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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因緣이 고이는 방
* 가난한 글쟁이, 그 얄미운 가벼움 본문
* 가난한 글쟁이, 그 얄미운 가벼움 Ⅰ 몇 날, 몇 달을 그리도 홍역을 치르고 생산한 글귀 몇 줄 오가는 장삼이사(張三李四) 중에 지 새끼 키워내듯 혼신을 다한 피땀인 걸 몇이나 알음으로 보아주랴만 그래도 목줄이 두려워 입 다문 월급쟁이 대신에 떠안은 나팔로 세상을 발아래 굽어보며 감놔라 배놔라 할 말은 하면서 사는 재미에 끼니도 없으면서 컬컬한 목, 헛기침으로 달래며 가갸거겨에나 목숨 올려놓는 가난하여 슬픈 백성의 이력이니 Ⅱ 닷새마다 서는 오일장 터에 파장(破場)이 시작된 늦은 오후 급한 볼일인양 찾아든 주막집, 가벼운 주머니를 감춘다 "어서 오세요, 빨리 주문하세요" "청주 두 병 주시오" "청주는 없고 막걸리뿐인데..." "왜 그 좋은 청주라는 이름 놔두고 꼭 막걸리라고 하시우? 대접 좀 해서 부릅시다" "안주는 무얼로..." "됐수" 누가 보아도 울화를 삭히기 위해 선 채로 들이키고 나갈 행색이지만 남는 게, 공상(空想)으로 허송하는 시간뿐인 위인임은 아무도 모르리..... Ⅲ 지난 장마에 자릴 잡은 곰팡이가 한겨울에도 향그러운 골방에서도 유일한 낙(樂)은 닷새마다 서는 오일장 터다 아예 점심 없는 빈 배에 두어 사발 들이키면, 장터 세상이 내게로 온다 손님을 부르는 목청이 꼭, 나를 위해 저리도 수고해주는 것 같아서 좋고 몇 천 원하는, 푸루죽죽한 슬리퍼 한 켤레를 사면서 깎아달라 흥정하는 것도 내 주머니 무게를 지켜주려는 것 같고 붕어빵 속 앙금을 조금씩만 넣고 닫는 뚜껑도 나를 위하여 덜컹, 빨리 닫히는 것 같아 좋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서 좋고 물건 파는 이들의 입도 귀에 걸려 있는 게 너무도 좋다 웃음과 반가움과 정들이 기약 없는 이별이어도 아픔 없는 이별이어서 좋다 좋은 것만 기분 좋은 영혼들이 너무도 넘쳐나서 좋고도 좋다 Ⅳ 시(詩)도 저 속에 더불어 살아있어 좋다 하얀, 사람냄새가 좋다 선하고 선한 빠알간 피가 도는 사람 냄새 의욕과 희망이 넘치는 냄새 한 푼을 놓고 해학을 흥정하는 냄새 밝은 내일을 가슴에 품은 냄새가 좋다 이제는 엄마의 치마끈을 붙잡고 다니는 아이는 없다 엄마를 가끔 부르며 방향 정도 확인하려나 목에 건 과학을 믿고 지멋대로 장터를 돌아다닌다 닭장 안의 닭을 건드리다 쪼이기도 하고 한 배에 나온 강아지의 눈을 건드리다가 기겁을 하기도 한다 과거와 현대가, 세대(世代)와 세대(世代)가 공존(共存)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Ⅴ 내가 만든 세상 같아서 좋고 나의 백성다워서 좋고 내 땅, 내 자리에서 공짜로 살아가게 베푼 것 같아 좋다 남의 입안에 든 걸 뺏는 정상모리배(政上謀利輩), 아귀(餓鬼)들이 없어서 좋다 무엇보다 사상이니, 이념이니, 장터 거덜내는 떼거지가 없어 좋다 아프게하는 게 없어 좋다 필요에 의해서 사고 필요에 응(應)해서 팔고 이 두가지의 규칙만 허물어지지 않으면 된다 뻔히 알면서도 밑지고 판다는 너스레가 밉지 않고 물건 값에서 한사코 동전 몇닢을 안주고 갔어도 다음 장날에 만나면 더 반가운..... 아, 이러한 영혼들을 흠향(歆饗)하며 사는 세상이 좋다 이들을 사랑 안하고는 못배길 것이다 이들이 있어 내 영혼이 굶지 않고 산다 Ⅵ 배우거나 동냥하여 얻은 영혼을 나는 밤을 새며 짜깁기한다 때로는, 단 한줄 써놓고 나서 계절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 영혼의 양식이 바닥나서다 오일장터는 내 영혼의 무대다 파장하는 두어시간의 풍경은 참 쓸쓸하다 모두들, 다음날 미지의 꿈꾸며 장터를 떠난다 모두들, 나를 위해 팔고 사는 수고처럼이다가 떠날 때는 아무런 눈 인사조차 없이 등을 돌린다 서너시간은 몇 장의 천원지폐로 산 몇 사발의 취기 속, 왕국의 왕이였었는데 반란(叛亂)으로 하야(下野)하는 중세(中世)의 왕의 심사가 이러하였을까 Ⅶ 이하(以下)는..... 여백(餘白)으로 남겨두자 다시, 왕이 되는 날까지..... 06091310. 邨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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