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외교관의 독도 이야기-부록
‘于山․武陵 1島說’ 및 古地圖 上의 相互位置 混亂
“우산도나 삼봉도는 독도”라는 대한민국의 입장은 몇 가지 중대한
의문을 남긴다. 물론 이러한 의문점은 일본으로 하여금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며, 한국은 역사적으로 독도를 인지하지도 못하였다”는
주장을 펼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어떤 의문인가?
첫째, “우산도나 삼봉도는 당연히 독도”라는 공식을 벗어나 냉정하게
역사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히려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고, 독도로 상정할 수 있는 부분은 오히려 드문
편이다. 예를 들어, “삼봉도에 86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는
울릉도일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둘째, 기록상 ‘우산․울릉(또는 무릉)’이라 하여 ‘우산’을 더 중시하였다.
본문은 주로 ‘울릉’(무릉)에 대한 기술이면서 ‘우산’을 앞세우는 것이
이상하다. 현대사를 기록하면서 ‘울릉도. 독도’라고 하지 않고
‘독도. 울릉도’라고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독도문제가
부각되지도 않은 시대에 ‘독도. 울릉도’라고 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기까지 하다. ‘무릉’이 ‘울릉’과 일치한다는 것은 본문의
기록으로 보아 명백하므로 두 섬의 명칭이 뒤바뀐 것은 분명 아니다.
셋째, 고지도에 우산도는 울릉도와 본토의 ‘사이에’ 나타난다.
이러한 지도에는 공통적으로 규모조차 울릉도에 대비해 대개 1/2에
이르는 매우 과장된 크기로 나타나며, 실제의 독도(울릉도의 1/400)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주 작게 그린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넷째, 독도의 영유권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기록의 하나로 보고
있는 ‘세종실록 지리지’ 조차 “일설에 우산. 울릉 1도”라고 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선조의 기록을 우리에게 불리하게 느껴진다고 하여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 더우기 세종 시대는 조선왕조에서 학문 수준이
정점에 이른 시기이기 때문에 기록자의 자질이나 소신이 다른 시대보다
오히려 앞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년 후에 집필된 ‘고려사 지리지’에서 ‘일설’ 부분이 본문으로 부상된
것은 실록의 기록이 다른 학자에 의해 공감을 얻었다고 보아야 한다.
혹시 일본의 주장대로 울릉도 하나를 두고 ‘울릉(무릉)’이라고도 하고
‘우산’이라고도 한 것이 두 개의 섬인 것으로 나타난 것이고,
독도의 존재는 아직 몰랐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고
하여서 의문이 해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한국과 일본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편파적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과정에서 서로가 객관적 진실을 찾기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필자는 이러한 문제점이 개별적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종합적인 설명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결국 아래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우선, 역사기록에 ‘우산도’가 명백히 ‘울릉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또 ‘독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으므로 ‘우산도=독도’ 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
즉, 기록의 기초자료(특히 지방보고 여부) 및 시대에 따라 ‘우산도’를
일단 ‘울릉도’로 보고 ‘제 2의 섬’인 것이 명백할 때에는 ‘독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울릉도 바로 옆에 붙어 있고 흔히
울릉도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는 ‘竹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독도는 한국영토”라는 우리 입장에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여 역사기록상의 ‘우산도’는 모두 ‘독도’라고 우기거나,
반대로 “우산도는 절대로 독도가 아니라야 한다(일본측 입장)”는
전제 하에 역사기록을 해석하려 들면 어느 누구도 ‘우산도’의 진정한
정체를 일관성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 그리고 섬이 많은 서해나 남해에
있는 ‘돌섬’ 이라면 단 한 번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독도’에 대해서만은 유난히 ‘많은’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는 것은 자승자박일 뿐이다. 옛 사람이 생각한
‘보잘 것 없는’ 독도의 가치를 반영한 정도의 기록이 더욱 자연스럽다.
(첫째의문 해결)
그러면 명칭에 대한 이러한 혼란을 초래한 원인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일까? 필자가 추측하는 실제 상황은 아래와 같다.
우산국이 멸망한 후 우산국의 본 섬인 울릉도는 ‘우산도’ 또는
‘울릉도(무릉도)’ 등으로 불리웠고, 무인도인 독도는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일반명사에 가까운 ‘돌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현지방언으로는 ‘돍섬’일테고 ‘독섬’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지나
현지(울릉도나 강원도 지방)에서는 원래의 섬 이름인 ‘울릉도’가
압도적으로 통용되었고, ‘우산도’라는 이름은 주인 없는 이름으로
떠돌다가 차츰 이름 없는 섬인 ‘독도’를 가리키게 되었다.
같은 지역에 ‘이름 없는 섬’과 ‘주인(섬)을 잃은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현지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런 결합이었다. 물론 지방정부의
보고는 이러한 이름에 입각하였으므로 ‘울릉(무릉)’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었고, ‘우산’은 ‘울릉(무릉)’보다 훨씬 작은 섬 정도로만 알려졌고,
보고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국을 상대로 하며 개별지역에 대한
상세한 정보에는 밝지 못한 중앙정부의 기록자들은 ‘우산’의 명칭이
‘우산국’의 변두리 섬의 이름으로 전용된 것을 모르고서 당연히 옛
‘우산국’의 본 섬(主島)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더우기 과거의 역사기록상 ‘우산국의 무릉(울릉)도’라는 뜻으로의
《우산.무릉》이란 표현이 굳어져 있었는데, ‘우산’이 나라이름에서
섬의 이름으로 전용된 후에도 《우산.무릉》의 순으로 계속 기록되어
‘우산도’와 ‘무릉도’를 가리키게 되었다. 중앙정부가 ‘우산’이란 이름이
‘독도’를 위해 전용된 것을 인식하기에는 특별한 계기가 필요하였다.
(둘째의문 해결)
그런데 현지의 보고가 ‘울릉도’ 중심이고, ‘우산도’는 ‘울릉도’보다
더 작은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렇다면 ‘우산도’는 필연적으로
본토에서 더 가까운 섬” 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우산도’가 “본토에서
거리가 멀고 크기도 더 작은 섬이지만 더 중요한 섬”이라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릉(무릉)’은 본토에서 ‘우산’ 보다 멀리
떨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우산.울릉(무릉)’이라는 표기순서와도 일치하였다.
그리고 우산도가 작다고는 하나 옛 ‘우산국’의 본 섬(主島)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울릉(무릉)’에 비해 ‘약간’ 작을 뿐이지 결코
매우 작은 섬일 수는 없었다. 고지도에 우산도가 울릉도보다 본토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때는 항상 우산도가 울릉도에 비해 ‘약간’
작지만 결코 보잘 것 없는 정도로 나타나는 법은 없으며 심지어는
거의 대등한 크기로까지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7세기말, 安龍福 사건과 울릉도 영유권 분규를 계기로 중앙정부는
우산도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인식을 갖게 되고, 특히 우산도가
울릉도의 동쪽에 위치한다는 인식을 확실히 갖게 되었다.
그리고 ‘우산도’가 제 위치를 찾게 되면서 크기도 울릉도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매우 작은 섬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울릉도의 수 배의 크기로 확대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등 일시적으로 큰
혼란을 보여준다. 이는 ‘우산도’는 ‘우산국의 본 섬(主島)’ 이라는
고정관념이 불식되어 가지만 아직 이를 탈피하지 못한 사람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셋째의문 해결)
世宗實錄 地理志 本文은 “울진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우산. 무릉
두 개의 섬이 있어, 맑은 날이면 마주 보인다.”고 하면서도,
“일설에 의하면 우산도와 무릉도는 같은 섬”이라는 註를 달고 있다.
‘우산도’와 ‘무릉도’는 같은 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력한
의문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일본은 이를 두고 본문의 입장을 ‘2島說’, 註의 입장을 ‘1島說’ 이라고
부르면서 그 중 ‘1島說’을 취하고, 따라서 世宗實錄의 기록은 울릉도에
관한 것이고 ‘독도’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규모와 거리로 본 두 섬의 미묘한 상관관계상
일반적으로 ‘2島說’과 ‘1島說’이 공존한다고 하여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世宗實錄의 ‘一說’ 기록을 ‘1島說’로 해석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世宗實錄의 本文과 註의 기록이 양립하는 해석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이를 상호 모순되는 방법으로 해석한 후 그 중 하나를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1도설’은 실록의
기록을 넘어선 무모한 논리의 비약으로 판단된다.
필자는 실제 상황을 이렇게 본다.
세종실록의 기록자는 과거의 기록 및 지방정부의 보고에 입각하여
‘우산.울릉(무릉)의 두 섬’이라고 기록을 하면서도 그 내용을 수긍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관념 속의 본 섬(主島)인 ‘우산도’와 지방보고서
상의 본 섬인 ‘울릉(무릉)’은 동일한 섬으로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註를 달아 “일설에는, 우산도와 무릉도가 같은 섬”이라고 하였다.
주의할 것은, ‘우산도’와 ‘무릉도’는 같은 섬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냐고
의문을 품었을 뿐이지 “섬은 두 개이고 맑은 날 마주 보인다.”라는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것은 아니다.
‘우산’과 ‘무릉’을 같은 섬으로 보면서도 이를 본문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두 개의 섬이 있고 맑은 날 마주 보인다.”는 내용을 섬 이름보다 더
중시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산’과 ‘울릉(무릉)’을 동일한 섬으로
볼 경우, ‘제 2의 섬’의 이름을 익명으로 남겨둔 채 ‘두개의 섬’이라는
내용을 본문에 기록하기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결국 기초자료의 기록 중 섬의 이름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일단 이를 본문으로 삼아 “우산도와 울릉도는 두 개의 섬”이라고 기록을
옮기면서, “우산도와 울릉도라는 두 이름은 모두 본 섬(主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신의 의문을 ‘일설’이라는 표현을 빌어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다. 註의 ‘우산.무릉 1도설’과 본문의 “두 개의 섬이 있다”는
기록은 전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 기록에는 ‘우산도’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독도’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는데, ‘우산도’를
‘울릉도’로 인식하는 견해에 입각하면 “일설에 우산도와 무릉도는 같은 섬”
이라고 하는 것도 정확한 기록이 된다.
(넷째의문 해결)
이러한 상황을 사람에 비유하면 이렇다.
머리가 명석하기로 소문이 난 Solomon의 첫 아이 Willy는 아버지를 닮아
진작부터 ‘수재 Solomon II세’란 별명이 따라다녔으며 이러한 별명으로
신문에 기사가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크면서 웬지 ‘Solomon II세’라는 별명을 싫어하고 Willy 라는
이름만을 고집하여 ‘Solomon II세’ 라는 별명은 차츰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를 아쉬워하던 아버지는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아예 이름을 ‘Solomon II세’
라고 지어주었지만 특별한 재주없이 평범한 아이로 자랐다.
도회지에 살면서 여러 마을의 기록을 유지해오던 Mr. Schneider도 Solomon의
아들 ‘Solomon II 세’가 수재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Solomon 의 마을에서 보내온 ‘마을소식지’에 “Solomon의
두 아들인 수재 Willy와 Solomon II 세”라는 언급이 있었다.
내용은 주로 Willy에 대한 것이었으며, 동생에 관해서는 “두 형제간에 우애가
깊다”는 언급이 고작이었다. Mr. Schneider의 기억에는 ‘Solomon II 세’란
어릴 적부터 수재로 소문나 있던 Solomon 의 큰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한데
‘소식지’의 내용으로는 Willy가 큰 아들이고 수재라고 하였으니 ‘Willy’나
‘수재 Samson II 세’나 모두 큰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이름을 모르고서는 기록을 적절히 수정하여 기록하기가
곤란하였다. 잠시 고민한 후 나름대로 가장 적절한 기록방법을 찾아내었다.
“형제의 이야기를 쓰면서 동생의 이름이 없으면 이상하니 일단 ‘마을소식지’의
기사를 그대로 기록으로 옮기는 수 밖에 없다.
그대신 ‘Willy 와 Solomon II 세는 one person (같은 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고 註를 달아두기로 하자.”
세월이 지나 어떤 사람이 Mr. Schneider의 유품기록을 바탕으로
Solomon 형제의 이야기를 거꾸로 이렇게 적었다.
“Solomon에게는 수재인 아들이 있었는데 Solomon II세 라고도 하고
Willy 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일설에는 Solomon 에게 Solomon II세와
Willy 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도 한다.”
Solomon 이 죽은 후 여러 세대가 지나 마을의 토지 일부가 Solomon
소유로 드러났다. 이미 큰 아들도 죽고 난 뒤였으며 그 자손도 없었다.
유산을 탐낸 친척이 나타나 이렇게 주장하였다.
“Solomon 할아버지에게는 자식이 하나만 있었는데 죽고 후손도 없습니다.
그러니 유산은 내 몫입니다.“ 마을사람들이 “아니야. 분명히 Willy와
Solomon II세 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들었어. Mr. Schneider의
기록에도 형제라고 하였잖아” 라고 하자 그 친척은 이렇게 대꾸하였다.
“Mr. Schneider도 형제 이야기를 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註를 달아
‘일설에 아들은 한 사람(one person) 이라고 했잖아요. ‘한 아들‘이 이름과
별명을 따로 쓰니 ‘두 아들‘이라는 착각을 유발한 거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