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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케리니 첼로협주곡 9번 2악장 Jacqueline du Pre 본문

♬ OUT 음악

보케리니 첼로협주곡 9번 2악장 Jacqueline du Pre

Ador38 2007. 8. 18. 12:32
 
Cello Concerto No.9 in B flat Major
보케리니 첼로협주곡 9번 내림나장조
Boccherini, Luigi 1743~1805
2. Adagio non troppo
Jacqueline du Pré - Daniel Barenboim
English Chamber Orchestra
 
     
그녀의 연주에 불만을 토로하던 평론가들이 지적하던 일반적인 문제는 그녀의 연주가 억제 없이 감정과다로 흐르며 히스테릭하고 과장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그녀의 연주를 과다표현으로 치부하는 이들은 뒤 프레의 정열에 압도 당했기 때문일 경우가 많았다. 그녀의 넘치는 정열은 감정과다가 아니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었다. 42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파란만장한 질곡의 삶을 영유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여인의 열정을 어느 누가 감정과다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길지 않은 시간들을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의 삶보다 더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진한 감동을 준다
     
A Lasting Inspiration - Jacqueline du Pre
     
보케리니의 <첼로 협주곡 Bb장조>는 실내악에서 저음파트 악기였던 첼로를 일약 협주곡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곡으로 갈랑 풍의 우아한 선율이 아름답다.
작품배경
1743년 루카에서 태어난 보케리니는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펼치던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였다. 1767년 파리 공연차 들렀을 때 스페인 대사와 만난 것을 인연으로 1805년 타계할 때까지 스페인의 왕궁악사로 봉직했다. 그는 11개 협주곡을 남겼는데, 그 중 2-3개 작품이 현재에도 음반 등을 통해 연주되고 있다. 보케리니 전곡을 정리한 자라르는 이 곡이 1770년을 전후로 작곡되었다고 추정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B 장조는 19세기 말 그뤼츠마허에 의해 개작된 것이다. 그러나 1948년 스위스의 슈투르체네거가 드레스덴 국립도서관에서 원본을 찾았고, 1950녀넹는 슈피글이 런던의 헌 책방에서 보케리니 필치라고 생각된 이 협주곡의 1,3악장과 동일한 소나타원보를 발견함으로써 현재의 곡이 완전히 낭만풍으로 개작된 것임을 재확인했다. 특히 현재의 2악장은 원래 3번 G장조의 2악장을 빌려온 것이다.
 
구성과 특징
제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Allegro moderato
투티의 전주 5마디 후에 첼로가 당당하게 등장한다. 소나타 형식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리듬적 1주제와 선율적인 2주제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특히 2주제는 고음부의 섬세한 장식적 악구로 독주자의 기량이 요구된다. 발전부는 투티의 짧은 전개 후 A선의 하모닉스를 밑받침하는 첼로의 중음 선율이 애조를 띠며 흐른다. 이어서 투티가 주제를 연주하고 첼로는 D선과 G선에서 6도로 만들어진 화성적 대선율을 분산화음으로 쪼개어 연주하는데, 이 부분은 그뤼츠마허가 삽입시킨 부분으로 첼로의 운지법을 교묘히 사용했다. 점차적으로 박자를 배가시켜 안정을 되찾은 다음 첼로가 1주제를 강한 포르테로 재현하며, 끝맺음은 카덴차로 장식한다.
 
제 2악장 아다지오 논트로포 Adagio non troppo
오보에를 중심으로 관현악이 2마디의 하강음절을 전주한 다음, 긴 지속음으로 시작되는 애수 젖은 첼로 독주가 나온다. 전체적으로 억제한 감정을 부드러움으로 감싸면서 가슴 속의 사연을 모두 드러내 보이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선율은 그 자체가 어떤 기교보다도 감정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작곡가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제 3악장 론도 알레그로 Rondo Allegro
경쾌한 주주제와 해학적이고 기교적인 종속 악절들이 춤추듯이 엮어나가는 피날레는 론도-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투티의 팡파레에 이어 독주가 먼저 주제들을 제시한 후 다시 투티가 후렴식으로 주주제를 반복하는 방법을 택해 첼로의 기교적 연주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가치와 매력
보케리니 음악에는 바로크 전통에 대한 향수, 로코코적 취향, 고전적 형식, 낭만적 표현 등이 용해되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양식을 만든다고 한다. 슬러를 이용하는 그의 독특한 프레이징은 마치 바로크시대의 긴 장식 음절들처럼 달콤함과 부드러움을 음악에 가미시킨다. 이 점이 하이든의 깊이와 웅대함에 비교되어 보케리니는 '하이든의 부인'이라는 평판까지 얻었다.
그는 이팔리아의 현악 합주양식을 프랑스 기악형식과 결합시켜 첼로와 실내악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협주곡 양식을 확대하고 기법을 비약시켜 첼로에 명기적 성격을 부여해 독주악기로서의 위치를 높이는 실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Jacqueline Du Pre, 1945 ~ 1987
낙천적인 미소 뒤에 가려진 죽음의 그림자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클린느는 세 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악기 소리 가운데, 특히 첼로 음을 지적하며 그 소리를 내고 싶다고 졸랐다고 한다.
네 살 때 자기 키보다 큰 첼로를 선물 받고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첼로를 공부한 그녀는 카잘스와 토르틀리에, 그리고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사사해 어린 나이에 금세기 첼로계의 모든 흐름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16세가 되던 1961년 런던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고, 65년엔 뉴욕에 데뷔했다. 이후 그녀는 세계적인 첼리스트로서 널리 각광을 받으며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나이 23세이던 68년에는 가족이 탐탁치않게 여기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했고, 28세 되던 73년, '다중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려 사실상 연주 활동의 막을 내려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다니엘 바렌보임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지는 못하지만 그와의 결혼이 재키(뒤 프레의 애칭)에게 음악적으로 좀 더 성숙할 수 있었고, 좀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역시 바렌보임에 의해 뒤 프레가 좀 더 많은 순회 공연과 바렌보임이 지휘자로서 초기의 캐리어를 쌓는 동안 협연자로 혹사당했다는 인상 역시 감추기 어렵다.
어쨌든 뒤 프레가 다니엘 바렌보임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태인이었던 바렌보임을 따라 중동과 전쟁(6일 전쟁) 중이었던 이스라엘까지 날아가 이스라엘 교향악단과 협연한 사실만 하더라도 뒤 프레의 그에 대한 사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서 유태인으로 개종한 뒤 프레는 이스라엘 수상인 벤구리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고, 영국으로 돌아온 뒤 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연주는 너무나 힘에 넘쳐 현을 끊어먹는 실수를 저지를 정도였다.
비평가들은 그녀의 연주에 대해 "그녀는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고 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황홀함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불행이 그녀를 덮쳤다. 1970년 무렵 그녀는 눈에 띄게 피로해 하기 시작했다. 눈이 침침해질 때가 많았고, 손가락이 저리며 차가워지고 걸음걸이도 점점 더 볼품없어져 갔다. 병에 걸린 뒤 프레는 차츰 병의 증세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생활과 다중경화증 발병
뒤 프레는 아주 가끔씩 자신의 이런 증상을 남편에게 털어놓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바렌보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바렌보임은 연주자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그녀의 연주가 필요했다.
재키가 리허설이나 연습 때 자주 템포를 놓치게 되자 바렌보임은 그때마다 뒤 프레를 혹독하게 몰아부쳤다. 이를테면 그녀의 정신력이 해이해진 탓이라는 것이 바렌보임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뒤 프레 역시 자신이 아픈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고 일주일에 5회씩 프로이트 학차의 정신분석가인 월터 조피에게 진찰을 받으러 다녔다.
그러는 중 그녀의 연주에 대한 악평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미치게 한다"던 그녀의 연주는 차츰 "일관성도, 논리성도 없는" 연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서웠다.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은 "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늦게 돌아온 데 대해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 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둘러댔다. 결국엔 아마 도로변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뒤 프레가 연주 중에 활을 놓쳐 버릴 지경이 되어서야 찾아간 병원에서 그녀가 '다중경화증'이란 희귀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뒤 프레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었다고 한다.
자신의 정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렌보임의 질책이 얼마나 심했으며 그녀 자신이 그로인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병으로 인해 더 이상 순회공연에 따라 나설 수 없게 된 자클린느 뒤 프레는 그 후 음악 교육에 정열을 바쳐 78년에 맨체스터의 솔포드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요마와 린 하렐의 스트라디바리는 그녀의 것이었다. 뒤 프레가 이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1987년,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랜 투병 생활로 지친 42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녀의 연주는 남성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힘과 넘치는 표현으로 마치 톱질이라도 하는 듯 힘찬 보우잉과 순진하고 솔직한 동작으로부터 발산하는 순수한 열정이 돋보였다.
그녀는 병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항상 웃음을 간직한 낙천주의자였고, 자신감에 넘쳐흘렀으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달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그런 낙천적 성격과 자신감이 그녀의 연주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듯 했다.
이런 그녀의 연주를 한편에서는 자신을 활활 태워 만들어 낸 음악’이라고 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한 인간이 평생을 두고 써야 할 수명과 기를 짧은 기간에 소진했기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녀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고 열정적이었다.
그녀가 잃어 버린 것은 첼로 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 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최후의 비참했던 연주회로부터 시작하여 두 다리, 양팔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을 잃었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일 지경이어서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전화의 다이얼 돌리는 일도, 돌아눕는 일도 그녀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1975년 이후로는 눈물을 흘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뒤 프레에게 연락하는 횟수를 줄였고 차츰 아무도 찾지 않게 되었다.
뒤 프레는 아무도 없는 밤에는 혼자 절망에 떨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와달라고 조르곤 했다. 뒤 프레는 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아 보내던 시절 이렇게 고백했다.
“첼로는 외로운 악기다. 다른 악기나 지휘자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첼로로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를 가진 보조자가 필요하다. 나는 운이 좋아 다니엘을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거의 다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음반으로는 엘가의 협주곡(EMI)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며, 코바셰비치와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EMI)도 수작이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라도 자클린느 뒤 프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뒤 프레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뒤 프레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을 틀어놓고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들을 때마다 몸이 찢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눈물 조각처럼" 그러곤 고개를 떨구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출처 : 어리버리동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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