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익(1938~1983)
경기고 2학년 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외교학과 입학. 하와이대 석사,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을 거쳐, 국보위 경제분과위원장, 5공 청와대 경제수석. 재임 시절 정부규제 철폐, 물가 안정, 통화 긴축으로 향후 경제 호황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됨.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테러 때 숨짐.
서울 서빙고동의 아파트에서는 한강이 보였다.
"처음엔 반포에 살았어요. 남편이 묻힌 국립묘지에 갔다가 한강 맞은편에 아파트 짓는 걸 봤어요. 이쪽으로 이사 온 것은 국립묘지를 보기 위해서였지요.
여기 창가에서 바로 보여요. 제 남편이 사준 집 같아요. 국립묘지에는 남편이 죽고 10년 동안은 매일 갔어요. 요즘에는 일주일 두세 번씩 운동 삼아 가요."
아웅산테러(1983년) 때 숨진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의 부인,
이순자(72)씨를 보니 곱게 늙는 모습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부터 들었다. 풍파(風波)의 세월도 그녀의 천성을 허물진 못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창피하지요. 남편이 저세상으로 갔는데 혼자서 칠십 몇 살까지 살아온 것은 뻔뻔한 일이죠."
그녀는 최근 서울대에 20억원을 내놓겠다고 약정했다. 기자회견 없이 다만 서울대에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전했다.
'과거에 선진국 원조와 장학금의 수혜자로 배운 학문과 기술로 우리가 나라를 일으킨 것처럼 이제는 우리보다 불우한 나라에 힘을 보태는….'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젊은 학생과 관료들이 서울대에 와서 경제정책을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이에 서울대는 '김재익 펠로십(장학금) 펀드'를 만들겠다고 화답했다.
―어떤 심적 계기가 있었습니까?
"이건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어요. 이제 인생을 서서히 정리할 나이도 됐고요. 저는 연금이 나오니까 돈이 더 필요가 없어요.
사실 돈이 있어도 쓸 돈만 자기 돈이지요. 생전에 남편은 '우리가 좀 살게 되면 우리보다 못한 나라의 젊은이를 위해 교육프로그램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내놓으려는 액수가 내 형편에서는 매우 크지만 참 적다는 걸 알았어요. 개인당 한해 3300만원이 든다고 해요. 선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혹 더 있을지 모르니.....,
대학 측에서는 펀드를 키우자고 했어요."
―남편이 떠난 뒤로 27년 동안 교수(숙명여대)를 하면서 홀로 두 자식을 키웠습니다. 선뜻 20억원을 내놓을 만큼 그렇게 많은 돈은 언제 벌어놓았지요?
"지난주 서울대 총장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런 의사를 비쳤는데, 바로 다음날 신문에 났어요. 이렇게 빨리 알려질 줄은 몰랐어요. 사실 지금은 가진 돈이 없어요."
―무슨 뜻입니까?
"3년 뒤면 돈이 마련될 거예요. 제가 1980년에 장기저축예금을 들었어요.
남편이 '경제수석 마누라가 무슨 증권사에 들락거린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해서 예금만 했던 겁니다.
그때 은행 이자가 20%대였어요. 만기일인 1985년에는 원금의 150%가 되어 있었어요. 남편이 죽은 뒤 그 돈을 탄 거죠. 둘이 모은 돈이어서 차마 그 돈을 쓸 수가 없었어요. 그때 친척이 그 돈으로 경기도 용인에 땅을 사놓으라고 했어요.
이번 여름에 그 땅이 토지주택공사에 수용이 됐어요. 3년 만기 채권으로 받았어요. 2013년에 약 12억원을 받게 됩니다. 바로 그 해는 남편이 돌아가신 30주기가 돼요. 이렇게 딱 들어맞으니, 제 힘으로 한 것 같지 않더라고요."
―20억원을 약정하고, 나중에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내놓겠다고 보도됐더군요.
"언론 보도가 잘못 나가서…, 20억원 중에 이 집이 포함돼 있어요. 제가 가진 큰 재산이 집과 용인 땅이에요. 제게는 이 집이 너무 커요. 자식들도 모두 결혼했고. 제 남편은 굉장히 검소한 사람인데 생전에도 '우리가 일반 사람들 평균보다 몇 배를 잘 산다'고 했어요. 때가 되면 이 집을 팔고 실버타운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장차 유산을 물려받을 아들이 흔쾌하게 동의했습니까?
"주위에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아들과 의논했느냐고? 그런데 왜 그래야 하죠? 미국의 부잣집 아이들은 '우리 아버지는 부자이지만 난 아니다'라고 합니다. 사전에 상의가 없었어요. 저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걔들이 벌어준 돈이 아닌데."
―이를 알고 아들이 섭섭하게 여기진 않던가요?
"아들들은 '그 돈을 아버지의 이름만으로 아니라 어머니 자신을 위해서도 좀 쓰시라'고 해요. '주위에서는 어머니께 소송을 걸어야 한다고 부추긴다'고 농담도 하지만 '어머니 때문에 저희들 위신이 올라갔다'고 말해요."
―그 돈에는 당시 남편이 숨진 뒤 받은 보상금도 포함돼 있나요?
"보상금은 아이들 학비 등에 쓰였어요. 아웅산 사태 때 돌아가신 분들 대부분이 40대였어요. 공직에서 20년 이상 일해야 연금이 나오는데, 남편을 포함해 이분들은 연금 수혜 대상이 안 됐어요.
당시 전두환 대통령께서 일해재단(현 세종재단)을 통해 연금이 지급되도록 해줬어요. 또 상속세금 면제와 유자녀 교육자금과 생활보조금 등 당당하게 혜택을 줬어요. 그건 참 고마운 일이었죠."
―아웅산 참사 소식은 처음 어떻게 접했습니까?
"그날 친구와 함께 북한산 등산을 하고 내려오니 산 입구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어요. 뭐 무슨 일이 생겼나 했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는 알았어요.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어요."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
―27년 전이면, 이제 담담하게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다', '좀 지나면 잊혀진다'며 제게 위로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잊어버려요?
세월이 지나면 잊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다만 이겨내는 힘이 생기는 거지요.저는 작은 아들 때문에 살았어요. 걔가 없었으면 이 세상에 안 살았을 겁니다.
큰아들은 대학생이었으니 괜찮았어요. 하지만 초등학생인 막내를 두고 제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죠. 걔를 핑계로 살았어요."
―당시 우리 정부가 북한에 똑같이 보복 대응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은 안 들었나요?
"전쟁이 날 수 있는 조건이었죠.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했고, 우리 공직자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으니까요.
당시에도 좌파세력이 별별 음모론을 퍼뜨렸어요. 북한은 아예 반응이 없었어요. 정말 제가 폭탄을 들고 나가고 싶더라고요. 그래도 마음을 진정하니, 내 애들을 키우려면 전쟁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은 참 자기 본위로만 생각하죠."
―천안함과 연평도 피격 사태를 보면서 느낌이 아무래도 남달랐겠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무력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으로는 리더십이 없어 당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불쌍해요. 국민들은 정부가 하는 일을 못 믿게 됐으니….
천안함 사태 때 정부가 민간에 잠수부 자원봉사자를 찾는 걸 보면서 서글펐어요.아니 군(軍)에서 일어난 일은 군이 스스로 해결해야지, 민간에 도움을 구하니 그게 어떻게 나라의 군대인가요."
―남편이 5공(共)에 참여할 때는 어떠했습니까?
"욕을 참 많이 먹었지요. 형제와 친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죠. 저도 펄펄 뛰고 반대했어요. 이민을 가자고 했지요. 남편 실력이면 미국 대학이나 국제기구로 갈 수 있었어요."
―남편은 왜 따르지 않았을까요?
"연희동에 가서 전두환씨와 한 번 면담을 하면서 그 솔직한 면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그 뒤로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분야 가정교사를 몇 달간 했어요. 남편은 자기가 이루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이 다 욕해도 자기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어떤 자리에서 '김재익은 일을 한다는 핑계로 누구 밑에 가서도 충성할 인간'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집에 돌아와 울면서 남편에게 그 얘기를 전했지요. 남편은 가만히 듣고서는 '만약 내가 누구를 설득시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해야지'라고 했어요."
―남편이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발탁된 뒤 "새로운 경제정책 추진에는 엄청난 저항이 있을 텐데 끝까지 제 말을 믿어 주시겠습니까?" 했을 때, 전두환 대통령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답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합니다.
"경제수석은 정치자금과 연계되잖아요.
남편은 '그런 일을 혹 제게 맡기면 그만둔다'고도 했어요. 당시 대통령이 다 알아서 하라며 전권을 줬던 게 사실이에요. 군부와 갈등이 많았어요.
군부 출신 실세는 남편 사무실 책상 위에 권총을 탁 놓았어요. 대통령의 신임이 남편 쪽으로 실리는 것에 대한 경고였어요. '너 죽고 싶어?' 하는 메시지였어요."
―남편이 집에 와서 이런 사실을 모두 얘기했나요?
"이는 나중에 전해 들은 얘기입니다. 만약 당시에 제가 알았다면 '당장 그만두고 떠나자'고 난리를 쳤을 거예요. 사실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국내로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도 저는 반대했어요.
저는 미국생활을 원했어요. 남편은 '미국의 수천 명 경제학자보다 한국의 열 명 안 되는 경제학자가 우리나라를 살릴 수가 있다. 우리나라가 외국인 컨설턴트의 자문을 받지만 이들은 가슴으로 우리 현실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어요.
박정희 정권 때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을 맡게 되자 '월급 안 받고도 일할 수 있다.이코노미스트라면 이런 기회는 돈을 내고도 해야 한다'고도 했어요."
―남편이 숨졌을 때 나이보다 이제 큰아들의 나이가 더 많지요?
"미국에 있는 큰아들이 지금 47세예요. 걔가 남편이 숨졌던 45세가 됐을 때 저는 불안해서 제대로 잠을 못 이뤘어요. 제 아버지가 돌아간 나이를 무사히 넘겨야 하는데…, 아들이 그 나이를 넘어서자 안심이 됐어요.
둘째 아들은 아직 삼십대예요."
―주변에서 재혼을 권하지 않았나요?
"글쎄, 바보처럼 재혼도 못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저는 '국립묘지 열녀'로 통해요. 지금도 꼭 생화(生花)를 놓고 오니까요. 살아오면서 좋은 일이 있으면 남편 묘소를 찾아가 먼저 이야기하고, 속상해도 그 앞에서 푸념했어요.
저는 혼자서 두 아들을 키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아이들에게 얘기할 때도 남편의 말을 제가 대신 전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어요."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일편단심이니, 남편의 무엇이 그리 좋았나요?
"굉장히 명석했어요. 원래 공대를 지망했다는데 색약(色弱)이라 못 갔어요. 수학을 잘하고 기계를 좋아했지요. 대학에서 만났을 때 부터 그분의 착한 심성이 제일 좋았어요. 남의 말을 선의로만 받아들여요.
물론 저도 사람인데 약이 오르는 일이 많죠. 고생만 죽어라고 시켜놓고 떠나갔으니…. 하지만 그동안 남편의 음덕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어딜 가든 남편을 아는 사람들이 제게 잘해 줬으니까요."
나는 더 이상 뭐라고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