반란이 100건 일어났습니다. 3월, 발트 해 섬 요새의 수병 일만여 명이 ‘자유선거에 의한 새 정부의 구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레닌 정부가 끝장에 이르렀다고 본 국내 지식인들이 그들을 지지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투카페스키 장군에게 폭격기로 발트 섬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에 수병과 민간인 일만오천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폭격기로 폭격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전세계가 레닌의 포악함에 전율했다. 국내외적으로 곤경에 빠진 레닌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시체제를 민간체제로 환원시켰습니다. 이것은 레닌 정부가 막판에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 그동안 유지된 것은 전시체제, 곧 군대 동원 덕택이었기 때문입니다. 레닌 정부가 민간체제로 전환시킴으로서 전시체제에 못 견뎌 들고 일어난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으나 만약 내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거나 외부에서 침략해 올 경우 대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시베리아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일본이 십일 개 사단 십칠만 삼천 명을 극동에 배치시켰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만약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략하면 일본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일본군이 한달 안에 극동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친일본 괴뢰 정부를 세운 다음 시베리아에서 철수한다. 그러면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다. 일본의 1918 - 시베리아 출병이 실패한 것은 그곳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맞서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 전체가 혼란 속에 있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싸우는 것도 한 달 이후부터다.” 위의 것은 당시 일본의 판단인데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정세상 일본군이 극동공화국에 침공하는 것은 일대 모험이었습니다. 이에 연해주의 백위파 군대를 내세웠습니다. 백위파 본군은 벌써 궤멸되어버렸습니다. 남부 연해주의 백군은 전적으로 일본군에 기대어 존속하고 있는 부대였습니다. 일본군이 그 부대를 겉으로만 백군이고 속으로는 일본군으로 재편성했습니다. 일본군 장교들이 고문관 명의로 백군을 지휘했습니다. 백군의 복장을 한 일본군 특공대가 백군에 배치되었습니다. * 세계 최강 부대 : 중대가 사단을 격퇴시키다 1921년 11월 30일, 일본군 십일 개 사단을 등에 업은 백군 이 개 사단이 극동공화국 국경 도시 이만을 공격했습니다. 그 수비대는 단번에 무너졌습니다. 백군이 극동공화국을 무너뜨리는 것이 시간의 문제가 되었는데 한국독립군이 백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한운용 중대가 백군 사단에 맞서 싸워 이만시를 삼일간 지켰습니다. 백군 전체의 혼을 온통 뽑아놓았습니다. 이만전투에서 기록에 의하면 한운용 부대 사십팔 명, 백군 육백오 명이 사망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백군 사상자가 사천여 명입니다. 이 숫자가 옳은 것임을 아래에서 논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국방부에서 몇 년 전에 북한 특수부대의 행군 속도를 밝혔는데 세계 마라톤 선수권자의 기록을 앞서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언론에서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비판했는데 국방부에서는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1966년에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보초소에서 상부에, “수상한 자들이 청와대를 향해 가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에 상부에서 그들의 행군 속도를 세계 마라톤 선수권자의 그것으로 계산해서 부대를 출동시켰는데 그들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군 특수부대의 행군 속도가 세계 마라톤 선수권자의 그것보다 빨랐기 때문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북한 특수부대가 지리산 지역에 빈번하게 출몰했습니다. 국군이 소탕 작전을 벌였는데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특수부대 수십 명을 사살했습니다. 북한 특수부대는 글자 그대로 날고 기는 사람들인데 그러한 것은 수십 명과 수백 명의 싸움, 곧 전자가 수십 발 총알을 쏠 때에 후자는, 수백 발 총알을 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래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 특수부대 소탕 작전은 험준한 산악 전투이기 때문에 피아간에 손, 발이 삐거나 몸 어디가 다치는 일이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날고 기는 사람도 약간의 부상이라도 당하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쉽사리 사살당하고 맙니다. 추측건대 국군이 날래기 급수에서 낮기 때문에 보다 많이 부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백 명 뒤에는 의무반이 있고 또 수백 명 또 수백 명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부상자는 의무반이 응급조처한 다음 후송시켰습니다. 그 자리는 대기하던 부대원이 메웠습니다. 그래서 국군이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북한 특수부대 수십 명을 사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만전투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보병 중대가 장갑차 부대, 기마 부대까지 가진 사단과 싸워 육백여 명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 배를 부상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상자들이 곧 후송되어 치료를 받은 덕택에 태반이 얼마안가 회복돼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그래서 사상자 기록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한운용 부대는 원래 북한 특수부대처럼 용맹한 군인들이 아니라 평범한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만전투 때에는 특수부대보다 열 배, 백 배 용맹했습니다. 이 전투 후에 백군, 일본군이 한국독립군에 대한 공포 속에 빠졌습니다. 한운용 부대를 격파하고 북진한 러시아 백군이 인스크에서 소련 홍군에게 패배했는데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이 맹활약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추측건대 백군이 한국독립군이 나타나면 스스로 무너져버렸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한 달 안에 극동공화국 수도 치타를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극동공화국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바로스크의 극동공화국군(이하 극군으로 표기)은 백군이 다가오자 정거장 안팎에 산 같이 쌓여 있는 피복, 신발, 식료품에 불을 지른 다음 북쪽으로 퇴각해 인스크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백군이 곧바로 추격했으면 극군은 무너져버렸을 것입니다. 당시 인스크에 치타에서 파견한 일개 사단이 있었는데 이 병력으로 일본군 장교들이 지휘하는 백군 이 개 사단을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개 사단은 극동공화국에서 백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전병력이었습니다. 이 병력이 격파당하는 것은 극동공화국의 멸망을 의미했습니다. 백군이 이만에서 한운용 부대에게 질려버린 관계로 곧바로 인스크로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이 덕택에 모스크바에서 파견한 일 개 사단이 인스크에 들어와 극군과 합류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레닌 정부에서 동시베리아를 이미 포기해버린 것이 이 지역은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태반이 쓸모없는 땅인데다 인구도 수백만 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 개 사단을 파견한 것은 자신의 괴뢰 정부가 무너지는데 팔짱을 끼고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생색이라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나마 백군이 이만에서 한운용 부대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았으면 모스크바에서 파견한 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인스크가 함락되고 극동공화국이 무너져버렸을 것입니다. * 당시 극군 전선사령관 세르세브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극동공화국을 보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만에서 백군을 삼일간 저지시킨 덕택이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 빨치산 한운용 중대의 용감성, 영웅성, 공훈은 그 무엇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나는 인민혁명군 전체의 명의로 한운용 중대에게 사의를 표한다.”
이만전투가 시베리아전쟁의 승패를 가름했다
인스크 전투에서 소련 홍군에게 패한 러시아 백군이 블로차예프카로 물러납니다. 이곳에서 홍군, 백군 양군이 대치합니다. 이때 이백 명 김경천의 부대가 칠백 명 백군이 지키는 이만시를 공격합니다. 그의 부대와 합동 작전을 벌이던 홍군 빨치산 사령관이 세 불리해지자 백군에게 항복해버립니다. 이에 김경천이 홍군까지 지휘하며 백군과 싸웁니다. 그때의 긴박한 상황을 자신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말을 타고 적탄이 가장 많이 쏟아지는 지점에서 부하들을 지휘했다. 전후좌우 부하들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지만 적탄은 나의 털 한 오라기도 못 건드렸다. 한국인, 소련인 부하들이 나에게, ‘위협합니다.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라고 말하기에 나는, ‘일본군, 백군, 마적은 나를 맞힐 탄환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우겼다.”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백군 기병대가 몰려왔다. 나는 악이 바친 사람이라 한 발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본 기병대가, ‘한국독립군이다!’라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서 달아났다.” 김경천 부대가 백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이만시를 점령했습니다. 블로차예프카에서 소련 홍군과 대치하고 있는 러시아 백군의 후방이 뻥 뚫려버린 것입니다. 백군이 전투를 제대로 치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틈을 타고 홍군이 백군을 공격했습니다. 백군이 블로차예프카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시베리아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전투는 블로차예프카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만전투였습니다. 앞장에서 시베리아전쟁 때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소련 홍군이 구 할, 한국독립군이 일 할의 역할을 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양적으로 볼 때입니다. 질적으로 볼 때는 한국독립군이 구 할, 소련 홍군이 일 할의 역할을 했습니다. 한운용 부대가 사 할, 김경천 부대가 삼 할, 여타 독립군이 이 할의 역할을 했습니다. 홍백전쟁 때 시베리아인은 그 승패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백군이고 홍군이고 간에 그들에게 학을 떼고 있었습니다. 그저, ‘일본군을 시베리아에서 몰아내야 한다. 홍군이 백군보다 좀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1921-시베리아전쟁은 소련 홍군과 러시아 백군의 싸움이 아니라 일본군과 독립군의 싸움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자보다 후자가 많이 죽었습니다. 김홍일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1921-시베리아전쟁 때 소련인만 죽었다. 한국인은 죽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독립군은 만난을 겪고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소련의 철의 장막이 영원히 걷힐 것 같지 않은 때에, 곧 시베리아전쟁의 진상이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 같은 때에 그 회고록을 집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군이니, 홍군이니 모두 위정자들이 편을 갈아놓은 것입니다. 러시아 백성들은 먹고 살기 위해 또는 강압에 의해 백군, 홍군이 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차’하면 항복하여 백군에서 홍군으로, 홍군에서 백군으로 되었습니다. 한편 한국독립군은 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군인이 된 사람들이라 궁지에 몰려도 항복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인은 죽지 않고 한국인만 죽은 것입니다. * 조정래의《태백산맥》을 보면 공산당 내지 그 군대는 공산주의 이념을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인데 그것은 작가의 상상일 뿐이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공산당, 그 군대에도 그런 이념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았다. 먹고 살기 위해 또는 강압에 의해 당원이 되고 군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좌파 학자들이 이데올로기 목적에서 그들을 칼마르크스, 레닌 주의에 철두철미한 사람들로 과장했다. 우파 학자들은 국민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렇게 과장했다. 이에 사람들이 공산당과 그 군대를 사상, 이념을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로 잘못 알게 되었다. ** 소련, 중공의 군대는 공산주의 이념에 보다 더 무관심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당 수뇌부에서 군대를 부릴 방도가 없는 관계로 골수 당원을 각 부대에 파견하여 그 부대장을 감독, 지휘하게 했다. 군의 지휘체계를 이원화하는 것은 군대에 치명적이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여기에서 소련군이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열 배의 손실을 입은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에게 승리했는데 그것은 전자의 뒤에는 소련군이 있는 반면에 후자의 뒤에는 미군이 없는 덕택이었다. *** 보훈처에서, ‘김경천은 백군과 싸웠지 일본군과 싸우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학자들의 견해를 대변한 것일 것이다. 일본의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1921-홍백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므로 김경천이 일본군과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기밀문서에서는 그가 그때 황군(일본군)과 싸웠다고 했다. 학자들이 역사 연구라는 명목 때문인지 기밀문서는 무시해버리고 역사적 기록만 받아들여 김경천이 백군과 싸웠지 일본군과 싸우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 1921-시베리아전쟁 현장에 있었던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에 백군 복장을 한 일본군 시체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도 많이 죽었음을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1921-시베리아전쟁은 일본군과 한국독립군의 싸움이었다. 레닌 정부가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다. 전혀 기대를 안했는데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것이다. ***** 1921-시베리아전쟁 현장에 있었던 김홍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국독립군은 거의 죽지 않았다고 했고 청산리전투 현장에 있었던 이범석은 한국독립군이 일본군 수천 명을 사살했다고 했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이청천이 어찌 회고록을 집필할 수 있었겠는가. ****** 이응준, 이청천은 일본정규육사 출신이고 김홍일, 이범석은 중국군관학교 출신이었다. 이응준은 삼일운동 전후 김경천과 행동을 함께 했지만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응준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경천 이야기를 진실하게 쓰고 있음이 김경천 일기가 나타남에 따라 밝혀졌다. 이응준이 회고록을 집필할 때는 역시 철의 장막이 영원히 걷힐 것 같지 않은 때, 김경천의 일기가 나타나는 것은 꿈도 못 꿀 때인데도 진실하게 쓴 것이다. 민족양심 측면에서는 김홍일, 이범석은 옳은 사람이고 이응준은 옳지 않은 사람이지만 진실기록 측면에서는 그 역(逆)이었다.
김일성장군에 대한 미국 기밀해제 문서 일제시대에 전국민의 추앙을 받은 김일성장군이 해방후에 이데올로기 속에 파묻혀버렸습니다. 1990년대에 그 속에서 빠져나왔는데 반세기 동안 파묻힌 관계로 국민적 관심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문제가 해결된 덕택에 학자들이 김일성장군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장군이 백마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제를 무찔러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전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그런 인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김일성장군은 전설 인물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전국민의 추앙을 받은 인물을 100% 허구의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별호를 사용했고 국경에서 활약했다. 그러므로 김성주가 김일성장군 전설 형성에 한몫 낀다고 할 수 있다.” 위의 것은 오늘날 학계의 견해인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 김성주가 바로 김일성장군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성주가 백여 명 빨치산을 이끌고 일제와 싸울 때 일제는 수백만 군대를 이끌고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김성주로서는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은 김일성장군이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전설 인물이든 실존 인물이든 간에 한반도 방방곡곡에 알려지고 전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라면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945년 직후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해방직후 기록을 조사해보면 ‘김성주는 가짜이고 김광서가 진짜 김일성’이라는 기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록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이데올로기 문제가 이미 불거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 외에 또 문제가 있습니다. 해방후 정부도, 언론도, 학계도 극도의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무슨 말인들 안 나올 수 있겠습니까. 김일성장군에 대한 진실을 아는 사람이 모두 작고해버린 오늘날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가 있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1945년 해방후 한국이 미국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 미국은 최고 선진국입니다. 그 정부 문서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기밀문서의 경우, 이데올로기 문제도 없습니다.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의 정확함은 유명합니다. 1945년 직후 그들은 김일성장군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정부의 기밀문서도 시한이 차면 공개합니다. 지난해부터 김일성장군에 대한 기밀문서를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기밀문서에서, 백마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제를 무찔러 일제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전국민의 추앙을 받은 김일성장군은 허구의 인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파가 걱정한대로 김성주가 김일성장군 전설 형성에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장군은 실존 인물이다. 김성주가 그 이름을 차용했다.”라고 했습니다. * 김일성장군에 대한 미국 기밀해제 문서는 특종 중 특종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문서가 한국에서 정부, 언론,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일보, 미주한국일보에서 특종임을 알아채지 못한 채 짧게 보도했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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