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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글쟁이, 그 얄미운 가벼움 본문

😀 Ador 빈서재

* 가난한 글쟁이, 그 얄미운 가벼움

Ador38 2013. 10. 23. 14:23



 * 가난한 글쟁이, 그 얄미운 가벼움

                   Ⅰ
몇 날, 몇 달을
그리도 홍역을 치르고 생산한 글귀 몇 줄
오가는 장삼이사(張三李四) 중에 
지 새끼 키워내듯 혼신을 다한 피땀인 걸
몇이나 알음으로 보아주랴만
그래도 
목줄이 두려워 입 다문 월급쟁이 대신에 떠안은 나팔로
세상을 발아래 굽어보며 감놔라 배놔라
할 말은 하면서 사는 재미에
끼니도 없으면서 
컬컬한 목, 헛기침으로 달래며
가갸거겨에나 목숨 올려놓는 가난하여 슬픈 백성의 이력이니
                   Ⅱ
닷새마다 서는 오일장 터에 파장(破場)이 시작된 늦은 오후
급한 볼일인양 찾아든 주막집, 가벼운 주머니를 감춘다
"어서 오세요, 빨리 주문하세요"
"청주 두 병 주시오"
"청주는 없고 막걸리뿐인데..."
"왜 그 좋은 청주라는 이름 놔두고 꼭 막걸리라고 하시우?
대접 좀 해서 부릅시다"
"안주는 무얼로..."
"됐수"
누가 보아도 
울화를 삭히기 위해 선 채로 들이키고 나갈 행색이지만
남는 게, 공상(空想)으로 허송하는 시간뿐인 위인임은
아무도 모르리.....
                    Ⅲ
지난 장마에 자릴 잡은 곰팡이가
한겨울에도 향그러운 골방에서도 유일한 낙(樂)은
닷새마다 서는 오일장 터다
아예
점심 없는 빈 배에 두어 사발 들이키면, 장터 세상이 내게로 온다
손님을 부르는 목청이 
꼭, 나를 위해 저리도 수고해주는 것 같아서 좋고
몇 천 원하는, 푸루죽죽한 슬리퍼 한 켤레를 사면서
깎아달라 흥정하는 것도 내 주머니 무게를 지켜주려는 것 같고
붕어빵 속 앙금을 조금씩만 넣고 닫는 뚜껑도
나를 위하여 덜컹, 빨리 닫히는 것 같아 좋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서 좋고
물건 파는 이들의 입도 귀에 걸려 있는 게 너무도 좋다
웃음과 반가움과 정들이
기약 없는 이별이어도 아픔 없는 이별이어서 좋다
좋은 것만 
기분 좋은 영혼들이 너무도 넘쳐나서 좋고도 좋다
                     Ⅳ
시(詩)도 저 속에 더불어 살아있어 좋다
하얀, 사람냄새가 좋다
선하고 선한 빠알간 피가 도는 사람 냄새
의욕과 희망이 넘치는 냄새
한 푼을 놓고 해학을 흥정하는 냄새
밝은 내일을 가슴에 품은 냄새가 좋다
이제는 엄마의 치마끈을 붙잡고 다니는 아이는 없다
엄마를 가끔 부르며 방향 정도 확인하려나
목에 건 과학을 믿고 
지멋대로 장터를 돌아다닌다
닭장 안의 닭을 건드리다 쪼이기도 하고
한 배에 나온 강아지의 눈을 건드리다가 기겁을 하기도 한다
과거와 현대가, 세대(世代)와 세대(世代)가 공존(共存)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Ⅴ 
내가 만든 세상 같아서 좋고
나의 백성다워서 좋고
내 땅, 내 자리에서 공짜로 살아가게 베푼 것 같아 좋다
남의 입안에 든 걸 뺏는 
정상모리배(政上謀利輩), 아귀(餓鬼)들이 없어서 좋다
무엇보다
사상이니, 이념이니, 장터 거덜내는 떼거지가 없어 좋다
아프게하는 게 없어 좋다
필요에 의해서 사고 
필요에 응(應)해서 팔고
이 두가지의 규칙만 허물어지지 않으면 된다
뻔히 알면서도
밑지고 판다는 너스레가 밉지 않고
물건 값에서 한사코 동전 몇닢을 안주고 갔어도 
다음 장날에 만나면 더 반가운.....
아, 이러한 영혼들을 흠향(歆饗)하며 사는 세상이 좋다
이들을 사랑 안하고는 못배길 것이다
이들이 있어 내 영혼이 굶지 않고 산다
                      Ⅵ
배우거나 동냥하여 얻은 영혼을 나는 
밤을 새며 짜깁기한다
때로는, 
단 한줄 써놓고 나서 계절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 영혼의 양식이 바닥나서다
오일장터는 내 영혼의 무대다
파장하는 두어시간의 풍경은 참 쓸쓸하다
모두들, 다음날 미지의 꿈꾸며 장터를 떠난다
모두들, 나를 위해 팔고 사는 수고처럼이다가
떠날 때는 아무런 눈 인사조차 없이 등을 돌린다
서너시간은 몇 장의 천원지폐로 산
몇 사발의 취기 속, 왕국의 왕이였었는데
반란(叛亂)으로 하야(下野)하는 중세(中世)의 왕의 심사가 이러하였을까
                       Ⅶ
이하(以下)는.....
여백(餘白)으로 남겨두자
다시, 왕이 되는 날까지.....
06091310. 邨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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