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석과 내 고향 마산
< 백석과 박경린(난) >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오는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삼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쳐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통영 /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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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루기,호래기- 손가락만한 오징어>.
위의 시는 저 유명한 평북 정주 출신 풍운아 백석의 시입니다.
정주가 그 시절에 어딘데...시인은 통영 근동을 좀 어슬렁거렸나봅니다.
예기치 못한 데서 고향얘기가 나오면 눈이 번쩍 띄는데 마침 마산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시의 정서에 젖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고향에 가 있습니다.
마산은 신시가와 구시가로 대별되는데 전 구마산에서 소년기를 다 보냈어요.
통영 첫 귀에 구마산에서 출발하는 선편이 반나절 걸려서 통영에 닿는다란 얘기는 왜정 때의 일이고
제가 클 때는 '천신호'라는 디젤선이 취항을 했더랬는데 세시간 남짓이면 승포 앞바다에 걸쳐진
거제대교 지나 통영에 닿았습니다. 요즘은 무시로 출발하는 버스가 1시간 남짓이면 떨쿼주지요.
통영이야 이순신을 숭상했던 박통 시절 시로 승격되며 충무라 불렀는데 통합시로 되면서 다시
옛지명 환원이란 원칙 하에 통영으로, 익산(이리),사천(삼천포)등과 함께 옛지명을 되찾게 된거지요.
작년인가? 아쉽게도 제고향은 마산,창원,진해를 묶어 창원이란 이름으로 통합됐어요.
영화도, 음악도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의 것이 평생의 이메지로 남듯 지명도 제가 부르던 지명에서
향수를 느끼지요. 백석의 시에도 나옵니다만 '황화장삼 영감이 일본 말을 잘도 하는 곳'이라구...
그래요 통영이든 마산이든 어지간한 명사들은 왜말들이 많이 쓰였지요.
타기해야할 왜말들이 많이 정화된 요즘이지만 어릴 적에 자주 듣던 왜말 중에서 몇몇은 오히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면 욕먹기 딱 좋은 일이겠지만 , 다락에선가 묵은 홍시라도 꺼내 주실려는지
"야야, 거 덴찌가 어딘노? 좀 찾아봐라..' 하시던 할머니의 '덴찌'처럼 어쩔 수 없이 좀 아련해지는
말이 있기도 하답니다.
그리고 겨울 풍경에, 그 피도 안간 생대구를 빨래 말리듯 널어 말리던 거며, 김장철이면 바지게로 져
운반하던 무배추 ,장작을 패서 대청 아래 차곡차곡 쌓아둬야 삼동을 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며
겨울 선창의 좌판에는 그냥 초장에 콕 찍어 먹었으면 하는 싱싱한 손가락 만한 호래기며...
여름이면 천신호 위에서 다이빙하며 선착장에서 수영하던 거며, 미창이라 불리던 창고가 도열한
중앙부두 바닷가에서 낚시하던 거... 아,,내 감성이 여물어가던 그 순수의 고장...
아무튼, 우연히 접한 백석의 시 한 편 덕분에 옛고향 생각 실컷 했어요.
잘 모르지만, 읊조리는 맛으로 치면 백석의 시만한 건 잘 못봤어요. 백석..그 읽는 맛이라니요...ㅁ
정주가 그 시절에 어딘데.. 하지만 한 때 시인께서 너무도 사랑한 통영 여인
난과의 추억을 찾아 남도 쪽을 좀 어슬렁거렸던가 봅니다.
아...통영마저 사랑하게 된 백석.....
*고당-고장의 옛말, *호루기,호래기-손가락만한 오징어
*오구작작, 오불고불-그냥 있는 느낌 그대로...
* 난 - 백석의 연인.대원각 안주인인 김영한여사( 자야)를 만나기 전에 사랑했던 여인.
이 여인과 얽힌 기막힌 사연을 아래에 붙였고, 자야 여사 것도 따로 붙였다.
바 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女性2권10호 발표년도1937 )
1935년, 백석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당시 이화학당의 란 (박경련)을 만나게
되어 사랑하게 된다.
이 시는 1937년 10월에 발표 된 詩로 1937년의 사월의 봄은 백석에게 충격적인 4월이였다.
그동안 밀월을 나누고, 통영까지 내려가 란의 부모님에게 정식 청혼하여 미래의 동반자로 란과의 인생을 꿈꾸는
사월이였는데......느닷 없이 蘭이 친구 신현중과 결혼해버린 것이다.
이 슬프고 기막힌 외로움과 사랑에 대한 詩가 바로 백석의 바다의 詩이다.
통영 앞바다를 보고 읖조렸을 란의 바다.....와 함께,
[박경련의 회고에서, 재회]
조선일보에 재입사한 백석은 우연하게 서울에서 친구 신현중을 만났다.
서로가 서먹서먹해도 그래도 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래서 신현중은 백석을 가회동 집에 처음으로 초대를 하였다.
그때의 상황을 신현중의 부인인 박경련(란)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 나는 그 때 깜짝 놀랐어요. 현중씨 뒤에 누가 들어오는데 백석씨라는 것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백석씨도 어색한지 방문 앞에서 얼굴이 빨개가지고 우물쭈물하고 들어오지 못 하고 있었어요.
백석씨는 부끄러워 숨는 것 같았어요.
나는 옆으로 빠져 나와 바로 옆집 외삼촌 집으로 갔어요. 나는 그 날밤 외삼촌 집에 있었어요.
그 다음 날 현중씨는 외삼촌인 죽사에게 엄하게 꾸지람을 들었어요.
외삼촌은 그런 법이 어디 있나고 막 야단을 치고 현중씨는 상당한 초달을 받았어요.
그 이후 백석씨가 파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날 이후 현중씨는 얼마 있지 않아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받아 나와 함께 경남 통영에 내려가서 살았어요.
충무공 사당이 있는 바로 밑에 명정동 그 집 말입니다. 그 때는 벌써 애도 생기고 농사일에도 신경을 쓰고
바닷가가 살기가 좋았어요. "
이 무렵의 백석 연보 1935년(24세) 6월의 어느날,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평생 구원의 여인으로 남을
'란(蘭)'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화고 학생이었던 통영 출신의 란은 백석의 마음을 온통 휘어잡는다.
1936년(25세)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200부 한정판으로 발간.
1월29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짐. 이 출판기념회의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문,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임.
시집 <사슴>은 발간 되자마자 이틀만에 매진 되었다.
같은 해 4월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 감.
이때의 생활 소감을 수필 [가재미], [나귀]로 (동아일보)에 발표함
1939년(28세) 다시 두번째 결혼식을 올리나, 다시 혼자서 서울로 올라옴.
이 사실을 알 게 된 자야는 다시 백석 곁을 떠남.
조선일보에 재 입사하여 <여성>지의 편집을 돌보다가 다시 사임함.
이 해 말 만주의 신경(현재의 명칭은 장춘)으로 가서,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의 황씨방에 거처함.
1939년(28세) 1월 26일 조선일보에 재 입사함.
백석의 부친 백영옥은 비슷한 시기에 신문사를 그만 둠. 백석은 최선을 다하여 월간 [여성]의 편집을 보았다.
백석은 오랜만에 만난 신현중에 이끌려 함께 란'이 있는 그의 집에 갔다
10월 21일에는 조선일보를 다시 사임. 그리고는 고향 근처의 평안북도를 여행 하였다.
백석은 친구 허준과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詩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함..
백석이 자야를 만나기 전, 사랑하는 여인이 통영의 란이다. 백석의 남행시초와 남행의 詩들은 난과의 만남과
이별을 전 후에서 남해를 여행하면서 쓴 시들이다.
란이란 첫눈에 반한 여인을 사랑했다가 놓쳐버린 여인이 사는 고향, 친구의 고향, 백석의 통영에 대한 서정과
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소월을 동경, 스스로 시인의 길을 영광으로 여겼던 백석은 동경 유학을 마치고 조선일보사 여성지 편집일을
하던 1935년 6월,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 갔다가 당시 이화여고 학생이던 통영 출신의 박경련을 만나
첫 눈에 반한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백석은 통영 란의 집으로 내려가 정식으로 청혼한다.
박경련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친 오빠(박경련의 외삼촌) 서상호에게 백석이 누구인지 뒷조사를 주문한다.
당시 통영 출신 거물급 인사였던 서상호는 독립 운동을 한 인사로 서상호는 지인이자, 같이, 옥고를 치른
잘 아는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신현중에게, 백석의 뒷조사를 의뢰했다.
백석과 신현중의 묘한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며칠후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
"그래 뭘 좀 알아봤는가 "
"예"
"그래 백석이 어떤
사람인가 "
"예"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백석은 조선일보에서 여성지의 편집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집안은 매우 가난하고 고향은 함경북도
정주이며 그에 어머니가 기생출신이란 소문도 있다는 것등 소문과 내용을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들은 서상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 선생님'
"왜 그런가 "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신랑감으로 저는 어떻습니까 ? "
"뭐 "
어~그래 허허허허 그거 좋지 "
"하지만 자넨 약혼녀가 있지 않은가 "
"아~아닙니다"
"벌써 오래 전에 정리했습니다 "
"으~흠~ 그래 그럼 생각해보세
....
이렇게 해서
..
서상호의 믿음을 몽땅 산 신현중은 어머니 서씨와 서상호의 천거로 박경련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그 해 4월
통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37년 4월에는 백석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4월 7일에 백석이 그렇게 그리워하고 마음에 두었던 처녀 경련=란이 결혼을 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백석의 절친한 친구인 신현중과 .....모든 사랑이 다 그렇듯이 사랑을 사랑하는 한 사랑이,
다른 사랑과 결혼을 해 버리면, 그 한 사랑은 절벽의, 단애의 높낮이에서, 자신을 때리는 스스로의 충격에
휩싸일 것은 분명 할 것이리라,
사랑의 어두움이 안개처럼 나에게 달려 들고,
나의 눈물이 그대의 눈물로 키스를 하는,
한 사랑에 대한 가슴 비를 내려 그 가슴에 내내 가득할 것이리,
이 아름다운 봄날에, 난, 어이 우박이라 할 것인가,
백석의 가슴에 통영의 란은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리고 통영마저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남해를 더 여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백석은 또다른 여인 자야를 만난다.
이 여인이야 말로 대원각 안주인이고 법정스님께 그 큰 요정을 다 내준 여인이다.
나중에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고 2억원의 거금을 희사한 여인이다.
자세한 이야기가 아래에 나온다. 위 난 이야기만도 지리한데 더 지리하고 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런 로맨티스트를 일찌기 가졌다는 것으로 행복하다. 일독을 권하나 알아서 하셔요...
- 법정스님 - 2천억이란 이 큰 재산을 다 내놔도 안아깝소?
- 자야여사 - 에그,,시 한 줄만도 못한걸요....
자야녀사가 그토록 보고싶던 시인 백석은 북한에서 아동문학가로 구차하게 살고 있었는데
자야 여사도 몰랐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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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石,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子夜 여사의 회고
1.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지만, 서울에서 경의선(京義線)을 타고 서른 네 번째 역을 지나면
운전(雲田), 고읍(古邑) 다음에 정주(定州)역이 나타난다.
한양서 북으로 천리길을 나귀를 타고 터벅터벅 가야 하던 옛 평안도 정원(定遠) 땅의 군청 소재지.
이른 아침이면 안개가 슬금슬금 기어내리던 북쪽의 독장산(獨將山), 동으로는 봉명산(鳳鳴山), 가뭄때
기우제를 지내던 묘두산(猫頭山), 큰 돌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다던 방호(防胡)고개, 서쪽으로는 임해산(臨海山)
이 있어 곽산(郭山)가 경계를 이루고, 동남은 정족산(鼎足山)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기에 좋았다.
역시 그쪽으로 날망에 다섯 봉우리가 보이는 제석산(帝釋山)이 있었는데, 정주 사람들은 이 산을 일러
오산(五山)이라 했다. 춘원(春園)이 오산학교 선생 시절 '제석산인'이라 자호한 것도 이 산의 이름에 근거한
것이다.
서까래같이 굵은 뱀 한 마리가 살았다는 석가산(石假山)이 멀리 아련히 바라다보이는 서북쪽 기슭에는
마을사람들이 '약천(藥泉)'이라 부르는 약수터가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고 바르면 피부병이 낫는다 해서 많은
부스럼장이들이 들끓었다.
정주의 동쪽으로는 달천(撻川)이 흘렀는데, 이 강은 구성(龜城)의 인산에서 발원해 남으로 흘러 봉명산
물줄기와 합류, 방호고개 밑을 꺾어 흐르다가 이윽고 정주 앞바다로 들어간다.
그 바다에는 고려적에 몽고군에게 쫓긴 김방경 장군이 피난해 숨었다는 위도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정양동 염전이 저녁 햇살 속에 가물가물 보였다.
정주역 앞에는 운해유기점이란 물상 객주가 있었는데, 납청장에서 만들어진 반짝반짝 윤이 나는 유기들은
대개 이곳을 한번쯤 거쳐가게 마련이었고 곽산, 노하, 선천, 동림 등지의 이른바 '예수쟁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사러 온 사람들로 항상 붐비었다. 정주는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의 영향으로 기독교 세력이 강했던
지역이었다.
이곳 갈산면 익성동에서 시인 백석은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이 지역의 기독교적인 분위기와는 무관했던
것 같다. 백석은 전형적인 산골 출생으로서 그의 어머니는 몸이 허약한 아들의 수명 장수를 기원하려고
강, 바위, 스무나무 따위에 비난수하는 치성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백석은 어린 시절 온통 전통적인 무속 샤머니즘의 환경에 두러싸여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는 소시적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어린 백석은 이곳에서 '호박떼기'(말타기와 비슷한 유희), '제비손이구손이'(다리를 서로 끼워넣어서 노는유희)
'를 하며 자랐다.
정주 출생인 국어학자 이기문(李基文)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제비손이구손이'를 할 때 "한알 때 두알 때
상사네 네비오드득 뽀드득 제비손이 구손이 종제비 빠 땅!"하면서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열을 헤아렸다고 한다.
백석 시집 『사슴』에서 우리는 이 지방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시 「정주성(定州城)」의 '헐리다 남은 성문' 잠자리 조을던 성터'는 고구려 때에 말갈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고주(古州)의 장성과 그 옛터를 가리킨다.
이 성은 정주군 아이포(阿耳浦)면에서 시작하여 강계군 설한령까지 약 170리에 이른다.
정주성문이 있던 곳은 당시 정주군 정주면 성외동과 성내동 부근이다. 시 「성외(城外)」는 바로 고주 장성의
바깥쪽 마을이다.
시 「흰 밤」에서의 '옛성'도 바로 이곳 부근을 묘사한 것이다.
시 「여우난골족(族)」에 나오는 '예수쟁이 마을'은 정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어느 기독교인 성황지였을
것이고, '먼섬'은 정주 앞바다의 위도나 왜도쪽이었을 것이다.
시 「가즈랑집」에 나오는 무당 노파는 북방 관서지방의 어느 세습무였다.
이런 무격(巫覡) 행위와 관련된 의식이 나타나는 작품으로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한다는 「삼방(三防)」
어디선가 서러웁게 목탁을 두드리는 무당집이 있었다는 「미명계(未明界)」,
바난수하는 모습이 있는 「오금덩이라는 곳」,
냅일눈을 받는다는 귀신 이야기와 치성드리는 의식이 들어 있는 「고야(古夜)」, 역시 애기무당이
등장하는 「산지(山地)」, 무당의 딸이 등장하는 「오리」, '수무남ㄱ'과 '국수당고개'가 등장하는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이 시에는 백석의 출생과 관련된 태몽 이야기가 있다),
작품 전체가 온통 무속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등이 있다.
시 「추일산조」와 「절간의 소 이야기」에 나오는 사찰은 아마도 정주 봉명사의 상원암, 수도암이었거나,
지장사의 석천암, 백미산 기슭의 오용암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시 「여승」에서 말하는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더판"은 정주 금광을 끼고 형성된 광산촌이었거나
선천지방의 한 사금 채취장이었을 것이다. 시 「광원」에서의 "멀리 바다가 뵈이는 가정거장도 없는 벌판"은
아마도 고읍→정주→곽산→노하 이 철도 구간의 어느 한 지점일 것이다.
시 「동뇨부」에는 유아으 소변으로 세수함으로써 피부의 퍼런 반점이 치료된다는 정주지방 특유의 민간요법이
소개된다.
그밖에「미명계」,「성외」,「주막」등의 시는 목재, 유기, 소, 쌀, 대두, 소금 따위의 집산지였던 정주지방의
상공업적 화기를 말해주고 있다. 이런 고장의 배경에서 백석은 소년시절 오산학교를 다녔다. 그는 재학중에 처음으로
서울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기억을 한참 뒤에 《조광》지의 설문란에다 쓴 적이 있다.
맨 처음 서울 올 때의 차림새를 묻는 물음에 그는 "검은 고꾸라 중학생복을 입고 왔다"고 했으며, 그때 서울의
첫인상은 "건건쩝쩔한 내음새나고 저녁때 같이 서글픈 거리"라고 말했다.
백석의 아버지 용삼(龍三)씨는 사진을 매우 잘 찍고, 사진기술이 뛰어나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으로 부임하였는데,
백석은 부친의 권유로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에 합격하여 일본 유학길을 떠난다.
나중에 의사로서 문필가가 되었던 백석의 친구 정근양도 이때 백석과 함께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씨의 장학금을 방아
일본으로 갔는데, 정은 의과대학을 지망했고 백석은 아오야마(靑山)학원 영문과에 들어갔다.
그는 1934년 귀국하여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정식 입사한다.
이때 그의 부모는 이미 서울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발간하던 계열 잡지인 《여성》지의
편집일을 맡아보면서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때 그는 벌써 자신의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한 유년시절의 애틋한 추억들을 독자적인 호흡과 시 형태에 담아 여러
편의 작품을 써가고 있었다. 이듬해 정월에 이러한 그의 작업들은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문단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사슴』이었다.
이 시집이 발간되자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에 재직하고
있던 시인 김기림은 곧 조선일보의 신간 소개란에다 「'사슴'을 안고」란 제목의 멋진 글을 써주었다.
1987년말 『백석시전집』이 창작사에서 나온 직후 시인 우두(雨杜) 김광균(金光均)은 필자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면서 그때의 감회를 적었다.
백석 시집 『사슴』의 초판은 한지로 찍어, 하드카바 역시 한지, 케이스 역시 한지였습니다.
오장환군은 장정을 매우 중요히 생각하던 친구인데, 백석 시집 앞에서는 모자를 벗는다고 함께 좋아하던 생각이
나고 …… 백석 시집이 나온 다음해인지 분명치 않사온데, 황혼에 광화문 네거리를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지나가는
미목수려(眉目秀麗)한 시인을 먼 것으로 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시집을 내던 해인 1936년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가 되어
옮겨갔다. 이때 그보다 일년 먼저 영생학원에 가서 자리를 잡고 있던 평론가 백철의 천거가 있었던 것 같다.
다음은 백석과 함흥에서 만난 이후 3년 동안을 함께 살았던 子夜(자야) 여사의 회고이다.
2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의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의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영생학교는 반룡산 밑에 있었고, 그의 하숙은 학교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함흥 근교의 중리(中里)라는 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함흥의 히라다백화점에 볼일이 있어서 갔었던 것이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뜨끔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늦은
밤이면 반드시 내 하숙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때 하숙집 부근 길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곳 진열대에는 젊고 예쁜 여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앞에만 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마치 '당신 밖에 아무 여자도 나는 싫소'라는 뜻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 『당시(唐詩)선집』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물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는 중국 동진의 한 여인 '자야'라는 이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의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長安一片月 / 萬戶 衣聲 / 秋風吹不盡 / 總是玉關情 / 何日平胡虜
/ 良人罷遠征"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37년 늦가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 《여성》잡지 한 권을 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왔다.
그는 책을 뒤적뒤적하더니 한 곳을 펼쳐 코밑에 쑥 들이밀었다. 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바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작품의 아래쪽에는 한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빈 백사장에서 우두커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가 문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 당신이 이야기를 귾는 것만 같구려" 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대뜸 말꼬투리를 잡아 "내가 끊긴 무얼 끊어요?" 했더니
그는 "밤낮 날더러 장가들라고 했잖았소!" "당신 머리 속에서는 지금도 나를 떠나라 하고 있지?"
"왜 내 말이 잘못되었소?"라며 연거푸 정색을 하고 빠른 말로 말했다. 사실 나로서도 그런 말 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나는 그에게 장가들기를 권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백석의 어머니는 그때 쉰이 넘어서 손자 없는 것을 늘 허전하게 여겼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백석은 서울 그의 부모 슬하에 가서 여러 날 있다 오게 되었다.
불과 며칠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흥으로 줄곧 편지를 써 보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배달되어 오는 것처럼.
편지글은 다정다감한 문체였으며
'오늘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소……'라는 식의 하루의 일과를 모두 깨알같이 써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에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강잉히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되어 편지를 못
보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그는 평소 부모의 말씀을 퍽 두렵게 여기는 듯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가 새악시 선을 보라 하면, 그는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성품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흥, 그대가 총각이라지 ……
야,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래, 내가 피해줄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 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의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의 얼굴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간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의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 왔다. 부리나케 그의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해의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그해 초여름, 서울에서는 전선(全鮮)고교대항축구대회가 열렸는데,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나타났다. 약 한 주일 가량의 출장인 것 같았는데, 그는 오던 첫날만 학생들을 연습장에 데려다주고는
줄곧 나의 청진동 집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내가 "학교 아이들은 안 돌보고 왜 자꾸 여기만 계셔요?"라고 재촉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녔다.
이들 중 몇몇이 서울의 학생지도 합동단속교사에 적발되었고, 교사는 학생들을 힐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 학생이야?" "함흥 영생고보입니다." "서울은 무슨일로 왔지?"
"축구시합에 출전하러 왔습니다" "인솔교사는 어디 갔어?"
"몰라요, 저희들두 오던 날 운동장에서 한 번 뵌 후론 다시 못 만난걸요." 일이 이렇게 되자,
함흥 영생학교는 온통 벌집 쑤신 듯하였고, 특히 고참교사들의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당시 영생학원 이사장으로 있던 이모씨는 평소 학교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던 백석을 퍽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다른 교사들 보기에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라 해서, 같은 영생학원 계열의 여학교로 전보 발령을
시켰다.
그 난감한 경황을 무릅쓰고, 백석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 영생 여고보에서 한 학기인가를 근무했다.
방학 때 다시 서울에 왔었는데, 그때 이미 함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그는 사표를 써서 우편으로 부쳤다.
그런 며칠 뒤에 조선일보 출판부 옛 직장에서 나와달라는 연락이 왔고,
이로부터 백석의 서울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함흥 영생학교 시절 아동문학가 강소천과 목사 김관석이 백석에게 영어를 배웠다.
지난날 함흥에서 거주한 적이 있는 시인 이기형은 그 무렵 백석이 '함흥 최고의 멋쟁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백석은 한 평범한 교사에 불과했지만, 이미 시집『사슴』을 내어 문학적 명성이 높았던 터라, 그는 함흥의
문학지망생들의 시뿐만 아니라, 습작소설까지도 자상하고 꼼꼼하게 지도해주었다고 한다.
3
백석가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시절은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의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우리 둘은 참으로 행복하였다.
워낙 서로 만족하였고, 아무런 빈틈이 없었으며, 오직 서로에게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밖의 아무런 것에도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늘 나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어떤 일에도 절대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불편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단정한 젠틀맨이었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비록 밖에서 화난 일이 있었어도 혼자 가만히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언제 화를 내고
있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었고, 어떤 경우에도 남의 결점을 화제로 떠올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그의 성격을 까다로운 편이라고 할까.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조차 누구에세 신세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때 청진동 집에는 늘
와서 부엌일을 보고 잔심부름도 해주는 찬모가 있었는데, 나는 그가
찬모에게 무엇을 시키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처럼 말수가 적던 백석도 일단 시에 관한 화제로 옮겨지면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요절한 일본작가 아꾸다까와(芥川龍之介)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또 다른 일본 문인들의 이야기도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내가 문학을 모르니 다만 웃기만 하고 들을 뿐,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무렵 《삼천리(三千里)》지에 두어 편으 수필을 필명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 부근에서 과일 파는 상인들의 밤 풍경을 쓴 것인데, 나의 글이 실린 책이 나오던
그날은 하루종일 함박눈이 펑펑 왔다.) 일본의 문인들을 화제로 떠올리긴 했지만, 그는 일본말 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일찍이 일본 유학도 다녀왔으니 일본말도 잘했을 것이나, 그는
일본말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바꿔 쓸 수 있는 우리말을 애써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담화 때는 주로 표준말을 썻지만, 그의 억양은 짙은 평안도 말씨였다.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그는 야릇한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강하게 쓰는 습관이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천정을
'턴정' 정거장을 '덩거장', 정주를 '덩주', 질겁을 '디겁',
아랫목을 구태여 '아르궅' 따위로 쓰는 식이었다. 그의 식사 공궤(供饋)는 매우 수월한 편이었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들었지만, 육류보다는 나물반찬을 비교적 더 좋아했다.
한번은 함께 시내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푸줏간
앞을 지나는데, 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하고 말했다.
정말 그는 푸줏간을 제일 질색했다. 함께 살면서
보니 그에겐 이처럼 드러나보이는 이상한 습관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집 안방의 창문을 여닫을 때도 그는 잠금쇠 만지기를 피하여 손이 잘
닿지 않는 창문틀의 위쪽이나 아래쪽을 겨우 밀어서 여닫곤 했다. 한번은
함께 전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길이었다.
전차가 길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그때까지 머리 위의
손잡이를 불결하다며 아무것도 잡지 않고 그냥 서 있던 그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창유리에 갖다대면서 몸의 중심을 유지했다.
또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와 악수하고 난 뒤에는 곧 그가 눈치채지 않게 수도간으로 나와 꼭 비누로 손을 씻곤 했다.
보다 못한 내가 몇 차례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수건을 달랄 때 일부러 안 주곤 했더니, 그 뒤 그 습관만큼은 조금
고쳐진 것 같았다.
그는 각별히 즐기는 취미나 오락은
없었다. 술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음가(鯨飮家)는 아니었고 오히려
애주형에 가까웠다. 책으로는 모리악의 『예수전』, 중국작가 변윤(邊潤)의 『요불이전(了不以前)』을 즐겨
보았으며, 심심할 때면 잡지 《문에춘추》를 보거나 일본시집을 뒤적거릴 정도였다.
그의 목소리는 참 다정스럽고 부드러웠으며, 청으로서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내가 아는 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집에 빅터상표의 고급 유성기가 하나 있었지만 한번도 거기에 손대는 걸 못 보았고,
가요·창극 같은 데도 무관심했다.
그 무렵《조광》지가 요청해온 설문란에다 그가 자신의 취미를 '西道唱(서도창)'과 '타이프라이팅'이라 쓴 것을
보았는데, 이 '서도창'이 직접 부르는 걸 말하는 것인지 소리꾼의 노래를 듣는 걸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다만 말없이 묵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러다가는 잡지보고, 시집보고……
하였을 뿐이다. 그의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무렵 청진동으로 그에게 부쳐져오던 편지의
겉봉에는 '백기연(白基衍)'으로 씌어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가 몹시 기뻐하던 모습을 꼭 한번 본 적이 있다.
언젠가 내가 시내 본정(명동의 일제 때 이름) 부근엘 나갔다가 상점의 쇼윈도에서 넥타이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얼핏 그것이 백석에게 매우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사와서 드렸더니 그의 얼굴 표정에는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튿날 그는 내가 사온 넥타이를 매고 출근 했는데, 저녁때 와서는, "여보, 오늘 ××를만났는데, 이 넥타이 참
좋데" 라고 했다.
그는 그 뒤 여러 날 동안 줄곧 그 넥타이만 매었고, 퇴근 후에는 예의 그 말을 꼭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제 그 소리 오늘 또 하네. 어쩌면 그게 그렇게도 좋을까' 했지만, 내심 그말이 듣기에 즐거웠다.
이 넥타이 이야기는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시에서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4
백석은 사람을 만나 그가 먼저 주도해서 교제를 이끌어간다거나, 누구를 새로 사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 백석이나 그의 시에 홀딱 반해버린 사람이 아주 그에게 제 스스로 엎어져오기 전에는 도무지 사교의 능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얼른 보기에 무심한 편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
러한 중에서도 함대훈, 허준, 정근양, 그리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조○○는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도쿄 외국어학교 노어과를 나온 일보(一步) 함대훈은 황해도 풍천 출생의 노문학자로서 소설도 몇 편 썼다.
그는 조선일보 출판부 주임으로 있었으며, 편집국장을 지낸 함상훈과는 형제지간이었는데,괄괄한 성격에다 대단한
호주(豪酒)였다. 당시 그는 청운동에 살았는데, 우리의 청진동 집에 가장 자주 놀러왔던 백석의 친구였다.
나중에는 그가 아무때건 불쏙 찾아오는 것이 너무 싫어서, 내가 백석에게 "함대훈 씨가 싫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당신이 좋다고 하던걸" 하면서 꼭 친구와 나를 함께 두둔하곤 했다.
그래도 줄곧 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함씨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에요?"하면 "아냐, 그는 정말 당신이 좋대"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함대훈은 그때 무슨 잡지를 만들던 최남주라는 이의 여동생 최옥희와 열애에 빠져 있었다.
평안도 용천 출신의 소설가 허준은 1935년 10월 조선일보에 시 「모체(母體)」를 발표하면서 백석과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나왔는데, 이듬해 《조광》지에 「탁류」란 단편소설을 쓴 후 아주 소설 쪽으로 돌아섰다.
백석과는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서로의 심지(心志)가 꽤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는 낙원동에 살면서 자주
왔었는데, 매우 큰 체격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며, 술을 좋아했다.
백석이 허씨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시까지 쓴 걸 보면, 그와 남다른 우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사로서 문필생활을 겸하던 정근양, 그는 앞서도 말한 바처럼 백석과 조선일보 장학생 동기였고 청진동 집에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났을 때, 정도 서울을 떠나 북지(北支)산서성 임분현 이라는 곳에
가서 병원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한 사람의 친구는 서울의 어느 중학 영어선생을 하던 조○○였다. 그는 우리집에서 놀다 밤이 늦어 돌아갈 때면,
그때마다 우리를 앞에세워놓고 "그대들 둘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인고……" 하면서 부러운 듯 말했다.
사실 백석과 나는 서로 다른 기질 때문에 오히려 잘 맞았는지 모른다.
한쪽이 뾰족한 성품이면 다른 한쪽은 좀 둥글둥글한 것이 인간관계의 조화가 아닐까.
그밖에 백석과 평소 가까이 지냈던 이드은 문학평론가 백철이 있다.
그는 백석보다 네 살 위였지만 동향선배로서 친밀하게 지냈고, 함흥 영생학원에도 한때 같이 있었다.
1935년 시집『사슴』이
나온 직후, 서울 태서관에서 가진 출판기념회 발기인 명단의 이름들은
몇몇을 빼곤 대부분 백석과 조선일보에 함께 몸을 담고 있던 문인, 화가들이었다.
또 그들은 대개 백석의 시를 남달리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안석영(安夕影)은 서울 토박이로 본명이 석주(碩柱)였다. 일찍이 1921년 나도향(羅稻香)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환희』의 삽화를 그렸던 그는 한국 삽화계의 선구자이다.
30년대 중반 안씨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는데, 워낙 잘생긴 얼굴에 다재다능하여, 나중에는 언론계를 떠나
전적으로 영화에만 몰두하였다. 백석보다는 11년 위였는데, 서로 각별히 따르고 위하였다.
김규택(金圭澤)은 웅초(熊超)란 호를 가졌던 분으로,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나와 역시 조선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던 화가였다.
일본 호세이대학 불문과를 나온 여천(黎泉) 이원조(李源朝)는 경북 안동사람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아우였는데,
그때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
언제나 한복차림이던 그는 늘 자신이 양반고장 사람임을 자랑삼아 말했고, 그것을 날마다 들어온 사람들은
"여보, 그 양반타령좀 작작허우"하며 싫은 소리를 하였다.
깔깔한 샌님 같던 그도 일단 술이 취하면 주사(酒邪)가 대단해서 모두들 슬금슬금 뺑소니치는 모습이었다.
함경도 출신의 시인 편석천(片石村) 김기림은 백석보다 4년 위였는데, 그도 일찍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
『사슴』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즉시 서평을 써줄 정도로 그는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
정현웅은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작품「여인상」이 특선으로 뽑힌 서양화가로서 당시 백석과 함께 《여성》지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잡지의 삽화로 백석의 프로필을 그리면서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스케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느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얼굴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삽화의 말을 썼다.
한편 백석이 평소에 문학적 재능을 자주 칭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동문학가 강소천이다.
용률(龍律)로 함남 고원 태생인 그는 백석보다 불과 3년 밑이었으나, 만학으로서 백석에게 직접 문학을 배운 제자다.
1939년 서울 명동입구 미도파 건너편에 '제일다방'이라고 있었다.
이 다방은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에 있던 일본인 기자 기쿠지(菊池) 아내가 경영하던 곳으로, 이른바 재경(在京)문인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언제 어느때건 가보면 낯익은 문인 몇몇은 꼭 눈에 띄었다. 공
작새의 꼬리깃으로 장식한 세련된 실내장식에다, 이름있는 유화도 여러점 운치있게 걸려 있는 꽤 분위기 있는
다방이었다.
한번은 그곳으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가보니 백석은 함대훈, 백철 등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정쩡하게 합석이 되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양인은 번갈아가며 나의 얼굴이 예쁘다드니
어떻다느니라는 말을 자꾸 거듭하여 면전에서 몹시 난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백석은 혼자 웃고만 있었다.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난 후에 길에서 허준, 정근양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도 "김(金)은 어째 갈수록 예뻐져?"
"백석이 장가를 두 번씩이나 들고도 곧장 도망나온 까닭을 인제야 알겠구먼."이라고 큰소리로 떠들어
그때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 적이 있다.
1939년 유월 어느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석은 그날 충청도 진천으로 한 주일 가량 출장을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여자의 육감으로 그가
먼젓번처럼 필시 장가들러 가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약속한 한 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번에도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틀림없이 돌아오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달갑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차디찬 성질, 그리고 나를 향한 열정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청진동 집에서 조선일보까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는 찾아가기는커녕 전화 한 번조차
걸지 않았다.
점차 매섭게 타오르는 내 가슴속의 독(毒)과, 또한 나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나의 성격을 백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또 몹시 초조하게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없는 빈방에 혼자 남아서 무척 공허한 심정이 들었고, 내 가슴 속의 공허감은 차츰 매몰찬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매몰찬 복수라는 게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기껏해야 연전에 내가 몰래 함흥을 빠져나오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서 한동안 멀리 떠나 있고자 했던 것뿐이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채로……
웬만한 살림을 대충 챙겨서 나는 명륜동 언덕으로 숨어버렸다.
지금의 성대 뒤쪽이었는데, 1930녀대 후반 그곳 부근의 앵두나무, 능금나무, 배나무 따위를 심어놓은 과수원이
많았고, 주택들도 드문드문 서 있는 변두리에 불과했다.
지난달 부통령을 지냈던 장면(張勉)씨의 집이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어느 석양 무렵이었는데,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누가 "자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내가 잠적한 이곳을 모를텐데……(그가 어떻게 나의 거처를 찾아내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불가사의로 생각한다.) '자야'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백석뿐일텐데……
부르는 소리는 두 번 세 번 거듭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어찌 되었건 나가놓고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황급히 나갔더니,
그가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척 독이 나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다시금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좋아서 마음이
시루리 풀리듯 스르르 풀려 버렸다. 그러나 나는 백석의 부모가 못내 원망스러워졌고, 또 예의 그 독한 마음은
불쑥불쑥 치밀었다.
그는 본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족두리를 풀어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집을 나온 것이다.
내가 알기로 백석이 사모관대하고 장가를 든 것은 두 번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마다하고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1939년 동지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국의 북경, 소주(蘇州),항주(杭州) 상해 등지를 거쳐 한 달 만에야
돌아왔다. 떠날 때 나의 행선을 백석에게 알리지 않았다. 다녀와서도 나는 그에게 여행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 또한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알리지도 않고 중국을 다녀온 처사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앵돌아진 속으로 '당신께선 지금 저 때문에 화나시게 해서 송구스럽지만, 당신도 제가 겪은
고통을 한번쯤 겪어보셔야 해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그저 묵묵해지기만 했고, 서로의 일과를 화제로 떠올리지도 않았으며, 이런 우리들 사이는
심상찮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하루는 그가 보낸 메신저가 왔다.
왕십리역 대합실 구내다방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때의 왕십리란 보잘것없는 초가와 들판뿐인 아주 시골이었는데,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왕십리까지 가서
내리면 사방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그 변두리 먼곳까지 나오라 했던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대뜸 자기와 함께
만주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러한 권유는 함흥시절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라 조금도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의 표정은 너무도 심각한 듯 여겨져서, 나는 적지 않이 당황하였다.
나는 그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그는 만주 신경(新京)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에게 단 한마디의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5
돌이켜보면 그의 만주행은 함흥에서부터 계획해오던 것이었고, 또 그가 재차 서울로 와서 옛 직장을 다시 나가고
한 해를 머무른 것도 결국은 나 때문에, 내가 마음에 걸려서였던 것 같다.
나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 함흥에서 만주로 곧장 떠나갔으리라. 그가 만주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깊은
속뜻을 내 얕은 여자의 소견으로 어찌 감히 짐작인들 했으랴만……
그는 내가 자기 권유대로 쉽게 만주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이런 대목을 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 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만주 신경시절 백석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작가 송지영(宋志英)씨의 술회로는
백석이 그때만큼은 고향의 부모에게 매달 약간의 송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 무렵 항상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송씨가 "그 옷, 서울의 김이 보냈구려"하고 농을 걸면, 백석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이후 백석은 실직상태가 되어서 만주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었던가보다.
그가 이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었다는 생각을 하면 온통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 시절 만주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나는 필시 나의 모습으로 짐작되는 부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있다.
깊은 밤에 그의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이 시에서 그의 맑고 고결한 정신은 이미 세속을 훨씬 떠나 있는 듯하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흡사 그가 눈앞에 당장 되살아온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말 속에는 평소의 그의 성품, 현실에 임하던 그의 모습 같은 것이 그대로 생생하게 스며 있다.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것도 헤아려보면 모두가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끓듯 끓어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뒤의 텅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나온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나는 그의 전집을 내 손으로 엮어보려고 틈날때마다 흑석동 살던 백철 씨와 의논해왔었다.
그 무렵, 백철은 어느 신문칼럼에서 시인 백석을 일컬어 "한국시사에서 소월 다음가는 귀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후 병을 얻어 나의 포부를 도와주지도 못하게 타계해버렸다.
이미 그의 전집이 세상에 나왔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6
이제 이 글도 끝마무리에 이르렀고,
필자는 '자야' 여사가 살아온 삶에 관한 짤막한 여담을 언급할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1916년 병진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나이 열일곱에 여창명인 김수정의 안내를 받아,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을 지낸 금하 하규일 선생의
넷째 양녀로 들어가, 이후 3년간 그 문하에서 가무를 배웠다.
국악사로서 진안군수까지 지냈던 하 선생은 일찍이 가곡의 천재 박효관에게 사사(師事)받아 일가를 이룬,
구한말 남창명인으로 그때 이미 일흔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다.
그녀는 하 선생으로부터 여창가곡에 남보다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아
수창(首唱, 여창가곡을 부를 때 첫곡을 혼자 부르는 것을 말함. 두 번째 곡을 혼자 부르는 것을 亞唱이라 했다.)
을 불렀고,
춤에도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舞山香)' '검무(劍舞)'따위의 정재(呈才)는 물론, 특히 '춘앵전'(春鶯전,
궁중의 마당에 화문석을 깔고, 한 사람의 무기(舞妓)가 그 위에서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에 맞추어 돗자리 밖으로
나가지 않고 추는 매우 아름다운 독무의 이름)은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하규일 선생은 늘 그녀에게 "명창은 열이 나는데 명무(名舞)는 하나가 어려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수업 후 오래 국악을 중단하였다가 20여 년이 흐른 뒤인 마흔에 이르러 비로소 가곡의 진의를 깨달아
김수정과 더불어 몇 년간 여창을 불렀다.
그후 김수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난향과 수년간 여창을 불러
근 10년 이상 여창가곡에 대한 공부를 다시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가곡은 남창과 여창으로 부르는 성악곡으로서, 고려적 '진작(眞勺)에서 유래된 노래인데
조선시대를 거쳐 대원군 집정기에 이르러 현재의 26곡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현행 가곡은 우조(羽調) 11곡, 계면조(界面調) 13곡, 반우반계면조(半羽半界面調) 2곡인데 대금, 세피리, 해금,
단소, 양금, 가야금, 거문고, 장구의 세악 편성으로 반주한다.
지금도 자야 여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현듯 슬픔이나 한 같은 것이 솟구칠 때,
한국 정악 중에서 '여창계면 편수대엽(編數大葉) 모시편'을 그윽히 짚어간다.
옛 엄정한 법도 그대로 한 무릎을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아 두 손을 그 위에 포개어 얹는다.
고개는 다소곳, 눈을 반쯤 내리떠서 한 지점에다 꽂은 듯이 멈추어놓고, 맑고도 고요한 음색으로 가곡을 불러간다.
외로운 한 마리 학은 창공에 올라 끼룩끼룩 울고, 장구소리는 슬픔과 한데 어우러져 저절로 반주가 된다.
"떵 더러러쿵 딱 기덕 쿵더떵 더러러 쿵 더!"
모시를 이리저리 삼아 두루 삼아 감삼다가 가다가 한가운데 똑 끊쳐지옵거든, 호치단순으로 홈빨며 감빨아
섬섬옥수로 두끝 마조 잡아 배뷔쳐 이으리라 저 모시를 우리도 사랑 끊쳐갈 제 저 모시같이 이으리라
이제는 모든 것이 저 흘러가버린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자야 여사의 가슴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인 백석을 생각하는 저 깊은 한도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는다.
그러나 한 인간에게 있어서 지난 시절의 추억을 다시금
돌이켜 되새기는 일이란 얼마나 가슴 쓰리고도 아름다운 일인가.
필자는 여사의 댁을 나오며, 문득 그녀의 안방 벽 액자 속에 박제되어 들어 있던 한
마리 청람색 나비의 고운 나래를 떠올렸다. 무수히 많은, 그리고 자그마한 나비들에 의해 둘러싸인 그 커다란
나비는 맑은 유리판 밑에서 파아란 나래를 활짝 펴고 곧 창공을 날아갈 듯 파닥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지금 유리액자 속에 갇혀 있는 걸 어찌하리.
이루지 못한 꿈만 팔랑팔랑 날아올라, 저 들판 등성이 너머로 건너간다.
지금 생사조차 알 길 없는 그의 님을 찾아서……
이동순 편 『백석 시전집』(창작과비평사,1987)이 발간된 직후 1930년대의 후반 3년간을 백석과 함께 지낸바
있는 자야 여사가 출판사측에 연락을 해왔다.
이 글은 이동순 시인이...
자야 여사를 세 차례 방문하고 나서 그의 구술을 토대로 하여 쓴 백석에 관한 회고담이다.
백석의 꾸밈없는 인간적 품성과 자상하고 섬세한 마음씨, 30년대 문우들과의 교우기 등과 함께 반백년을
넘어서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야 여사의 백석에 대한 끊이지 않는 그리움이 담긴 글이다.ㅁ
자자, 그럭하구 심심한데..아래로 마무리..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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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옛노래지만 심심한데 풀어 보셔유..
백석의 시도 감상하시고..ㅎㅎ
17번 문항의 정답은 기실 3번이랍니다.
수 많은 학생이 5번을 정답으로 하는 바람에 복수정답으로 인정하고 말았답니다.
님들은 몇번을 정답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울 학교의 모 학생은 복수 정답으로 인정되는 바람에 모 지방의대 데드라인 2등급이 되어 합격하는 행운도 얻었습니다.
어떤 녀석은 국가고사에 정답 둘은 없다.
3,5번이 같은 내용의 답지다.
고로 정답은 다른 것이라 보고 4번을 찍었다네요..
정말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지만 상당히 억울한
일입니다.
'미필적고의'아시잖아요
고의와 과실의 차이는 엄청난다 아닙니까...ㅋ
우리는 백석을 몰랐지요.
그는 재북작가였으니 가장 위대한 시인 한 분을 그냥 지나칠뻔 했지요.
그의 시가 해금되자, 이젠 고딩 교과서에도 실려있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